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정치는 피 튀기는 권력투쟁인가, 아니면 거대한 통합의 과정인가?

현실주의 정치학자들과 야심가들의 끝없는 훼방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정치는 공동체 통합의 거대한 과정이었고, 또 지금 여기에서도 사실은 그러하다.

공정한 룰에 따른 경쟁과 적자생존의 투쟁은 다르다. 적자생존의 무자비한 투쟁은 문명과 질서가 결핍된 상황 속에서 심적으로 퇴행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다. 모든 문명권과 문화국은 사회적 분쟁이 발생하는 곳에서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힘의 과도한 집중을 견제하여 경쟁의 누적이 장기적으로 사회적 협력과 통합에 공헌하도록 조정한다. 정치는 정의로운 질서를 형성하려는 노력이며, 올바른 질서란 강자의 자의적 질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자발적 협력과 통합에 봉사하도록 기능하는 질서이다.

사태의 자연스러운 경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정치적 통합의 과정을 보다 느리고 보다 비효율적이고 보다 짜증나게 만드는 작동기제들은 무수하다. 일상의 부단한 협력과 사회적 통합의 거대한 작동과정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색안경들의 종류는 여럿이다. 그리고 각각의 색안경들, 이즘들, 주의들, 론들, 감상법들은 나름대로 자극적이고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또 부분적으로는 그럴 듯 하기도 하기 때문에 아직도 만병통치약은 시중에서 잘 팔려 나간다. 성적인 변태와는 별도로 정치적인 변태들도 허다하다. 변태들이 쓰는 신문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다.

정치담론의 문제는 딴 다리를 긁어야 말발이 선다는 데 있다. 정치얘기만 나오면 현실과는 무관하게, 마치 딴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인구에 회자되는 조어들과 관념들, 이미지들과 연상들을 통채로 습득해야만 옆에서 한 마디 거들 수 있다. 무협소설에는 내공과 외공, 경공술과 검장지법에 관한 고도의 학술적 체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이라는 것을 독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에 빠져 비몽사몽지간에 놓이면 적벽대전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정치권을 바라보고 조선일보를 읽다보면 그것이 생시라고 확신하게 된다. 요컨데 민주주의 정치란 중원무림의 대권투쟁을 감상하는 대권삼국지 감상법에 따라 독자들이 느낌과 말로 동조하는 양방향 게임이라는 것이다. 정치가와 시민을 매개하는 언론은 이 양방향 게임의 향방을 조정하는 역사의 지휘자이다.

정치담론에서 현실감각의 상실, 관념과 이미지의 오염은 심각하다. 신념에 가득 찬 고매하고 냉철한 사상가들은 한 꾸러미의 집합명사들을 논리적 체계 안에 가둔다. 그러나 그 집합명사는 자유로운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집합명사 안에 들어있는 등장인물들은 사실상 도처로 이동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는 유클리트 기하학처럼 깔끔한 논리적 추론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설득과 창의적인 분발을 통해 해결된다. 우리는 단지 종합적 추세를 분석 진단하고 개연성이 큰 예측을 얻고 그에 대해 가치판단을 한 뒤에 노력하고 인내하며 통합의 장기적 과정에 참여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인간적 과정을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주의자들은 책에서 얻은 판을 펼쳐놓고 그 안에서 이야기한다. 애독자들은 언론에서 읽은 기자들의 인상비평에 따라 판을 펼쳐놓고 그 안에서 이야기한다. 일단 판이 펼쳐지면, 그 판에 들어맞지 않는 사실증거들은 철저히 무시된다. 마침내 사실은 제쳐놓고 판들이 나와서 자기네끼리 싸움을 한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정치담론이라고 부른다.

19세기 좌우의 학술적인 장르문학들, 20세기 삼국지의 대중적인 장르문학들이 시민사회의 대중문화를 장악할 때 애독자들의 감상소감 나누기를 우리는 정치담론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정치담론의 한 가지 중요한 효과는 그것이 우리의 정서와 심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그 영향력이 현실의 정치과정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밉고 화나는 경우도 많은 법이다.

원래는 판을 짜놓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안에서 현실로부터 판을 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반칙이 아니라, 원칙이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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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7월19일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세상에 누가 들어도 당연한 말처럼 어려운 말도 없다. 건전한 상식과 바른 양식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사실 당연한 만큼이나 심오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당연함에 만족하고 넘어가지 그 심오함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심오한 것도, 건전한 상식과 바른 양식만 갖는다면, 지나가는 상념들 속에서 꼭 붙잡아서 인격 속에 간직하고 필요한 양분들을 공급해서 인격적 덕성의 수준으로 체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깨어난 놀라움으로 눈을 빛내며 의미를 찾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의식의 각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것은 그저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도 아퀴나스는 사회의 난제를 다룰 때마다 곧잘 이 말을 되풀이하면서 반성을 시작한다. '산다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의 구분이 그만큼 원리적이고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잘 사는 것'이라는 그 미지의 X를 잘 이해하고, 그저 사는 것으로부터 잘 사는 것에로 가는 경로를 잘 파악하고, 그것이 정말 잘하는 일(좋은 일)이라고 납득이 된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잘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경로에 따라 잘 사는 삶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추동의 흐름을 따라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윤리적 숙고가 전개된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일이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자알 살아보세~" 어린 시절 새벽 아침을 깨우는 동네 확성기에서는 쿵짝쿵짝 쿵짝쿵짝 새마을노래와 함께 이 노래도 항상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새벽종이 울리면 졸린 눈을 비비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기 위해 지긋이 아랫배를 당기며 새벽길을 나선다.

