2012.04.22. 나우은클에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www.noweuncle.com)

설명 덧붙이자면

1. 슈마허의 최후(?)는 본편(원전) 마지막 부분에 서술된 것에 살을 붙인 것임(완전창작 아님)

2. "아름다운 시절"은 1차대전 전야 유럽의 번영기...(쳇 침략/식민을 통한 번영이라니)

를 가리키는 역사학계의 용어 "벨 에포크"(좋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 정도의 의미)를 가져다 쓴 것임;;;

(의미나 시기 모두 정확한 얘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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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측]
○ 군관구제 수립 시행
- 각 관구별로 1개 함대씩 주둔(수도방위함군에는 3개 함대 배정)하여 항로안전 확보, 우주해적 퇴치
○ 함군
- 대규모 작전(반란진압, 장거리 원정군 등) 위해 수 개 제식함대를 통합지휘하는 ‘함군’ 개념 및 교리를 채택
○ 우주해적(주로 탈영군함이며 일부는 비밀리에 해적활동을 겸하는 상선으로 이루어진)의 발호가 극심해짐
○ 투르나이젠(토울나이젠)-바겐자일 반란사건
- 수도 페잔에서 가정 먼 성역의 군관구 사령관으로 재입신한 투르나이젠이 부사령관 바겐자일을 설득하여

반란시도 : 독립군벌화/독립영주화 시도(칭제건원은 아님)
- 진압군은 초기에 의외로 고전하였으나 결국 진압. 특히 케슬러는 이때의 군공으로 야전군인으로서의 유능함을

당대 및 후대에 입증
- 군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계기가 되어, 제국정부에서는 이후 결국 문민우위 달성. 이 반란사건을 이용하여 문민화를 추진한 힐데가르트의 책략과 정치력은 이후 은하정치사에서 두고두고 주목받음
- 7원수 한둘 정리
- 바이에르라인의 부침 : 반란사건 초기의 실수로 강등, 그러나 이후의 여러 군공으로 미터마이어의 후계자라는

평판을 회복하게 됨, 여러 사건과 인연으로 바라트 자치정부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갖게 됨
(대체 이 젊은 양반이 은영전 원전 마지막 시기에 벌써 계급이 상급대장이면 어쩌라고;;;)
○ 7원수 일부 입각, 일부 은퇴.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시절]에 이바지
○ 마린도르프
- 콘라트 폰 모젤, 마린도르프 가의 양자가 되어 당주 승계, 이후 힐데가르트, 안네로제 등의 신뢰와

문무 양 분야의 업적으로 마린도르프 대공령을 하사받음, 이는 결국 ‘자유제정’ 대신 끝내 신제국에서

귀족층이 재성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함
○ 변경성역 개발
- 전란종식으로 인류생활권 확장을 도모하는 변경성역 개발 착수
- 새로이 개발된 변경성역 방위 문제로 군관구 추가, 군관구제의 예외인 원정군의 상시적 편성 등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점차 군관구제의 근간을 흔들게 됨
○ 네오 프로세르피나
- 구제국 성립 당시, 극소수 인원이 은하제국 통치영역 밖으로 극비리에 탈출에 성공하여, 조금씩 국력과 지배영역을 확장해 왔으나
- 신제국의 변경성역 개발로 인해 결국 존재 노출, 존망의 위기에 놓이게 됨
- 바라트 자치정부와는 일사불란한 대제국 저항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불편한 연대’ 관계
- 건국 초기 힐데가르트 등의 헌신적인 노력과 적극적인 정책 추진으로 이룩된 신제국 초기의 이른바

[아름다운 시절]을 끝장내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됨
- 다른 주요 원인으로는 변경성역 개발(=제국 통치지역의 확대) 및 귀족층 재성립(마린도르프, 변경통치권한

수임 귀족가문)을 통한 중앙집권 약화와 경제혼란 등을 꼽을 수 있음
○ 아름다운 시절 : 비교적 공정했던 제국정부의 중앙집권적 통치권 온존, 문민우위, (바라트 자치정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주목할 만한 경제발전과 재분배/복지정책 성공 등으로 인한 안정되고 풍요로웠던 시기를 표현하기 위해 후세 역사가들이 채택한 용어
○ 뮐러
- 바라트 자치정부 영역을 포함하는 군관구 사령관 취임, 이후 다대한 군공으로 제국군인의 최고지위에까지 오름
- 코크란(동맹), 슈마허(소위 정통정부), 디터스도르프(로이엔탈) 등을 기용, 활약케 함으로써 ‘재활용의 뮐러’라는

또다른 별칭을 얻음
(슈마허는 우주해적과의 전투 중 뮐러의 기함을 지키다 승선 중이던 함선 대파시 행불)

[바라트 자치정부측]
○ 자치정부 구성
- 황 루이, 프레데리커 그린힐, 그레이엄 노엘베이커 등의 노력으로 통치체제 재수립
- 통령제 채택 : 초대 정부수반(=통령. 황 루이), 초대 의회의장, 초대 사법수반의 유기적인 협력관계는 후세에

‘우아하고 극히 효과적이었다’라고까지 평가받음
○ 자치정부 경비함대 구성
- 방위국(구 동맹 국방위원회에 해당) 초대국장 카젤느 취임
- 카젤느의 제안으로 후방근무본부 및 통합작전본부는 서류상의 존재에 그치고 과거 1개 제식함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주함대 병력을 재편, 아텐보로가 사령관에 취임 방위국의 직접 통제하 군을 통솔

(휘하 분함대 - 데슈, 마리노, 뷰포트, 브래드죠-브레첼리)
- 마리노 등, 고 피셔의 함대운용능력을 시스템으로 재현키 위해 1000척 이하 함선들에 적용될 [중소규모 함선집단

운용통제시스템]개발, 이후 우주해적과의 전투에서 유효성 입증
- 민츠, 우주함대사령관 부관직, 공전대 전술운용 심사관, 방위국 정보청 수석참모, 일선함대 참모/지휘관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가며 활약. 한편으로 주역관제 등 양웬리의 전략전술 사상을 이론화하여 후세에 전함
- 우주해적에 대해서는 제국정부/군부와는 달리, 자치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설득/귀순공작을 진압과 병행하여 큰 효과를 봄 : 병력/함선 확충, 우주해적 세력의 정보 획득, 우주해적 은신처 주변의 미확인 항로 확인 등
○ 공전대, 4기일체 전법 채택
- 콜드웰, 4기일체 전법을 주창 크로이처(3기일체 고수 입장)와 대립
- 민츠, 4기일체 채택 결정. 일부 후세 역사가들은, “진위 여부가 분명치 않은” 샤를로트 필리스와의 ‘부적절한 관계’의

의혹 또는 그 의혹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때문이 아니라, 이 결정이 민츠-크로이처의 결별 사유라고 끈질기게 주장

하기도 (다수 역사가들은 ‘관계’는 명백하였다며 이 주장을 일축)
○ 데모크라틱 쇼비니즘
- 구 우국기사단 인사들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우주 전역에 전파하기 위해 강대한 국방력을 구축하여 전 인류거주

영역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골자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사상사를 통틀어 해괴하기 그지없는

