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816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서양의 민족국가는 주로 근대의 산물이며, 국가의 이념은 근대적 갈등의 산물인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였다. 흔히 말하는 [좌우의 이념갈등]이란 과도하게 단순화된 표현이며,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정치적 민주화와 전체화, 자본의 사유화와 사회화 사이의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의 합리적 조절과 교정 과정이다. 그래서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균형과 절충은 각기 그 역사적 궤적이 다르다.

좌우의 이념갈등, 혹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 등의 도식적인 선전문은 일종의 전략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단순화되고 극단화된 모형은 선명한 메시지를 통해 대중동원이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빛의 천사들과 악룡들은 아마겟돈의 전투를 벌인다. 권력투쟁은 현대세계에서도 종말론적 신화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집단자살교도의 광신적 종교가 아닌 한, 권력을 잡은 뒤에 집권층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하며, 사회적 피해와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필수적인 전진을 하기 위해 택해야할 합리적인 방안들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그 한 두 개의 대안을 놓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 소위 정쟁이다. 대개는 조금 빨리, 혹은 조금 늦게 [2% 더와 덜]을 놓고 최후의 결사항전을 하는 준비하는 비장한 드라마가 모든시대 모든 나라의 정치현상이다.

선거철마다 제의적으로 순환되는 종말론적 투쟁은 전통적 신앙이 붕괴된 근대 무신론 사회의 집단 정신병이 영웅정치의 신화로 투사된 모습이다. 따라서 근대 언론의 권력비판은 신화적 대중동원에 대한 탈신화론적 감시와 비판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영웅신화적 최면과 세뇌에 의한 대중동원은 필연적으로 극우와 극좌의 전체주의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영웅의 신화를 현실화하려 하며, 영웅의 혈로에서 대중은 짓밟히는 개미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권력의 신화를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웅 신화를 창출하고 보급한다. 이들은 예언자 전승이 아니라 왕정신학자의 전승을 물려받았다. 이들은 권력을 감시하고 민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창출하고 민중을 동원하는 기능을 본업으로 한다. 사회가 민주화, 자치화되어 가는 전환기에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언론이 새로운 권력창출의 거점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언론의 제자리찾기]를 촉구하는 시민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언론을 비판/감시하는 시민운동조차도 권력창출의 새로운 거점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새로운 비판운동이 등장할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러한 갈등의 핵분열은 악순환이며, 아래로부터 통합되는 민주화가 아니라 오히려 분열되고 절단된 전체주의의 다양화다. 통합되지 않는 전체주의적 분파들은 사회를 해체시킨다. 가정에서 가족관계가 분열되고 절단되면 가정이 해체되는 것과 같다. 지성과 양심에 근거한 최소의 필수적인 공감대는 사회적으로 보존되고 건전하게 육성되어야 한다. 사회윤리란 기본적으로 각자의 인간미의 문제이다.

그러나 악순환에 대한 해법은 오히려 단순하다. 정치권의 권력투쟁에서 종말론적 선악투쟁의 신화를 벗기면 된다. 언론이 탈신화론적인 권력감시와 권력비판을 하면 된다. 언론을 비판하는 시민운동이 불필요하게 되면 된다. 민주주의 헌법정신에 따라 정치권은 사회적 갈등을 민주적으로 통합하면 되고, 언론은 권력의 오남용을 감시하고 탈신화화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서 정치와 언론이 각기 제자리를 찾으면 된다. 그렇게 되면 시민들은 제각기 관심과 흥미의 공동체에서 사회를 위한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민주주의 대중문화운동이다.

빛의 천사와 악마의 자식들이 대단원의 격전을 벌이는 아마겟돈의 전투는 신화에 불과하다. 신화가 민중의 열정을 동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의식적 열망에 대해 원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점괘와 같은 것이다. 한편 정책결정은 전혀 다른 수준의 것이다. [조금 빨리, 혹은 조금 늦게, 2% 더 혹은 2% 덜]을 놓고 정책토론할 때 분개심과 적대감을 동원해서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비정상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초연해야 한다. 언론비판운동에서 필요한 것은 영웅신화의 집단적 열기로부터 면역된 초연한 평정심이다. 민주주의 대중문화를 창출하는 시민운동의 첫단추는 전염성 영웅신화로부터 초탈한 평정한 마음들의 연대다.