당시엔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꽤 명백했던 것 같다. 일제랑 미제는 국산보다 이쁘고 튼튼해서 좋다. 잘 사는 것이란 일본이나 미국처럼 사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이란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자동차도 사고 부자가 되는 것이다. 이건 아주 당연한 말이다. 결국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는 말의 의미는 인간은 부자가 되서 마음 놓고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것은 어린 시절, 다소 배고프던 시대의 이야기다. '잘'이라는 말이 간직하고 있는 의미심장성은 결코 불고기 3인분에서 멈추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잘'이란 말은 신발끈을 메는 기억과 연상되어 있을 수도 있다. 술레잡기에서 술레한테 잡히지 않고, 다방구에서 친구들을 구출하는 것도 정말로 재밋게 잘 사는 일이다. 잘 사는 것은 두루 잘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국어도 잘하고 산수도 잘하고 사회도 잘해야 한다. 그런데 거짓말을 잘하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을 잘 하는 것이다. 그니깐 그것은 잘하는 것이긴 하지만 잘 사는 것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이란 좋은 일은 두루 잘하고 나쁜 일은 두루 잘 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 살려고 노력하면서, 마치 티끌을 모아 가듯이, 나름대로 학식과 기술이 발전하고, 윤리의식과 사회성이 성숙한다. 그것은 생각 속에 스쳐가는 상념들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몸과 마음이 함께 익힌 습관이 된다. 그것은 각자의 성격과 역량, 가치관과 세계관, 개성과 인격을 조성한다. 나의 온 생애를 통해 누적된 나만의 독특한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결정과 행동은 나의 인격으로 통합되서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누구나 지금까지의 생애와 앞으로의 생애는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분투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말로 '잘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삶을 통해 마주치는대로 가능한 한 무엇이든 나에게 좋은 것을 모아들이고 나에게 나쁜 것을 피하면서 그것들을 수단, 도구, 디딤돌로 삼아 무언가 '잘 사는 것 그리고 보다 더 잘 사는 것'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당시에 나에게 좋은 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도 아니요, 당시에 나에게 나쁜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만도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또 결국에 가서는 그 자체로 좋은 것과 일치되는 노선으로 잘 해가야만 두루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한 좋은 것 모두 다와 가치있는 것 모두 다를 어떤 좋은 질서 안에서 어떤 올바른 선호에 따라 그때마다 음미평가하면서 수용하고 창조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내가 혼자서 그 모든 좋은 것을 다 얻어낼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협력을 통해 서로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면서 좋은 것을 두루 공유한다. 가족들은 나에게 기초적인 인성적 가치들을 제공하고, 전라도의 농부는 나에게 생명가치를 유지할 수단을 제공한다. 경상도에 공장을 지으면 사람들이 흘러 들어가 가전제품이 줄을 지어 나온다. 공단에다 공장들을 여럿 지으면 제품들의 줄들이 열을 지어 흘러 나온다. 트럭은 밤을 새워 달리고, 택시들은 분주히 교차하고, 가득 찬 건물마다 사람들은 활동으로 분주하다.

경제활동이 잘 사는 것의 끝은 아니다. 어느 수준에서든 반복적인 생활수준의 흐름 위에는 문화적 생활이 층을 지어 올라간다. 멋진 상대와 대화를 하며 잠시 시간을 멈추고 개성들에 매혹된다. 야구선수의 홈런은 한 여름밤의 더위를 식혀준다. 좋은 문학작품들은 의미들로 가득 차 있고, 노래와 춤은 원초적인 열정에 리듬을 부여한다. 만화와 영화는 창의성을 자극하고 창의성은 세계를 새로운 가치들로 채운다. 불멸의 작품은 영혼을 일깨우므로 아퀴나스와 같은 이들은 700년이 지나서도 강의를 계속한다.