‘데모크라틱 쇼비니즘’이 대두
- 이후 장기적으로 보아 그 영향력은 없다 해도 좋을 정도이나 당시에는 일부 자치정부 주민들의 열광을 이끌어 내고 브래드죠의 야심을 자극하였음
○ 쿠데타(브래드죠) 불발
- 데모크라틱 쇼비니즘 대두, 구 우국기사단 세력과의 은밀한 연합, 휘하 분함대 무력 등을 이용 쿠데타 시도
- 불발(군 최고수뇌부 및 데슈, 린츠 등의 활약), 브레첼리가 후임 분함대사령관직에 취임
○ 변경성역 개발, 경제발전
- 황 루이가 제안, 정부수립 초기부터 바라트 성계에 인접한 변경 미개발 성역인 하다드, 메르카르트 성역의 자원개발 허가를 제국정부에 청원
- 투르나이젠-바겐자일 반란사건 진압을 위해 뮐러함대 이동 후의 치안공백을 아텐보로-민츠의 화려한 전술적

성공으로 훌륭하게 메꾸어 냄으로 인해(더불어 독립 시도를 전혀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제국정부/군부의 부채감

(과 정치적 신뢰)을 얻음으로써 개발 승인
- 개발 성공으로 인한 자치정부의 경제력 및 시민의 생활수준은, 같은 단위의 제국 측 수치를 크게 상회하게 됨
○ 네오 프로세르피나와의 ‘불편한 연대’
- 네오 프로세르피나의 존재 노출 후, 제국에 대한 일사불란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밀사 파견
- 초기의 민주적 통치체제가, 구 제국에 대한 공포심 및 조직보호 논리의 최우선시 등이 ‘제도화’됨으로 인해 일인

또는 과두 독재체제로 변질되어 갔음을 확인하고 ‘또 하나의 전제주의 세력’으로 규정
- 이후 적극적인 연합 대신, 마키아벨리적인 논리(제국의 국력 소모를 노리는)로 상대의 생존유지를 지원하는 수준의 비밀정책 및 공작을 구사하는 정도에 그침
○ 바그다슈, 라오
- 바그다슈 : 방위국 정보청장 취임, 제국에 대한 정보공작 지휘. 동시에 자치정부 첩보국 창설을 제안. 라오를 유능한 정보요원으로 단련시킴. 브래드죠 반란 시도를 가장 먼저 포착하나 반란 지지자에게 암살당함
- 라오, 방위국 정보청에서 제국에 대한 정보공작을 현장지휘. 이후 바그다슈의 제안으로 퇴역 및 자치정부 첩보국

창설에 가담. 3대 첩보국장, 네오 프로세르피나로의 밀사파견 공작 성공시킴. 이는 이후 삼백여 년 간 [인류사상

최장거리의 첩보공작]으로 평가받음

[우주삼국지]
신제국, 신제국 통치 하에서도 차츰 성장해 낸 바라트 자치정부,

신제국의 공격으로 초기 지배영역을 상실하나 끝내 완전멸망을 피하고 망명해 온 우주해적 세력을 흡수한 네오 프로세르피나

- 신제국의 [아름다운 시절]이 끝나가면서 3대 세력이 다시 각축을 벌이게 됨. “흡혈요정은 불면불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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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윈터스 본]오늘에야 감상. 하드보일드, 구나! 대도시 대신 혈연으로 얽힌 시골이 배경, 중년남성탐정 대신 소녀가장 주인공이긴 하지만/ 내가 가장 두드러지게 느낀 건, 이건 타협(의 과정)을 그린 영화다, 라는 것. 다른 테마도 다루겠지만.

 

2. 

감상평 좀 찾아보니 [역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영화 속 기호(상징)의 배치로 영화를 읽는] 나도 좀 해 보고 싶지만 통 안 되는 유형의, 소개글이 있다. http://blog.daum.net/kom1029/171 결론에의 동의 여부 떠나 이런 시선 가지셨다는 게 참 부럽

 

3.

[윈터스 본]의 주제완 관련 없지만 덧감상 - 군 모병관(아마 해병대)이 이런저런 사정 참작해 주인공의 입대를 오히려 말리는 부분이 인상적 - 임무 수행자는 두 측면 모두로 평가해야 한다. 수행했는가 & 기준에 비추어 하지 않아야 할 때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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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살았던 오늘, 김형민, 2012, 웅진지식하우스

 

인터넷 세상(블로그 트위터 등)에서 산하라는 이름으로 이미 꽤 알려져 있는 김형민 님이 쓰신 ‘몇 월 몇 일자 오늘의 역사’ 형식의 역사 이야기책. ‘오역’이란 말은, 다른 의미도 머리말에 설명되어 있지만, 오늘의 역사의 줄임말이다.

길이가 짧은 글들의 묶음이라 한 부분씩 끊어 읽기가 가능한 책인데... 시간 여유가 조금만 있어도 자꾸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마성의 작품’이다.

 

필자 생각에 책의 장점은 크게 네 가지.

(유명 사건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좀 더 알게 되는 이른바 ‘잔재미’는 기본이다.)

 

우선 다른 평가 다 떠나서 내용이 재미있다. 저자를 아는 사람들 대개가 칭찬하는 그 필력 덕분이리라.

예를 들어 독일 나치의 분서를 다루면서, 불타오른 책의 지은이 중 하나인 하이네의 말 “책을 불사르는 곳에서는 마지막에 인간까지도 태울 것이다.”에 덧붙인 저자의 감상한 마디는, 특이한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공감으로 필자의 가슴을 쳤다. 이하 필자의 이런 예시들은 ‘빙산의 일각’일 따름임을 분명히 밝혀 둔다.

둘째로 역사라는 무대에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바로 옆 그림자 속에 묻힌 인물과 그의 행적을 알아가는 흥미가 쏠쏠하다.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유이한’ 두 대표 중 만해 한용운에 비해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일이 적은 나머지 한 사람을 다룬 2월 24일자 오역, 저자가 훌륭하기 첫째로 손꼽는 한국의 영부인을 다룬 11월 24일자 오역, (오역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 손기정의 이야기에 함께 등장하는 마라톤 동메달리스트에 대한 안타까움 섞인 서술 등이 그러하다.

셋째로 우리가 무심코 인용하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들의 기원을 알 수 있어 좋다. “여럿이 함께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됩니다.”와 같은 따뜻한 명언이 누구의 발언이었는지(8월 27일 오역) 등등.

넷째 종횡사해 전 세계 곳곳의 유명사건들이라는 ‘역사의 우물’에서 재미와 의미를 가득 길어올리고 있기도 하지만, 한국 현대사 상의 인물이나 사건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어 독자 입장에서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된다. 1월 1일과, 다시 보아도 다시 가슴이 아플, 너무나 아플 9일자 오역에서부터, 역시 분노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12월 30일자 오역까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자의 ‘세상 일들’에 대한 입장은 (필자가 보기에는) ‘딱히 또렷한 보수도 진보도 아닌 것 같지만 진보 쪽으로 아주 약간’ 정도.

자신의 입장을 모호하게 숨기고 좋은 얘기들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을 필자와 같은 게으른 사람들보다는 ‘좀더’ 알아내려 애썼고 알고 있기에, 저자는 쉽게(?) 한쪽 편을 ‘닥치고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입장을 소리 높여 일방적으로 외쳐 대는 것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2월 29일과 3월 28일자 오역은, 사회적 약자들이나 국가/사회의 개선에 힘을 쏟은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보다는 더’ 동정적이고 호의적인 저자가 그런 동정이나 호의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오역들. 심지어 4월 21일 오역에서는 그런 동정이나 호의를 품은 대상에 대해서조차 잘못되었다 여기는 것에 대해선 잘못이라 말할 줄 아는 ‘균형감각’을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풍부한 감성을 곳곳에서 잘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감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3월 4일자 오역의 비극적인 사건에서도, 흔히들 상상하기 쉬운, ‘사람이 남아 있다’고 주장한 화재 피해자를 추궁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트위터에서 우연히 접한 글 덕분에 실제론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저자가 이를 몰랐을 것 같진 않다.)