초연한 태도는 오히려 보편적인 인간미를 배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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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7 우리모두

지난 4년간 국민적 수준에서 인터넷 토론이 활성화되었다. 민주화의 오랜 염원이었던 '의사표현의 자유'가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한 사회쟁점의 다각적 접근에도 발전이 있었다. 민주적인 대화토론의 바람직한 수준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대다수가 언론을 교시적으로 수용하던 때를 돌이켜보면 실로 주체적인 사고와 표현의 환골탈태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도가 한 척 자라나면 마는 삼 장이 늘어난다는 말이 있다.

공동체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는 국민통합의 문제는 1)공동의 체험을 지향하는 체험의 민감성, 즉 약자에 대한 역지사지의 공감대와 문제해결의 현장에서 당면하는 난관들에 대한 공동의 민감성을 전제하며, 2)복잡한 사태의 요소들을 질서있게 파악하는 지성적 통찰과 신선한 문제해결방식을 조망하는 지성적 창의력, 3)이용가능한 자원과 기술의 한계 안에서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를 우선시하여 문제해결의 가닥을 잡는 판단의 균형감각과 차분한 인내심, 4)민주적인 설득과 결정을 통해 공동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행동력을 전제한다.

공감대와 민감성, 통찰력과 창의성, 판단력과 가치순위, 설득력과 행동력이 두루 원만한 균형을 이루어야만 최선의 사회적 통합이 달성된다는 원리는 그 어느 공동체에도 예외가 없다. 더구나 민주사회는 이러한 인간적 능력들이 어느 한 영웅적 지도자에게만 은총(카리스마)적으로 구비되어 있어서, 그 지도자의 결정을 자동적으로 추종하는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사회적 통합과정 안에 자기의 공감대와 민감성, 자기의 통찰력과 창의성, 자기의 판단력과 가치관, 자기의 설득력과 행동력을 투입해야만 한다는 점에 있어 고도의 인내심과 관용력, 열린 마음과 선의를 요청한다.

간단히 말해서, 민주사회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선의의 경쟁의 문제이다. 이제 경쟁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현상에는 두 가지 매우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 이른바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승리주의'와 승자는 없이 공익이 승리하는 '사안별 경쟁'이다.

승리주의는 처음부터 자기편의 승리를 지향하며 이용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승리주의에서 최선의 귀결은 경제적으로 '독점'이라고 부르고 정치적으로 '독재'라고 부르는 권력독점 현실의 창출이다. 승리주의의 추진자들은 영웅적 독재자, 이데올로기, 탈법적 기득권, 교조적 계급투쟁, 자동적 지역감정, 집단적 이기주의 등 모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집단이다. 이들은 사회적인 수준에서 종교적 선민의식을 천명하며 그러한 선험적 귀족주의에 합당한 물리적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 세습하려고 노력한다. 승리주의의 분파들이 충돌할 때 세력경쟁이 발생하고, 세력은 세력을 압도하여 탄압한다.

한편 사안별 경쟁은 자기편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구체적인 때와 장소에 따라 사안별로 발생하며, 문제와 연관된 거시구조는 역사의 고유한 문맥 안에서 이제는 공익적 기능을 상실한 구태의연한 제도들에 국한된다. 따라서 사회개혁에도 사안별로 큰 수술이 있고 작은 수술이 있다. 세계체제가 문제라면, 세계체제의 변혁은 내부적으로 민주화된 각 국가들이 자국이기주의를 벗어나 국제적 세력균형의 틀을 깨고 민주적인 자기교정력을 세계적인 수준에서 획득할 때에야 달성된다. 그 중간과정은 유럽/동아시아/중앙아시아/미대륙 수준의 거대 지역단위 민주적인 결합이며, 이러한 지역공동체의 결합은 아직도 모색단계에 있다.