문화적인 가치들의 향유도 잘 사는 삶의 끝은 아니다. 내면성이 성숙하는 만큼 연대성의 무게도 깊어지며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등장한다. 인격적 가치가 등장하며 그것은 사회 안에서 질서의 선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개성적인 인간들이 서로 다른 가치들을 결집해서 질서의 선에 공헌하는 와중에 상충하는 가치방향들이 충돌하고 분열하고 패권을 다툰다. 인류의 근원적 연대성 안에 인간존중의 가치를 채우려는 분투는 먼저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는 기초를 망각하고 연대성을 무시하는 개인주의로 후퇴하거나 아니면 권력을 잡아 차이들을 획일화하고 강압하려 한다.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 그리고 단지 잘 살려고 할 뿐 아니라 언제나 보다 더 잘 살려고 한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사용가능한 공적 거래계산서인 돈이라는 도구를 끝없이 쌓아 놓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수단이 무한히 필요할 수는 없다. 수단이 무한히 필요한 사람은 결코 '잘 산다'는 목표지점으로 전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잘 사는 삶은 결코 부귀나 영화, 명예나 칭찬, 권력과 숭배의 무한한 축적은 아니다. 잘 사는 삶으로 가는데 필요한 수단들이나 가능한 수단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수단들은 자신을 넘어선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들일 뿐이다. 잘 사는 삶은 수단의 무한성이 아니라 과정의 초월성이다. 내가 이제 신발끈을 잘 매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제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난관을 잘 해결하며 전진해야 한다. 잘 사는 삶은 본성적 갈망이 추구하는 의미심장한 가치들과 의미들을 몸으로 체현하고 어깨로 연대하면서 언제나 보다 더 잘 살려고 영적으로 분투하고 어느 정도 계속 성공하며 전진하는 삶이다.

궁극적으로 '잘'이란 용어가 지칭하는 현실은 바로 우리의 본성적 갈망 안에 깃든 초월적 목적성인 것 같다. 그것은 물질과 생명의 약동을 자체 안에 간직하면서 생물학적 생명이라는 기초적 가치를 유지하고, 그 위에 삶의 반복적 필요들을 해결해주는 경제적 가치들을 획득하고, 그 위에 가정과 친지에서의 친밀성의 가치들, 공동선을 향한 공동체의 연대적 가치들, 정의로운 국가와 평화로운 세계의 질서의 선을 획득하고, 내면성의 다채로운 문화적 가치들을 충족하면서 그 너머의 어떤 궁극적 목표를 향해 수직적으로 상승한다.

아래로부터 위로 상승하는 인간적 삶에서 퇴행이나 도피는 가능하겠지만 단계를 뛰어 넘은 도약은 없을 것이다.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결정과 행동을 통해 몸으로 체현되는 가치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상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예기치 못한 순간에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뜻밖의 선물 안에서만 가치충만을 발견할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그래서 잘 사는 삶이란 또한 매순간 가치충만을 예감하며 고대하는 삶이기도 한 것 같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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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넘 넘이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셨던 글>

토론을 무슨 사무라이나 카우보이들의 결투처럼 여기는것이 아주아주 잘못된 이유는
둘중에 한넘을 옳다고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사람들은 이긴넘을 옳다고 여길것이고, 어떤사람들은 진사람이 억울하다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그리하여...이런 습관은 스스로의 의견을 힘써 만들어나가는것을 다른사람에게(주로 잘나거나 힘쎈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미루는 아주아주 나쁜 버릇을 조장하게 된다. 즉 노예근성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런데...문제는 말이다...

의견이 다른 두사람이 충돌이 있을때...둘다 옳기는 불가능하다.(양시론은 항상 말이 안된다)
그러나 둘중 누구도 옳지않다 내지 둘다 틀렷기는 쉽다(양비론은 거의 항상 말이된다).
그래서 논쟁에 이겼다고 옳은것은 아니다. 그것은 곰곰히 따져보아야 하며, (토론이 정상적인 것이었다면) 대부분의 경우 <좀 덜 틀리는 의견>일 뿐이다.

그런데..여러가지(가령 A,B,C 세가지)가 뒤섞인 일에서는 세 사안에서 모두 옳거나 세 사안에서 모두 다 틀리는거는 (전모씨처럼) 사기꾼이나 도적놈이 아닌다음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ABC중 가장 중요한것에서 옳은놈이 이기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ABC중 하나라도 "가치판단"의 문제(가령 B)가 들어있다면 전체적인 결론 또한 (좀더 현명하거나 좀더 이기적이거나 등등 어쨋건) 개인의 선택일 뿐, 옳다 그르다는 별로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여제껏의 현실은..힘세고 재주좋은놈이 (물리적폭력이건 언어적폭력이건) 한판붙자 그런담에 너졋지? 너는꺼져...이렇게 되어왔던 것이다. 그넘이 <무조껀 옳은넘>이 되는것은 물론이고, 그안에 섞인 사안B에 대한 그넘의 <선택>까지 <옳은것>이되어 내 선택으로 생각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노예가 따로 있나?

그 주장의 말이되고 안되고는 따질 능력도 없고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좃시 한치건 한자건 이긴것처럼 보이는 놈한테 빌붙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좃선애덜이 그깟 자전거가 왜? 왜? 왜? 아깝것냐? (밤의) 대통령이 되는 참인데...^^) 그리고, 그러한 노예근성은 1차적으로 게으름을, 그다음으로 무지-부정직를 먹고산다. 단언컨데, 부지런하다면 그리고 무식하게라도 정직하다면, 절대로 노예가 되지는 않는다.

암만바도 아닌것은 아니라 하면서 좀 살자...^^ 그런다고 큰손해 보는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죽는것은 결코 아니다...^^
(뭐 평양감사도 지하기 싫으면 할수없다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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