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11 우리모두 등에 올림.
지금(2011.12.31)와서 다시 읽어보니 수필이라기도 그렇고... 내 기대를 현실인 듯 적어놓은 부분들이 있다..>


평범과 비범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평범과 비범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 차이는, 그 시작에서는 미미하나 그 끝에서는 광대하다.(참고로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이 비범으로 입문하여 일정한 성취를 이룬 자들이 달인達人The Master이다. 무협지 버전으로는 고수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기 분야에서 내공수위 높은 작자들이다.
우리 객잔 주인 양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저 평교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교육계의 달인이라든가, 격투기의 달인일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본인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아닐 리가 없는 것이다.)
어두운 골목에서 불량청소년(?)을 두들겨 패 징계하는 교육적 격투가라는 달인의 면모... 상상되지 아니한가.

40방 프란 님(불안이라는 명호라도 붙여 드릴까?)의 글과 작품 사진을 보자.
달인의 면모가... 팍팍 풍기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본인은 부정하실 것이다. 아무렴...
근데 그것은 기준의 차이 때문이다. 입문하지 아니한 자(문외한)의 기준은 땅인데 입문한 자의 기준은 비범 다시 말해 하늘天인 탓이다.
문외한은 감탄한다.
달인은 부정한다.
겸손한 것도 아니요, 겸손이 지나쳐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기준이 다른 거다. 어쩔 수가 없다.

뿐인가?
주와 식(주의 : 색 아님)의 달인 좌호법이 있다.
어용의 달인 구라장풍이 있다.
기타등등...

이 달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러 범주가 있을 수 있다. 대충 범주별로 이름붙여 보자.
(1) 자각 명성 달인 - 자기가 달인임을 의식하고 아울러 세상이 인정해 주는 달인. (명배우로 인정받는 경우라든가.)
(2) 자각 무명 달인 - 세상이 모르고, 아는 사람만 아는 달인. (영화 <아라한장풍대작전>의 등장인물들 같은.)
(3) 비밀 달인(혹은 크렘린 달인) - 친구도 배우자도 모르게 정진하는 크렘린스러운 달인.
(4) 미자각 달인 - 자기가 달인인 줄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도 대개는 몰라주는 달인. (전업주부 어머니들의 칼질, 바느질을 상상해 보라.)

첫번째 범주보다는 두세네번째 달인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이 달인이라는 인간존재들은 무엇을 하는가?
달인으로서 그들이 하는 일은 저마다의 타고난 자질......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이런저런 인연 닿아 기예(대개는 전승되어 온.)를 수련하는 것이다. 물론 자질 있으면 더 좋겠고.

목적이 뭐냐고?
전승되어 온 기예를 마르고 닳도록 익혀서 또 때로는 제자 만나 전해주는 그 목적이 뭐냐고?

목적 없~~~다.
목적이 있으면 이미 그 기예 자체를 수단시한다는 얘기다.
전승에 입문하여 기예를 마르고 닳도록 갈고 닦는 데 목적은 없다. 돈? 권력? 유혹할 수 있는 매력?
그런 걸 얻을 수 있을 줄로 잘못 알고 시작하는 게 계기는 될 수 있겠지.
그러나 실은
돈, 권력, 매력 그런 거 얻는 데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은 차마 안 되는 것이 이 달인의 길이다.
그러니 하다가도 하나 둘 관두거나(대개는 100중 99가 그렇게들 관두게 되는 것이다.) 아님 처음의 자기 목적은 잊어버리고 "재미있어... 재미있어. 어쩌면 좋아!!!"하면서 계속 추구하게 되는 거다.

참고로 우리 무협지의 폐해 중 하나가 그거다.
달인 되면 세상의 행복이 제 발로 걸어, 아니 뛰어들어 오는 듯이 얘기하는 스또리들......
무협지 좋아는 하는데 제발 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쓰는 것 좀 그만 해 줘......

영화 <서편제>의 경우처럼 기예가 어찌어찌 호구지책으로 직결되는 수도 있기는 있다. 명배우의 연기처럼 명성을,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게 되는 일도 어쩌다가는 있다.
그러나 그걸 유일한 경운 줄 알면 안 된다.
전에 무시무시(?)한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중국권법 한 종류를 평생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직업이 교수란다. 근데 이 사람은 교수직을 철저하게 호구지책으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신의 가호 있으라...
뿐인가...
평생 초라할 데로 초라하게 살면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을 권법수련에 썼다는 어느 권법가의 인생 얘기도 들어본 바 있다.

그쯤 되면 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예를 추구한다는 게, 입문하여 달인의 길에 들어선다는 게 그런 마력이 있는 것이란 증거도 되겠다.