 

 

 

다소 다른 얘기를 덧붙이자면, 역사를 읽는 의미를, 필자 생각으로는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를 음미하는 것이 하나.

역사로부터 어떤 의미(교훈이란 말은 좀 꼰대스럽...다)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또 하나.

감히 판단하기에 [산하의 오역]은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좋은 글로 가득한데 아주 약간은 더 둘째 의미에 기울어 있다.

그러나 첫째 의미로도 충분히 주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할 만하다 본다. 이 책은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읽힐 만하다.

 

마지막으로 책에 부치는 소망을 밝힌다.

이 책이 예상보다는 덜 팔린다고 들었는데 좀더 많이 많이 팔리기를. 이왕이면 자신의 책이 너무 잘 팔려 부자가 되자 괴로웠다는 공산주의자 잭 런던의 에피소드만큼이나 저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대박’이 났으면.

그리고 잘 팔려서 2권 혹은 개정증보판이 나오기를.

97~98 ‘노약자과 부녀자’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보이지 않는 자잘한 오타(필자가 발견 못한 다른 오타나 비문 등도 만약 있다면 함께)와, 7월 28일자 오역의 제목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같은 다소 심각(?)한 오류도 함께 수정해서 말이다.

책이 365일 모두를 오역으로 채우고 있진 못하고 어떤 날짜들은 매우 간략한 사건 설명으로 ‘넘어가’기도 하는데 이왕이면 365일을 꽉꽉 채워 주었으면 한다. 넘어간 날들만 모아 2권이 나오거나, 아니면 365일 모두를 다룬 증보판이 나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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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 박권일 잡감, 2012, 자음과모음

 

우선 감사부터.

그 다음은 난처한 심정임을 고백해야겠다.

 

현상의 이면에 숨은 실상에 대한 예리한 지적, 대적해야 할 것들에 대한 또렷한 비판, 약자들을 향해 품은 연대의식과 가슴 아파하는 마음씨 등등 새겨두고픈 문장과 개념, 제언들이 빼곡한 이 책을 읽게 해 준 저자에게 감사를.

그리고 부제를 ‘잡감’이라 달아버림으로써, 이런 책이 잡감이면 이 보잘 것 없는 독후감(?)에는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 난처함을 느낀 데 대해 원망을.

결국 따로 이름을 붙이진 않았다......

 

인터넷이나 트위터 세상에서 ‘쟁가’란 필명으로도 알려져 있는 박권일의 [소수의견]은 대략 2008(빠르게는 2007)년~2012년 전반부에 걸쳐 그가 발표하거나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시사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글들로서, 그의 입장은 - 설명이 정확하지 않아 저자에게 오히려 누가 될지 모르겠으나 -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좌파’ 내지 ‘진보’라고 불리는 혹은 그 이름을 자칭하는 인물/세력/집단들보다 한층 더 왼쪽에 서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숨기지 않았음에도 저자의 생각이나 주장은 보편적(좋은 의미에서)으로 고민해 볼 내용들이다. 또한 ‘표준 시민’과 같은 매력적인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더 다듬어지고 연구되어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이 되기를 소망한다.

 

단일한 주제로 길게 이어지는 ‘하니의 글’이 아니라, 필자는 독후감의 ‘포인트’를 어디로 잡아야 할 지에 대해 어려움을 느꼈다. 결국 글들을 읽으며 순간순간 떠오르는 느낌을 메모해 두었다가 순서대로 정리하는 방법(?)을 택했을 따름이다.

이하 ‘독후감’은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필자의 눈에 번쩍 들어온 문장들의 소개.(따로 괄호를 덧붙여 짤막한 감상을 덧붙이기도 했다.)

나머지 하나는 글의 내용 중 내가 의문이나 문제제기(감히!)를 하고 싶은 부분에 대한 장황한 서술. 후자는 필자의 무식함과 게으름, 사유 부족만 드러낸 것일 수도 있겠다. 다만 이런 약간의 의문이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참으로 읽을 만하고, 그러므로 여러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 기억해 두고 싶은 문장들 : 문장 첫머리의 숫자는 쪽수 >

56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이렇게 유행하는 것은 정작 소셜 네트워크가 잘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 아닌가

97 미디어 리터러시한 수도권의 2040세대 (중략) 그들이 바로 표준 시민의 중핵을 이루는 집단

100 소셜 미디어는 사회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자원’이다.

123 빵빵한 지식과 윤리 의식까지 갖춘 시민이 이렇게나 늘어났는데 어째서 세상이 이 모양일까.

(냉소 작렬, 이라고 메모해 두고 싶은 문장이다.)

149 지역 엘리트의 출세 경쟁이 지역 토호의 이권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역민과 시민 전체의 복지에 기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믿는다.)

167 ‘국가의 후퇴’가 ‘강한 국가의 열망’으로 나타나는

199 ‘진정성’ 같은 심정 윤리를 통해 사회문제를 판단하길 좋아하는 한국 사회야말로, 소셜 맥거핀이 자라날 최적의 토양

(소셜 맥거핀 : 사회적으로 첨예한 적대를 은폐 왜곡하기 위해 대두되는, 실체가 없거나 사소한 적대 - 197쪽을 참고한 필자 주)

228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지만, 꼰대도 그렇다.

264 얄궂게도 부모 세대와 그들의 자녀 세대가 공히 비정규직 문제의 최대 피해자다.

(이런 지적을 접하면, 너무 아득해서 한숨만 난다. 하여간 비정규직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 의문 또는 문제제기 >

51 온라인 ‘브리콜라주’

57 온라인 ‘정의구현사제단’

- 브리콜라주라는 단어는 인터넷 사전 검색을 뒤져보았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그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던지라 찾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 개개인이 기억하고 있는 정보의 양과 종류가 서로 달라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건 물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감수라고 하나, 뭐랄까 책을 최종편집하기 전에 독자들이 다소 생소해하겠다 싶은 명칭(인명 포함), 학술용어 등에 대해선 간단하게 설명을 달아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97 등 ‘표준시민’

- 앞서도 얘기했지만 ‘표준시민’ 개념을 더 다듬고 연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재미있고 중요한 개념이 될 것이다.

 

124

신자유주의에 대해, 지구온난화에 대해, 그리고 MB에 대해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정보 중에서 엄밀히 검증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 저자가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들인데, 호의적이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이후 부분만 따로 떼어 써 놓으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 앞의 어구가 추가될 경우 표정을 굳힐 것이다.

저자의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부분.

- 개인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경험을 은연중에 절대화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고 있다. 만일 이런 의심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우리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늘 고민해야 하는 것 중 한 가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마외도’ 놈들을 어찌 대할 것인가?”