사안별 경쟁은 수시로 가치에 따라 헤쳐 모이는 가치공동체들의 경쟁이다. 19세기 이념정당이란 식민지 제국주의 수준에서 국내통합을 위해 조성된 과점적인 민주화의 소산이다. 이념이란 19세기의 사회수준에서 자유, 평등, 이익 등에서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하여 그 단일 가치를 최상위에 놓고 그에 따라 연역된 한 꾸러미의 정책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그것은 19세기 논리주의의 결실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극우민족주의 등은 밀의 논리학과 헤겔의 논리학을 당시의 사회에 적용한 변증적 연역의 결실이다.

19세기 서구사회에서 왕정독재와 귀족독재를 겨냥한 과점적 민주화는 진보였지만, 오늘날 과점적 세력균형은 민주적인 사안별 경쟁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왕정독재는 귀족과점의 도전을 받았고, 귀족과점은 유산층 신흥자본가의 도전을 받았고, 유산층 신흥자본가의 과점은 무산노동자층의 도전을 받았다. 20세기 내내 이러한 이념정당의 양당제적 과점의 틀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념정당은 이미 구태의연한 제도일 뿐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이념 꾸러미만을 선택해야만 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사안별로 그때마다 독자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중층적인 지역감정의 과점정당이다. 한국의 양당이 중층적인 이유는 지역감정이라는 자동성의 큰 틀 안에 나름대로 이념지향성, 정책지향성, 사안별로 개혁적인 판단들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이념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지역감정을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한다. 우리시대의 지역감정은 지역의 이익이나 지역의 고유문화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구획한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서구이념을 대체하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전통적인 역사관이다.

중국의 존왕양이 중화사상이 존재한다. 일본의 천황중심 신국사상이 존재한다. 한국의 신라중심 사대주의가 존재한다. 서구의 민족은 근대 200년의 산물이지만, 동아시아의 민족은 3000년 이상의 갈등의 산물이다. 그것은 근대적 개념의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 혈통과 문화에 기반한 1300년 이상의 실체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에서 근대 자본주의는 100년 미만의 역사를 지닐 뿐이다.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쥐잡는 고양이에 불과하다. 서구이념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패권주의, 전체주의의 근대적 도구에 불과하다.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주변국을 한족 내의 소수민족으로 보는 중국의 중화패권주의, 국민을 신민으로 보는 일본의 천황제 자본주의, 그리고 한국에 고유한 무속적 연대성에 기반한 지방자치 민주주의 모델들이 등장하고 있다. 각 모델들은 현재 국내적으로는 각자의 전통적인 역사관과 충돌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는 그 일반성과 통합성에 있어 경쟁하고 있다. 이 중에서 아직은 태동단계에 있는 한국의 민주적 모델이 동아시아의 공익을 위한 보편적 모델로서의 잠재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세력과 흡수력으로 따지면 고구려를 지방정권으로 흡수하는 중화패권주의를 감당할 수는 없다. 따라서 차후의 전개상은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민주주의의 사안별 경쟁이란 정당도 없고, 정파도 없다. 광신도도 없고 ~빠도 없다. 국회의원들은 정책 사안별로 지성과 양식에 따라 판단하고 정책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현대의 정치개혁이다. 국회의 다수당을 따지는 사고방식은 의원들이 거수기 투표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의원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신념에 따라 결정한다면 다수당과 소수당의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정당의 지역성 구별도 무의미해진다. 국민의 공익을 위한 헌법기관으로서 국회의원 개개인이 국민 앞에 책임지는 것이 옳다.

사안별 경쟁이란 시민들이 사안별로 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들이 이념에 묶여있을 이유가 없다. 그때마다 공익이 발생하게 하는 것이 시민들의 의무이며 공익의 발생은 사안별 개혁과 그때마다의 독창적인 창의성에 달려있다. 시민들이 이념으로 서로 갈려 욕하고 싸울 이유가 없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담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연역적인 정책 꾸러미로 싸우지 않는다. 언제나 그때마다 제한된 공적자원 안에서 사안별로 2%와 4% 사이의 배분을 놓고 판단력과 설득력을 경쟁할 뿐이다. 서로 감정 상할 이유가 없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의원들은 대부분 지역으로 갈려져 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갈려져 있지 않고, 유사한 이념을 추구하면서도 소속이 다른 의원들도 많다. 이들은 어떤 경로를 밟아갔는가? 서로 싸우고 개인적으로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을 뿐이다. 서로 이념을 내세우지만, 원인은 이념이 아니라 감정싸움이다. 감정에 따라 패가 갈렸을 뿐, 사안별 판단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감정으로 패가 갈리고 세력경쟁을 위해 거수기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국정치는 공전한 지 이미 수십 년이 된다. 그 분열의 단초는 자존심 대결이었다.