좀 따로 얘기하자면 기예 자체가 가진 세상에서의 유용함이 큰 경우는 있다.
무술이 그렇고 마술이 그렇고 뭐 기타등등......
엉뚱한 마음 먹고 배우면 대형 사고 터지고 피해자 속출한다.
비인부전이니 하는 얘기가 그러고 보면 말이 되는 부분이 있군, 하고 느끼게 된다.

...각설하고, 굳이 목적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면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다음 번에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해 낸 것보다 더 잘 기예를 펼쳐 내는 것이 기예를 수련하는 목적이다. 즉 목적은, 기예 자체의 추구에 있다.
뭐 하나 더 덧붙이자면 후세에 전해 주는 것 정도?
그런데 전해 주는 것은 모든 달인들이 늘 하는 일은 아니다. 한 생명 다할 때까지 혼자 추구하다 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한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는 이 달인들도 남들 사는 듯이 산다. 남들 사는 듯이 사는 것처럼 보인다.(때로 필요에 따라선 남들 사는 듯이 사는 척 한다.)
생활인으로서, 직업인으로서 돈 벌고 배우자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 낳고 살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 반드시 돈 벌고 결혼한 다음이어야 한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 만나는 것이다. 전승에. 기예에. 그리고 빠져들고 몰두한다.(영화 <섈 위 땐스>에서 야쿠쇼 코지가 분한 주인공 남자의 경우를 보라.)
세상에서 흔히 쓰는 말로는 취미라고 한다. 스스로도 그냥 취미인 줄로만 아는 경우도 있다. "글쎄 고스톱 치면 왜 그런지 열에 일곱은 따더라고 허허."

제대로 작심한(그러니까 달인 소릴 들을 정도로 대성하는 거지.) 달인들의 경우에 세상 남들 사는 것처럼 사는 게 기예를 수련하는 데 방해가 된다 싶으면 그런 삶 따위 바로 걷어차 버리는 경우도 있다.
<서편제>를 보라.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꼴인가?

근데 그 '사람 사는 꼴'이란 건 세상의 행복이다. 서편제 여주인공과, 여주인공 아버지가 바라보는 것은 세상 너머, 저 멀리 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소리를 몸과 마음에서 뽑아내는 것! 달리 그 동네 용어로는 득음! 그 자체!
바라보는 것은 하늘天이다. 머리 위에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고개 90도 뒤로 꺾으면 보이는 그 퍼어런(밤에는 시꺼먼) 것만 하늘이 아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오히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니 뭐니, 주희가 성리학 체계 세우면서 천天-성性-도道-교敎니 뭐니 할 때 쓴 개념, 이데아나 천에 가깝다.
혹은 하늘이 내린 재능 줄여서 천재天才Genius/The talented라고 할 때 그 하늘이다.

기예 자체의 절대적 경지! 이 글 쓰고 있는 인간도 차마 짐작이 안 되는 그 경지! 그게 하늘天일 거다.

목적이 없으면 그럼 하는(한다기보다는 차라리, 빠져드는) 이유는? 재미다.
달리 뭐가 있겠는가? 재미있어서, 다.

혹 달인을 보고 싶으신가?
독심술 관심법 통달하면(그러고 보니 것두 기예에 속할 거 같네.) 널린 게 달인이겠지만, 일단 안 보이니.
달인을 쉽게 보고 싶으시면 가까운 비디오대여점을 찾으세요. (아님 비디오방)

[이건 딴 얘긴데, "가까운 비디오점을 찾으세요."라고 읖조리는 성우 한상덕 씨의 목소리, 정말 죽이지 않나?]

<서편제>는 많이들 보셨겠고, 또 그건 외려 특수한 경우라고 본다. 적어도 이 글 쓰고 있는 사람은.
(어쨌거나, <서편제>는 예술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달인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아님... 그게 그건가?)
<쿵후선생> 함 보시라. 제목이 한국적 맥락에서 웃기게 들리지만, 오히려 이 쪽이 달인들의 삶의 전형을(대체로 범주(2) 자각 무명 달인에 가깝다.)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명성 찾는 분들 위해 덧붙이자면 이안 감독의 초기작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안이 자주 택하는 소재가 달인이다.
<음식남녀>, <추수(쿵후선생의 원제)>, <와호장룡>... (<헐크>, 는 사고 피해자이지 달인은 아니고...)

'달인으로 알려진 사람' 조심들 하시라.
알려진 사람일수록 달인이 아니......라고 하면 너무 비뚤어진 얘기로 들리겠지만, 그래도 그리 생각하면 차라리 안전할 수는 있다.
명성이 진짜를 보증하진 않는 거다.
와호장룡, 복호와룡... 진짜 달인(군더더기 표현이지만.)은 세상의 스포트라이트 옆, 그 그림자 속에서 오늘 이 순간에도 그저, 땀흘려 수련하고 있을 따름이니.

Posted by taichir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