즉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당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보장은 없으니 일단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진 마세요...’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더 실용적(!)이지 않을까... 절대 참신한 문제제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124(~125로 이어지는 마지막 문단)

- 뒷 문장은 참으로 좋은 제언이라고 본다. 하지만 앞 문장은 좀...? 주변의 생활인들에게 쉽고 간결하며 섬세하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서 ‘개념어나 최신 정보의 습득’의 가치를 낮추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130 가장 아래 ‘소진하다’라는 단어

- ‘소진하다’의 주어가 사람이 아닌 ‘소설’이라 주술관계가 어색한 문장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사전에 따르면 사물을 주어로 하는 자동사로도 사용할 수 있다. 내 무식만 드러난 셈이지만, 덕분에 단어의 의미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라고 자위해 본다...

 

206 [슈퍼 갑의 사회] 중에서 206쪽 마지막에서 둘째 문단부터 글 마지막까지

-이 부분에는 ‘을의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 서술되어 있다. (이때의 을이란 중소기업 내지 소규모 자본) 주장된 내용에는 공감이 가나, 약간만 설명을 덧붙였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감히 가져 본다.

한국 중소기업은 대기업(대규모 자본)에 대해서는 을이지만, 소속 노동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갑’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짚어주었다면 글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지지 않을까. 글 전체적으로 한국 중소기업을 을의 위치에 놓아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231

386들은 자신들이 정작 이명박과 이회창에게 화끈하게 표를 던졌으면서도 (후략)

 

- 이 문장을 읽다가, 나는 오래 전 읽었던 방현석의 소설 [당신의 왼편]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매우 오래 전이라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80년대 중앙대학교(맞나?) 최대규모의 데모에는 800명 정도가 참여했는데, 같은 날 그 대학 캠퍼스에서 열린 쌍쌍파티에는 3,000명이 참석했더라는...

(소위 386의 업적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나) 그 386들이 실제론 그랬다는 거다. 386이니 20대니 하는 이른바 세대론이란 것에 대해, 그 구절을 읽은 덕분(?)에, 별로 믿음을 가져 본 적이 없는데, 231쪽의 위 문장을 읽으며 묘하게 공감을 느꼈다.

 

260

2008년 촛불시위 당시 새벽까지 이어지는 집회에서 매일 최후까지 남아 가장 격렬히 저항했던 이들이 대학생들이었다는 사실

 

- 진한 부끄러움을 느낀 구절(이 책을 읽다 부끄러움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필자는 위의 사실 자체를 2012년 여름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대학생들이 아무 것도 안 했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거고 그런 걸 섬세하게 파악해야지’라는 정도의 생각만 갖고 있었을 뿐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부지런해야 하는데 필자는 그러지 못했다. (필자의 문제는 이것 하나만이 아니지만...)

 

 

281과 287에는 거의 동일한 진술이 등장하는데 일단 인용해 보자

 

계급 적대가 정당을 통해 제대로 대의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이기에 특정 세대의 이념은 (정치적) 계기에 따라 (그것도 큰 폭으로) 끊임없이 진동할 수밖에 없다.

 

- 이 문장 때문에 여러 시간 골머리를 싸맸다. 뭔가 맞는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뭐랄까, 생각을 따라가지를 못했다. 필자 자신의 낮은 이해(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관련 정보의 빈약함)이 제일 큰 문제임은 분명하나, 솔직히 볼멘소리를 좀 하고 싶기도 하다.

‘계급’에 관한 이야기가 갑자기 ‘세대’로 비약한다는 느낌, 다시 말해 ‘한국 사회이기에’와 ‘특정 세대의 이념은~’ 사이에 한두 문장이 빠져 있다...는 의심이 든다.

-‘특정 세대의~’부분(즉 문장 뒷부분)은 사실을 명료하게 진술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문장 앞부분과의 연결고리. 연결고리가 뻔한데도 필자가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것이겠지만......

- 애써 이해해 보자면,

실제로 있는 것은 계급 적대인데 > 이것이 정당정치 등을 통해 제대로 표출되지 못하고 있다 > 표출되지 못한 계급 적대는 그때그때의 이슈 등과 연관되어 간헐적으로 그나마도 왜곡된 형태로 표출되고 있을 뿐인데 > 한국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마치 특정 세대의 대다수가 특정 이념을 가진 것처럼 오해된다

...정도로 생각을 정리(?)할 수는 있었는데 저자의 생각을 잘 따라간 것인지 자신이 없다.

- 혹은 차라리,

“한국 사회에서는 계급 적대가 정당을 통해 제대로 대의되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사회적 조건이나 이슈와 연관되어 간헐적으로 분출될 뿐이며 그조차도 특정 세대의 이념적 지향이 실재하여 그것이 드러난 것처럼 왜곡되게 분출되고 있을 따름이다”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방자한 생각까지 든다.....

-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 보았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계급적대가 세대이념으로 왜곡되는 과정/경로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소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이 책에 대한 내 호감은 분명하다.

 

열심히 살았는데 어째서, 라며 절망하는 당신께

이게 사는 건가, 라며 절규하는 당신께

세상 원래 이 꼬라지인 거 몰랐나, 라고 냉소하는 당신께

상식과 원칙이면 됐지 뭘 더, 라고 자신만만해하는 당신께

내가 이만하면 진보적이지 뭐 쓸데없는 데까지 신경을, 이라고 확신하는 당신께

세상이/세상을 좀 덜 고통스럽고 좀 더 따뜻한 방향으로..., 라고 소망하는 당신들께

 

다시 한 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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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홍정훈의 판타지 [더 로그]를 읽다 등장인물 '스트라포트'의 사랑하는 모습에 고개를 숙인 적이 있다...

 

목숨바쳐 사랑한 여인을 위기에서 구출했는데 (구출당시 여인은 눈도 멀고 정신도 온전치 못한 상황)

그 여인이 다른 남자를 찾는 것을 보고 그 다른 남자인 척하면서

여인을 여인의 고향에 데려가 치료받게 하곤 떠났다.

(이건 정확한 요약은 아닌데 - 읽어 보신 분들은 알 테지만 - 스트라포트의 입장에서 쓰다 보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닌데.....'판타지 따위'의 한 장면을 읽다 숙연해졌다...뭐, 소유욕 없는 사랑이 과연 사랑이겠는가 하고 따져볼 수는 있겠다.

 

※ 그 외에도 '여러모로 튀는' 판타지였다. 주인공이 최강이 아닌 점(엄청 강해지지만, 마지막까지 더 쎈 캐릭터들이 우글우글;;), 세상의 위기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것, 그 와중에 그저 한걸음 한걸음 성장해 가면서 자신의 목표를 추구해 가는 것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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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감

카테고리 없음 2012. 7. 3. 21:27

(2012.7.3. 트위터에 쓴 글 정리)

오래전, 정말 오래전부터 가져 온 위기감 - 정보는 쏟아지고, 접했던 소식들 중 그 진상/본질 분명하게 알았낸 건 하나도 없고. 맘 속에 쌓여 가는 건 '세계관/가치관'이란 이름의 희망과 욕망과 편견과 불완전한 정보의 덩어리.

 

요약하면 [하루하루 바보가 되어 간다]. '공부해야지'란 결심이 '여전히 공부를 시작도 안 했어'라는 자책감과 절망감의 탄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 느낌이 정말 위험할 정도가 되기 전에, 아니 위험이 되기 전에 먼가는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

 

신문지상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사건들 중 단 하나라도 내가 그 원인 - 경과 - 결과, 사건의 본질, 의미 이런 거 명쾌하게 파악했던 적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좀더 악착같이 달려드는 태도가 필요하다.