시민들은 공익을 위한 사안별 경쟁을 하도록 정치권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 어느 한 패거리를 지지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다. 정당 안에도 사안별 경쟁을 하는 정치인이 있고, 거수기 노릇을 하는 정치인이 있다. 거수기 의원들은 지도자의 하수인이다. 지도자에게 무게가 쏠리면 그는 독재적 성향을 갖게 된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헌법기관은 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하도록 국민적 압력을 넣어야 한다. 노동정당이 집권한다 해도 매사에 재벌노조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사안별로 판단하게 되면 문제해결의 객관적 한계가 강요하는 타협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개혁은 기존틀의 변혁이며 그 결과 희생과 불평이 따라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정책과 제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개인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시되는 사회현상의 통계적 추세를 개선하는 것에 불과하다. 복지제도에서 재정과 제도에 대한 지나친 과신은 금물이다. 복지제도의 관료화는 인간소외의 또다른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필요한 것은 현장에서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봉사요원들이다. 현장에서의 인간적 봉사와 제도적 해결방법은 차원이 다르다.

시민들이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우리 사회 단계에서는 국내적으로 어느 정당이 집권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국제적으로 제국주의가 횡횡할 때는 안보와 외교면에서 여전히 대권이 중요하기는 하다.) 국내문제에서 정치권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된 재정을 놓고 우선순위에 따라 분배하는 문제이다. 장기적으로 이들은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당이든간에 연역적인 정책꾸러미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정치인들이 사안에 따라 양심적으로 투표하고 공익을 위해 노력한 뒤에 자기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국민 앞에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논리주의, 연역주의, 변증법과 같은 사회이론들은 현안해결에 있어 정치인들의 지적 태만의 원인이 된다. 문제마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접근하도록 압박하라.

정치인들이든, 시민들이든 간에, 사안별로 경험적 자료를 수집하고 기능적인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질서와 무질서의 요인을 통찰하고 문제해결의 창의성을 발휘하고 창의적 해결방식을 사회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날카롭게 논적을 찌르는 비판들은 아무 경쟁력이 없다. 현실적으로 경쟁하는 것은 대안들이다. 대안 없는 비판은 하소연에 불과하다. 그것은 민감성과 공감대의 대상이다. 그러나 문제해결은 대안들의 설득력의 문제이다. 대안이 없는 비판자들은 경험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고, 기능적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질서와 무질서의 요인들을 통찰하고, 문제해결의 창의성을 발휘할만큼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상대를 단순히 조소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고도로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사회이다. 시민들은 모든 사안에 대해 즉시 판단할 수 없다. 정보들을 수집하고 그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고 갈등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우 힘든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자기 힘으로 자료들을 수집해야 한다. 그것이 힘들면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태의 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료수집능력, 분석능력, 판단력과 결단력 등 인격적 잠재성의 총체가 사회적으로 투입될 때에만 민감하고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통합이 가능하다.

민주화의 단계에 있어 우리는 지금 희망을 갖고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잠재성에 있어 우리는 서구의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피해나가면서도 민주적인 사회통합을 달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화적 자원들을 갖고 있다. 현대의 시민정치는 정치권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의 심화확대에 달려있다. 아래로부터 자기표현의 구조망을 건설하는 것이 민주사회다. 우리 시대는 민주적인 대중문화를 건설하는 시대다.