 

(웃기는 건, 얼불노 미국드라마 판의 페티르 바엘리시의 플픽을 올려 놓은 상태에서, 어떤 일의 진상과 요체(내지는 어떤 특정한 개념의 의미와 적용 등)를 한 번도 파악해 본 적이 없다고 반성하고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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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1 우리모두 등에 올림.
지금(2011.12.31)와서 다시 읽어보니 수필이라기도 그렇고... 내 기대를 현실인 듯 적어놓은 부분들이 있다..>


평범과 비범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평범과 비범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 차이는, 그 시작에서는 미미하나 그 끝에서는 광대하다.(참고로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이 비범으로 입문하여 일정한 성취를 이룬 자들이 달인達人The Master이다. 무협지 버전으로는 고수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기 분야에서 내공수위 높은 작자들이다.
우리 객잔 주인 양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저 평교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교육계의 달인이라든가, 격투기의 달인일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본인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아닐 리가 없는 것이다.)
어두운 골목에서 불량청소년(?)을 두들겨 패 징계하는 교육적 격투가라는 달인의 면모... 상상되지 아니한가.

40방 프란 님(불안이라는 명호라도 붙여 드릴까?)의 글과 작품 사진을 보자.
달인의 면모가... 팍팍 풍기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본인은 부정하실 것이다. 아무렴...
근데 그것은 기준의 차이 때문이다. 입문하지 아니한 자(문외한)의 기준은 땅인데 입문한 자의 기준은 비범 다시 말해 하늘天인 탓이다.
문외한은 감탄한다.
달인은 부정한다.
겸손한 것도 아니요, 겸손이 지나쳐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기준이 다른 거다. 어쩔 수가 없다.

뿐인가?
주와 식(주의 : 색 아님)의 달인 좌호법이 있다.
어용의 달인 구라장풍이 있다.
기타등등...

이 달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러 범주가 있을 수 있다. 대충 범주별로 이름붙여 보자.
(1) 자각 명성 달인 - 자기가 달인임을 의식하고 아울러 세상이 인정해 주는 달인. (명배우로 인정받는 경우라든가.)
(2) 자각 무명 달인 - 세상이 모르고, 아는 사람만 아는 달인. (영화 <아라한장풍대작전>의 등장인물들 같은.)
(3) 비밀 달인(혹은 크렘린 달인) - 친구도 배우자도 모르게 정진하는 크렘린스러운 달인.
(4) 미자각 달인 - 자기가 달인인 줄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도 대개는 몰라주는 달인. (전업주부 어머니들의 칼질, 바느질을 상상해 보라.)

첫번째 범주보다는 두세네번째 달인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이 달인이라는 인간존재들은 무엇을 하는가?
달인으로서 그들이 하는 일은 저마다의 타고난 자질......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이런저런 인연 닿아 기예(대개는 전승되어 온.)를 수련하는 것이다. 물론 자질 있으면 더 좋겠고.

목적이 뭐냐고?
전승되어 온 기예를 마르고 닳도록 익혀서 또 때로는 제자 만나 전해주는 그 목적이 뭐냐고?

목적 없~~~다.
목적이 있으면 이미 그 기예 자체를 수단시한다는 얘기다.
전승에 입문하여 기예를 마르고 닳도록 갈고 닦는 데 목적은 없다. 돈? 권력? 유혹할 수 있는 매력?
그런 걸 얻을 수 있을 줄로 잘못 알고 시작하는 게 계기는 될 수 있겠지.
그러나 실은
돈, 권력, 매력 그런 거 얻는 데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은 차마 안 되는 것이 이 달인의 길이다.
그러니 하다가도 하나 둘 관두거나(대개는 100중 99가 그렇게들 관두게 되는 것이다.) 아님 처음의 자기 목적은 잊어버리고 "재미있어... 재미있어. 어쩌면 좋아!!!"하면서 계속 추구하게 되는 거다.

참고로 우리 무협지의 폐해 중 하나가 그거다.
달인 되면 세상의 행복이 제 발로 걸어, 아니 뛰어들어 오는 듯이 얘기하는 스또리들......
무협지 좋아는 하는데 제발 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쓰는 것 좀 그만 해 줘......

영화 <서편제>의 경우처럼 기예가 어찌어찌 호구지책으로 직결되는 수도 있기는 있다. 명배우의 연기처럼 명성을,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게 되는 일도 어쩌다가는 있다.
그러나 그걸 유일한 경운 줄 알면 안 된다.
전에 무시무시(?)한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중국권법 한 종류를 평생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직업이 교수란다. 근데 이 사람은 교수직을 철저하게 호구지책으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신의 가호 있으라...
뿐인가...
평생 초라할 데로 초라하게 살면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을 권법수련에 썼다는 어느 권법가의 인생 얘기도 들어본 바 있다.

그쯤 되면 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예를 추구한다는 게, 입문하여 달인의 길에 들어선다는 게 그런 마력이 있는 것이란 증거도 되겠다.

좀 따로 얘기하자면 기예 자체가 가진 세상에서의 유용함이 큰 경우는 있다.
무술이 그렇고 마술이 그렇고 뭐 기타등등......
엉뚱한 마음 먹고 배우면 대형 사고 터지고 피해자 속출한다.
비인부전이니 하는 얘기가 그러고 보면 말이 되는 부분이 있군, 하고 느끼게 된다.

...각설하고, 굳이 목적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면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다음 번에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해 낸 것보다 더 잘 기예를 펼쳐 내는 것이 기예를 수련하는 목적이다. 즉 목적은, 기예 자체의 추구에 있다.
뭐 하나 더 덧붙이자면 후세에 전해 주는 것 정도?
그런데 전해 주는 것은 모든 달인들이 늘 하는 일은 아니다. 한 생명 다할 때까지 혼자 추구하다 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한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는 이 달인들도 남들 사는 듯이 산다. 남들 사는 듯이 사는 것처럼 보인다.(때로 필요에 따라선 남들 사는 듯이 사는 척 한다.)
생활인으로서, 직업인으로서 돈 벌고 배우자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 낳고 살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 반드시 돈 벌고 결혼한 다음이어야 한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 만나는 것이다. 전승에. 기예에. 그리고 빠져들고 몰두한다.(영화 <섈 위 땐스>에서 야쿠쇼 코지가 분한 주인공 남자의 경우를 보라.)
세상에서 흔히 쓰는 말로는 취미라고 한다. 스스로도 그냥 취미인 줄로만 아는 경우도 있다. "글쎄 고스톱 치면 왜 그런지 열에 일곱은 따더라고 허허."

제대로 작심한(그러니까 달인 소릴 들을 정도로 대성하는 거지.) 달인들의 경우에 세상 남들 사는 것처럼 사는 게 기예를 수련하는 데 방해가 된다 싶으면 그런 삶 따위 바로 걷어차 버리는 경우도 있다.
<서편제>를 보라.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꼴인가?

근데 그 '사람 사는 꼴'이란 건 세상의 행복이다. 서편제 여주인공과, 여주인공 아버지가 바라보는 것은 세상 너머, 저 멀리 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소리를 몸과 마음에서 뽑아내는 것! 달리 그 동네 용어로는 득음! 그 자체!
바라보는 것은 하늘天이다. 머리 위에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고개 90도 뒤로 꺾으면 보이는 그 퍼어런(밤에는 시꺼먼) 것만 하늘이 아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오히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니 뭐니, 주희가 성리학 체계 세우면서 천天-성性-도道-교敎니 뭐니 할 때 쓴 개념, 이데아나 천에 가깝다.
혹은 하늘이 내린 재능 줄여서 천재天才Genius/The talented라고 할 때 그 하늘이다.