다양한 관심과 필요에 따라 동호회 등의 기초공동체를 구축하고 전문적으로 재미있게 활동하는 것이 민주적 대중문화 건설의 요건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적절한 방향으로 진행중인 것으로 보인다. 당파적인 정치논객들보다는 재미로 참여하는 동호회원들이 시민정치의 성숙에 있어 훨씬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 정치개혁의 관점에서 초점을 바꾸어보라. 우리 사회에는 대중문화의 건설에 참여하는 많은 작은 꽃들이 도처에서 움트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사회에 대한 희망을 갖고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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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09우리모두에 올리신 글>

정보가 통제되던 시절에 사람들은 신문기사 안에 숨겨진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 고도의 독심술을 발전시켜야만 했었다. 억압된 정치열기가 기형적으로 분출된 결과 정치담론이 심각하게 왜곡된 경우다. 이렇게 왜곡된 정치독심술에 입각해서 언론은 '3김'이라는 왜곡된 정치상징을 개발해냈다. 이것은 잘못된 기초 위에 환상의 궁전을 지은 퇴행적 업그레이드다. 현실인물과 무관한 상징 조작이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이러한 정치상징을 단순한 흥미위주의 언론상품으로 애용했지만 또다른 일부 언론은 이를 권력투쟁의 게임소프트로 발전시켜서 유권자를 온라인게임의 참여자로 전락시켰다. 정치9단, 정치10단 승단식을 개최하고 음모론 감상법을 제시하며 미래를 맘대로 예측할 뿐 아니라 미래의 향방을 멋대로 좌우하는 언론권력을 획득해냈다.

상징게임이 현실을 지배하는 정치상황에서 한국에 고유한 정치담론이 형성되었다. 이른바 술자리의 '믿거나 말거나' 가십거리 정치토론이다. 민주헌법을 쟁취한 후에도 사람들은 현실문제의 분석과 해결보다는 게임시장의 정치놀이에서 더 큰 재미와 현장감을 느꼈다. 정계에서는 자질보다는 머리수가 중요했다. 우리편의 머리수와 너희편의 머리수가 정해지면 나머지는 권모술수의 단수가 결정한다. 그리고 밀실 음모가들의 단수는 전지전능한 주필이 정해준다. 이런 식으로 웃고 즐기는 가운데 한국 정치계에는 어느덧 잡초만이 무성해졌다.

잡초제거는 일종의 인적 청산이다. 그러나 한국의 못자리에서는 어떤 품종을 심어도 잡초만 재배된다. 경작자들이 바로 상습적으로 잡초를 말아 환각제를 피워 온 골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변화된 상황에서 과거의 게임은 계속될 수 없다. '3김'이라는 정치상징이 퇴장했다. 영웅 뒤만 따라다니던 병졸들만 남았으니 이제는 게임이 안된다. 이제는 병졸들이 아니라 저마다 자기 판단과 신념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현실정치를 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감상법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분석과 문제진단, 그리고 해결사이자 치유자로서의 각자의 신중한 판단력이 요구된다.

문제는 골초들의 금단현상이다. 과잉된 정치의식과 게임중독증은 그대로 남아있다. 현실은 너무나도 복잡한 전문화와 세분화의 거대한 종합이며, 다양한 이권들과 신념들은 깔끔하게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입장 안에서도 두루 중첩되어 있다. 우리편, 네편 갈라서 싸우고 욕하고 돌던지고 술먹는 놀이가 아니라 신중하게 단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문제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은 싫어한다. 정치게임이 좋았던 것은 그것이 무책임하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여에 책임이 부과된다면, 재미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은 40대부터 연구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했다. 당시 그리스의 40대 시민이면 하급자의 고달픈 일상에서부터 관리자의 무거운 책임성까지 두루 체험해본 사람들이다. 현대인은 보다 일찍, 보다 복잡한 문제의 해결에 참여해야 하며 자신의 다양한 체험을 지속적으로 통합해 나가야 한다. 이념이나 성향, 열정이나 욕망에 따라 깃발들고 줄을 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면상황 안에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영역을 파악하고 신중한 판단력과 책임성을 습득하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방향이 뒤틀려 있으면 열심히 전진해서 퇴보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출발점은 현재 당연시되고 있는 정치담론의 허구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별방법은 단순하다. 스스로 자문해보라. "지금 나의 관심이 문제의 규명과 해결에 놓여 있는가, 아니면 내가 편드는 진영의 영웅이나 그 반대영웅의 영웅적 행동과 언변에 놓여있는가?"

골초의 금단현상은 새로운 영웅상징을 요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각자의 판단력과 책임성을 사회적으로 통합하는 협력의 능숙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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