기예 자체의 절대적 경지! 이 글 쓰고 있는 인간도 차마 짐작이 안 되는 그 경지! 그게 하늘天일 거다.

목적이 없으면 그럼 하는(한다기보다는 차라리, 빠져드는) 이유는? 재미다.
달리 뭐가 있겠는가? 재미있어서, 다.

혹 달인을 보고 싶으신가?
독심술 관심법 통달하면(그러고 보니 것두 기예에 속할 거 같네.) 널린 게 달인이겠지만, 일단 안 보이니.
달인을 쉽게 보고 싶으시면 가까운 비디오대여점을 찾으세요. (아님 비디오방)

[이건 딴 얘긴데, "가까운 비디오점을 찾으세요."라고 읖조리는 성우 한상덕 씨의 목소리, 정말 죽이지 않나?]

<서편제>는 많이들 보셨겠고, 또 그건 외려 특수한 경우라고 본다. 적어도 이 글 쓰고 있는 사람은.
(어쨌거나, <서편제>는 예술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달인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아님... 그게 그건가?)
<쿵후선생> 함 보시라. 제목이 한국적 맥락에서 웃기게 들리지만, 오히려 이 쪽이 달인들의 삶의 전형을(대체로 범주(2) 자각 무명 달인에 가깝다.)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명성 찾는 분들 위해 덧붙이자면 이안 감독의 초기작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안이 자주 택하는 소재가 달인이다.
<음식남녀>, <추수(쿵후선생의 원제)>, <와호장룡>... (<헐크>, 는 사고 피해자이지 달인은 아니고...)

'달인으로 알려진 사람' 조심들 하시라.
알려진 사람일수록 달인이 아니......라고 하면 너무 비뚤어진 얘기로 들리겠지만, 그래도 그리 생각하면 차라리 안전할 수는 있다.
명성이 진짜를 보증하진 않는 거다.
와호장룡, 복호와룡... 진짜 달인(군더더기 표현이지만.)은 세상의 스포트라이트 옆, 그 그림자 속에서 오늘 이 순간에도 그저, 땀흘려 수련하고 있을 따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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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4.8.싸이홈피, 우리모두에 올렸던 글>

한때 꽤나 똑똑한, 정말 똑똑한 친구들과 1주일이 멀다 하고 만나던 때가 있었다.
아무리 낮취봐도, 정말이지 나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거형 표현은... 내 표현능력의 한계로 인한 것일 뿐이다. 지금도 그 중 일부와는 친교라고 부를 만한 것을 지속하고 있으며, 그들 혹은 그들 중 누군가와 제대로 사이가 틀어졌다든가 뭐 그런 종류의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무슨 행운이었는지 그들과 함께 얼마 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그 행운의 양이 다 된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으나 현재 시점에서, 스스로 돌아보기에는 그러하다.)

만나다 보니 나는 대단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사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단지 그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 역시 그들처럼 똑똑한 축에 든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그 점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아닌 척하고 다녔다면 벌받을 짓이고,
아마 당시에는 스스로도 그런 줄을, 적어도 의식으로는 몰랐던 모양이다.(이게 내가 당시의 나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변명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정도 되는 사람들과 제법 어울리고 있으니 나도 썩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은밀하면서도 강렬한 목소리에 취해 있었던 듯.

물론 우둔한 이가 똑똑한 이와 어울리지 말란 법도 없으며, 기타등등 내가 겉으로, 지금 이야기한 감정과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키거나 한 것도 아니다.(과연? ;;;;;;)
그냥 우둔한 사람답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깨닫는 바가 쌓여 왔고
물통에 찬 물이 넘치듯이(내 눈높이가 물통의 윗부분과 같은 높이 쯤에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쌓이다 못해 넘치기 시작한 깨달음을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좀 비관적일 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그 무리 속에 매끄럽게(좋은 의미에서) 합류했다기보다는...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받아들여 주었다는 점에선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심정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나를' 이어서가 아니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어떤 사연으로 서로를 알게 되었건 간에
나는 그들이 좋다. 가능한 한 오래 친교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이제까지처럼 썩 나쁘진 않았던 줄타기(전에는 줄타기한다는 의식이 없었다.)를 그럭저럭 계속해 나가는 것도 방법이겠고,
아니면 모자란 똑똑함을 공부로 메우(?)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 뭔 얘기들 하는지 정도는 알아들어야 할 거 아닌가.



이왕이면 공부하는 쪽으로 하자.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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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6 우리모두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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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 때 추리소설과 과학소설(SF)을 죽어라고...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 추리소설로 말할 것 같으면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 반 다인, 엘러리 퀸 등의 소위 본격 추리소설 류도 읽어 보았고 더 쉴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 등의 하드보일드 작품들도 약간씩 보았다.
중고생 이후로는 좀 뜸해진 편이지만 올해 들어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 장편 시리즈'가 완역되어 나온 것을 발견하고 한 권씩 읽어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미국 작가 폴 오스터나, 혹은 그 이전부터 붐(?)을 탄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사람들이 챈들러 작품들을 아주 좋아한다는데...
그 양반들이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몰랐어도 나 역시 중고생 때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을 읽고 그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 앞의 두 작가 양반이나 그외 챈들러 옹호자들, 내가 빌려온 챈들러 책들을 같이 본 누나가 하는 말 중에 공통된 것이 "이토록 문장이 멋질 수가!"이다. 뭐 챈들러의 미덕은 그것만이 아니긴 하지만(미국 사회의 부도덕한 단면을 문자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서술한다든가 하는 점 등등).

원체 추리든 과학소설이든 번역시장이 좁다 보니 번역되어 나오는 작품들 자체가 그 분야의 고전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그 고전의 출판이란 것이 한 작품을 여러 출판사에서 내 놓는, 어찌 보면 다양해서 좋고 달리 보면 다른 원작을 새롭게 번역하지 않아서 아쉬운 그런 상황을 동반하는 경우도 상당하지만...그리고 번역의 수준 갖고도 드물지 않게 말들이 있지만, 내가 번역 수준까지 따질 내공은 아닌지라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면서 읽곤 했다.

그런데 그 얼마 안 되는 고전이라고 해도 또 내가 그 모두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라, 특히 책을 살 작정을 한 상태에서는 으레 고민이 되기 마련이다. 서평이니 책 소개니 해도 어차피 미사여구가 흘러넘치는 것(심하게 말하면 평이라기보단 광고) 이상이 아닌지라
결국 반쯤은 도박을 하는 기분으로 일단 책을 고르게 되며, 그러고 나면 만족하는 경우도 있고 남들은 고전이라 해도 개인적으론 만족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런 내 복잡다단, 지리멸렬(?)한 추리소설 편력에서 아직까지는 실망을 느껴 본 적이 별로 없는 작가가 몇 있다. 앞서 말한 챈들러가 그러하고, 첩보소설 작가로 유명한 존 르 카레가 또 그러하다. 그런데 존 르 카레는... 아직 두 권밖에 읽지 않았다;;;

겨우 두 권 읽고서 실망하지 않았네 뭐네 말하긴 뭐 하지만 그 사람의 작품은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할 지, 싸아한 페이소스(?)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점이 매력이랄지... 하여튼 그런 점과 더불어
그 두 권 다 굉장히 망설이면서 책을 샀으며 동시에 읽고 나서 책을 고른 걸 후회하지 않았다는 점(오히려 반대로 읽기를, 사 보기를 잘 했다고 느꼈을 정도) 때문에 적은 권 수에도 불구하고, 존 르 카레는 내가 감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

내가 읽은 르 카레의 책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러시아 하우스]이다. 앞의 것은 모 출판사의 추리문고 시리즈로, 뒤의 것은 단행본으로 나와 있는 것을 사 보았다. 뒷 작품의 스토리를 매개로 오래 전에 쟁토방에 글을 올린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추억이 된, 몇 번의 송강옥 나들이 때 잡넘 님이 존 르 카레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잡넘 님 말로는 존 르 카레는 서구의 다른 첩보소설 작가들에 비해서도 한층 뛰어나다는 평인데, 일단 '오락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유명작가들의 유명작품을 단 몇 편이나마 본 나로서도 공감이 가는 평이었다.

그런데 잡넘 님이 원서로 보았다는(번역본이 없어 나는 못 본;;;), 그리고 최고로 치는 르 카레의 작품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팅커, 테일러, 솔저 & 스파이]이다. 내용소개는 생략하고... 잡넘 님의 그 말씀을 듣고 이러저리 알아보았는데 모 출판사의 추리문고 시리즈에서 '출간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한숨을 쉬면서 일단 관심을 접은 적이 있다.

그러던 오늘(2005년 7월 26일) 다른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근처에 있긴 한데 '동네 서점'이라기엔 꽤 큰 곳) 책을 산 후 나가려도 몸을 돌리던 중... 신간 코너에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만 것이다.
물론 잡넘 님이 첩보소설의 ㅊ자만 나와서 흥분하면 침 튀기던... 바로 그 책이다. 제목을 본 그 순간의 짜릿함이라니.('출간 예정'이라던 그 문고판으로 나온 건 아니었다;;;)

문제는 가벼울 대로 가벼워진 나의 지갑과... 사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선약'을 해 둔 다른 몇 권의 책들.
늘 그런 편이긴 하지만 이 여름은 굉장히 고픈 계절이 될 것이다.


스파이 스릴러 작가 존 르카레의 대표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상 열린책들)도 최근 정식 판권 계약을 거쳐 번역돼 나왔다. 열린책들은 르카레의 작품 19편을 모두 번역 출간할 계획이다. (2005년 7월 23일자, 한국일보 김범수 기자의 기사 중에서. 현재 일간지의 서평은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두 곳인 듯하다. 우드득.)



좀 다른 얘기.
첩보소설의 전성기라고 하면 아직까지는 누가 뭐래도 20세기 중후반기를 들 수 있다. 첩보소설이란 장르가 아무래도 냉전이라는 시대상황에 힘입어 관심을 끌었다고 봐야 할 테니까.
그렇다면 냉전이 극에 달한 지역에 속하는 이곳 우리나라에선?
나름대로 기억할 만한 작품들(이를테면, 영화 [흑수선]의 원작이 된 김성종의 [최후의 증인]이라든가)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내 견문이 좁아서인지, 첩보 장르가 활성화되었다는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다.(정말 나만 그런 거 아냐?;;;)

반드시 활성화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애초에 시대적인 문제에 대하여, 서구 각 국가에 비해 발언할 기회랄까 권리랄까 그런 것이 심하게 억압받아 온 우리네 경험이 약간은 현 상황을 이루는 한 원인인 것은 아닐런지...

그리고 또다른 얘기.
이런저런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지만, 어쨌건 서구, 특히 미국에서 하드보일드 장르는 '자본주의 미국'의 추악하다면 추악한 이면(자본주의의 '화려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을 파헤쳤다는 '사회적 공헌'을 한 바 있다.
적합한 예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더 쉴 해미트 같은 사람은 정치색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매카시즘 시절 그의 작품이 공공 도서관에서 '퇴출'되기도 했고, 매카시 위원회에 소환당하여 매카시에게 심문을 받기도 했다. (나름대로 유쾌한 에피소드 하나, 매카시 왈 "이런 작품(해미트 본인의 작품)을 도서관에 두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해미트 답하기를 "나같으면 도서관이란 걸 인정하지 않겠소.")

하여간에, 미국에서 하드보일드 장르는 대략 30년대, 자본주의가 극에 이른 후 대공황이라는 이름의 파산을 겪었던 시절을 전후하여 활짝 꽃을 피웠다고 한다. 하드보일드 장르가 주목을 받은 후에,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후엔 첩보소설이 주목을 받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제 한국은, 피폐했던 식민지 시대와, 열전(한국전쟁)-냉전의 시기를 거쳐서, 그야말로 자본주의가 활짝 꽃을 피우는 시대가 되었다. 이상호 기자가 우리시대 자신의 책무(다시 말해 기자의 책무)를 "자본의 심장에 도덕성의 창을 꽂는"(이런 살떨리는 표현까지 써 가면서) 일로 규정한 것은 괜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이전에는 권위적이고 부패했던 권력이 정직한 기자(어디 기자 뿐이겠는가)의 눈을 가장 우선 두어야 할 곳이었다면, 이제는 그 눈 둘 곳이 자본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추리소설 내부 장르 간의 주목도에 있어서 그 추이는, 한국에서는 미국의 경우완 달리, 첩보소설에서 하드보일드 소설로 옮겨가지는 않을까 하는 객쩍은 예상을 해 본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의 추리 장르가 대중의 주목을 받는 동시에 장르 문학에 도전하고자 하는 재능 있고 야심찬 작가들이 등장해야 가능한 일이겠고, 아직 채 정리되지 못한 지난 시절을 냉철하게 반영한 대작 첩보소설 몇 편쯤은 이제라도 나왔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기대이긴 하지만 말이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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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1 우리모두 먹방 / 진보누리 누리까페



대구광역시 서구청 맞은편에는 신평리 아파트로 들어가는, 남쪽으로 뻗은 길이 있다.
 서구청 쪽에서 볼 때를 기준으로 그 길 왼쪽에는 또 하나의, 신평리 아파트 들어가는 길과 평행하게 난 길이 있다.
이 길의 대부분은 신평리시장이다.
신평리 아파트는 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져 동들이 늘어서 있고,
그 중 한쪽(서구청 기준으로 왼쪽) 동들에 시장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국민학교 시절을 잠깐을 제외하고 신평리 아파트에서 살았고, 신평리시장은 어머니를 따라 장보러 가는 시장이었다. 가끔 '마음먹고' 대구백화점이나 동아백화점, 동아쇼핑에 쇼핑하러 가는 날은 제외하고 말이다.
길게 뻗은 그 길 중간 즈음에 아파트 쪽으로 난 문이 있다. 다른 샛길도 있지만 대개는 이 문을 지나 시장에 들어섰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아다니면서 어머니와 함께 장본 것들을들고 다녔다.
길 양쪽에 가게며 좌판이 즐비했고, 웬지 바닥은... 늘 축축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축축해서 기분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축축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곳곳에 어머니가 가는 단골 가게들이 있었다. 그리고 활기찬 이미지 - 시끄럽다는 생각은, 이상할 정도로 지금에 와서도 들지 않는다. 활기찬 곳. 상인들이(아저씨 아줌마들이) 웃으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좁은 길을 리어카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옆으로 비켜서서 가게나 좌판에 쫙 달라붙어야 하는 곳. 참 다들 신기하게도 잘도 비켜서던 기억.


당연히 시장이니까, 먹을 것이 많았다. 주로 사는 것도 음식들이었고.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왼쪽으로(즉 서구청 쪽으로) 돌아서면 핫도그 집이 있다.
왼쪽으로는 가게며 좌판이 많지 않았다. 태반은 문에서 오른쪽 그러니까 남쪽에 가게며 좌판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장도 주로는 그쪽에서 보곤 했다.

핫도그 집
집이라기보단 가게다. - 리어카에 튀김기름이 펄펄 끓고 있고 거기서 갓 나온 핫도그에다 설탕과 케첩을 뿌려 먹는 것이다. 시장 가면 어머니께 제일 자주 사 달라며 달라붙었던 군것질거리이다. 지금은 길다란 핫도그가 더 많지만 당시 그곳 핫도그는 동그란 쪽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쑥떡
문 오른쪽의 어딘가에 좌판이 있었다. 양푼에 쑥떡이 콩고물 묻혀 가득 담겨 있었다.
아주머니가 쑥떡을 썰어 비닐에 담아 넘겨 주면, 무게가 가벼운 탓에 대개는 내가 들곤 했다. 얼른 집에 가서 쑥떡을 먹어야지...... 가끔은 설탕을 묻혀 먹기도 했다.
신평리사장의 추억 때문인지 지금도 떡 중에선 쑥떡에 가장 눈길이 가고 맛도 좋다고 느낀다.

칼국수
검고 주름진 얼굴의, 여위고 몸집이 작고 키도 작은 아주머니가 밀가루를 반죽하고 방망이 굴려 반죽을 납작하게 만들고 그 담엔 기계가 무색한 정확도로 썰어서 납작하고 폭이 약간 있는 국수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집에 오면, 멸치 국물을 끓이고 간장에 파 썰어 넣은 양념을 준비하는 등 어머니의 수고를 더해 일품 칼국수가 되는 것이다. 아......!
그런데, 돌이켜보면 늘 나는 그분이 피곤에 절어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왜일까.

빵집
다른 빵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내가 가는 빵집은 늘 한 군데였다.
어두운 점포 안에 빵이 언제나 한가득. 나는 신기하게 둘러보곤 했다.
옥수수 식빵을 많이 먹었다. 건포도가 박힌 옥수수 식빵은 '굿'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고로케다. 지금도 '크로켓'이란 말이 입에 잘 안 붙는다. 고로케다.
이 빵집에서 파는 고로케는 속도 알차고 맛이 무척이나 좋았다. 핫도그보다 고로케가 더 좋아졌다. 정말 '열심히' 먹었다고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고로케보다는 덜 자주 먹은 냉동고로케도 있었다! 쇼핑가서 사와서는,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구워서(튀겨서?) 먹었다.
지금 서울에서 살면서 도무지 맘에 안 드는 것이 이 고로케다. 여러 빵집서 먹어 봤는데, 맛은 둘째치고 기름기가 너무 많다. 내 혀가 잘못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단코, 그 빵집의 고로케는 요즘 먹는 것들처럼 기름기가 많지 않았다. 어쩌면 빵집 주인 아줌마는 제빵업계의 숨은 실력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인은 자신을 숨긴다'더니.
아, 냉동고로케도 어릴 때 먹은 그놈이 정말 맛있었다. 완두콩 같은 것이 큼직하게 들어 있는 두꺼운 놈이다. 그놈과 비교하면 요즘의 냉동고로케라는 '얍실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꿩대신 닭이라고 그거라도 먹고는 있지만 매번 먹을 때마다 슬퍼질 정도로 옛날 그놈이 생각난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슬퍼진다.
(회사가 도투락인가 그랬을 것이다. 어느 날 망했고, 더이상 그 걸작 냉동고로케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근조.)
할란 엘리슨이라는 좋은 SF작가가 쓴 <다섯 살바기 제프티>
(정말이지 슬픔이 돋아나는, 기억에 남는 단편이다. 한국에는 고려원 <세계 SF 걸작선>에 수록되어 있다.)
에도 지나갓 옛것이 더 좋았다는 얘기를 주인공이 하고 있다.
 냉동고로케에 관한 한, <다섯 살바기 제프티>에서 읽은 그 얘기는 정확하다.

참기름집
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진행방향 왼쪽(즉 동쪽)으로 시장을 지나 다른 동네로 이어지는 길이 두어 개 있다. 큰 길 옆에 어두컴컴한 작은 길이 있다. 그 작은 길가엔 자주 가는 가게 둘이 있다. 참기름집과 분식집이다.
참기름집엘 가면, 방아인지 아님 뭐라고 불러야 될 지 모를 기계가 웅웅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누런 불빛이 비치는 그 어두운 곳에선 늘 고소한 냄새가 나고 있다. 갓 만든, 어쩔 수 없이 냄새가 솔솔 새어 나오는 참기름을 모양으로 봐선 - 짐작이 맞다면 상표를 깨끗이 뗀 - 소주병 모양의 옅은 푸른 빛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주는 것이다. 그 거무스름한 참기름의 색조를 보면 침을 꿀꺽 삼키곤 했다. 이 참기름은 이를테면 칼국수 간장 양념 같은 것들에 들어갔겠지.

지금은 이름이 기억 안 나는 분식집
참기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식집이 있었다. 만두며 우동 같은 것을 만들어 파는 점포였다.
근데 이 집을 기억하는 건 그 음식들보단 돈까스 때문이다.
처음부터는 아니었고 내가 그 집을 알게 되고 짧지 않은(그렇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 돈까스를 메뉴에 추가시키 것이다.
아마 그 돈까스가 내가 처음 먹은 돈까스였을 것이다. 분식점 수준의 간단한 경양식을 처음 접했다고나 할까.
아마 우리 가족 네 사람이 모두 우루루 몰려가서는 처음으로 돈까스라는 것을 먹었던 듯하다.
신기했다. 칼을 들고 포크에다......정녕 신기했다.
창칼로 식사를 하는 야만스런 양놈들...이라는 어머니의 우스갯소리는 거진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박혀 있다. 하하하.


아가씨
어머니는 실제 나이보다 젊어/어려 보이셨다. 날씬하기도 하셨고.
간혹 시장에서 어머니 등뒤로 리어카를 몰고 오는 아저씨들이 "아가씨, 좀 비켜 주세요."라며 어머니에게 길 양보를 청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와 나는 낄낄대며 기뻐하고, 우스워하곤 했던 것이다.



신평리 시장은 내 어린 시절 먹거리의 대부분을 사다 먹은 곳이며, 내가 참으로 자주(국민학교 저학년 땐 거의 매일) 가서 어머니의 장보기를 도운 곳이었다.
오후 - 돌아가면 가족들이 모이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기에 딱 맞는 타이밍(당연한 얘기겠지만 어머니의 타이밍은 '신기'였다.)에 언제나 어머니를 따라 갔던 그곳.

신평리시장에서 경험한, 그리고 그 경험을 가지고 상상할 수 있는 먹거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먹거리는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은 심리적으로 낯설다 - 맛이 있고 없고와는 별개로 말이다.
좋든 나쁘든(그러고 보니 나빴던 게 별로 없다.)
먹는 것에 대한 내 대부분의 기억들의 '원형질'은 그곳, 신평리시장에서 만들어졌고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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