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넘 넘이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셨던 글>

토론을 무슨 사무라이나 카우보이들의 결투처럼 여기는것이 아주아주 잘못된 이유는
둘중에 한넘을 옳다고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사람들은 이긴넘을 옳다고 여길것이고, 어떤사람들은 진사람이 억울하다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그리하여...이런 습관은 스스로의 의견을 힘써 만들어나가는것을 다른사람에게(주로 잘나거나 힘쎈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미루는 아주아주 나쁜 버릇을 조장하게 된다. 즉 노예근성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런데...문제는 말이다...

의견이 다른 두사람이 충돌이 있을때...둘다 옳기는 불가능하다.(양시론은 항상 말이 안된다)
그러나 둘중 누구도 옳지않다 내지 둘다 틀렷기는 쉽다(양비론은 거의 항상 말이된다).
그래서 논쟁에 이겼다고 옳은것은 아니다. 그것은 곰곰히 따져보아야 하며, (토론이 정상적인 것이었다면) 대부분의 경우 <좀 덜 틀리는 의견>일 뿐이다.

그런데..여러가지(가령 A,B,C 세가지)가 뒤섞인 일에서는 세 사안에서 모두 옳거나 세 사안에서 모두 다 틀리는거는 (전모씨처럼) 사기꾼이나 도적놈이 아닌다음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ABC중 가장 중요한것에서 옳은놈이 이기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ABC중 하나라도 "가치판단"의 문제(가령 B)가 들어있다면 전체적인 결론 또한 (좀더 현명하거나 좀더 이기적이거나 등등 어쨋건) 개인의 선택일 뿐, 옳다 그르다는 별로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여제껏의 현실은..힘세고 재주좋은놈이 (물리적폭력이건 언어적폭력이건) 한판붙자 그런담에 너졋지? 너는꺼져...이렇게 되어왔던 것이다. 그넘이 <무조껀 옳은넘>이 되는것은 물론이고, 그안에 섞인 사안B에 대한 그넘의 <선택>까지 <옳은것>이되어 내 선택으로 생각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노예가 따로 있나?

그 주장의 말이되고 안되고는 따질 능력도 없고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좃시 한치건 한자건 이긴것처럼 보이는 놈한테 빌붙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좃선애덜이 그깟 자전거가 왜? 왜? 왜? 아깝것냐? (밤의) 대통령이 되는 참인데...^^) 그리고, 그러한 노예근성은 1차적으로 게으름을, 그다음으로 무지-부정직를 먹고산다. 단언컨데, 부지런하다면 그리고 무식하게라도 정직하다면, 절대로 노예가 되지는 않는다.

암만바도 아닌것은 아니라 하면서 좀 살자...^^ 그런다고 큰손해 보는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죽는것은 결코 아니다...^^
(뭐 평양감사도 지하기 싫으면 할수없다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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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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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넘 님이 예전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셨던 글>

안티조선에 동감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 동기라던가 구체적 사안에 대한 입장이 가지각색이다.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조선일보의 수구적 내지 극우적 정치편향성을 우선적 목표로 삼는 안티조선을 정치형 안티조선이라고 부르고, 조선일보의 뒤틀린 사이비언론으로서의 특징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는 안티조선을 종교형 안티조선이라고 일단 대별할 수 있을 듯 하다. 혹은 조선일보의 존재 그 자체를 우선적으로 문제로 삼는 입장과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우리언론 내지 公的인 말글살이의 어떤 (근원적이거나 현상적이거나간에) 심각한 문젯점을 문제로 삼는 입장의 대비라고나 할까?

여기서 <정치형>이라 칭함은 별로 오해를 살 염려가 없을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역시 정치선진국?^^), <종교형>이라 칭함은 일단 <내 살아생전에 결말을 못볼 가능성이 많은, 시간이 무지무지 오래 걸리는 그런 정치>라는 관점이라고 두리뭉실 정리해보기로 한다.

우선 <정치형 안티조선>이 관심을 두는 영역은 대략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적 정치세력과 좃선과의 퇴행적 정치야합의 분쇄,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지역감정 혹은 지역패권주의를 부추키고 유지-강화하려는 책동의 저지, 좃선이 앞장서서 부추키고 밀어붙이는 다수를 가장한 횡포, 등등....의 이슈들일 것이다.

이들 이슈들은 우리사회가 보다 민주적이고 사람다운 삶이 가능한 정상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가능한한 최단시간안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것들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략 열심히 하고 여건이 잘 맞아떨어진다면 한두세대안에 해결해 낼 수도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함은 매우 중요하며 내용은 달라도 우리앞의 많은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각 세대는 최선을 다해 가능한 모든 정치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 와중에도 어떤 안티조선앙들에게는 마치 하나의 족쇄처럼 떠나지 않는 갈등이 있다. 다름아닌 "이러한 현실정치를 최우선적으로 하는 노력의 중요성은 언젠가는 죽을 인간으로서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되, 그렇다고 인간의 모든 노력이 현실정치에 전적으로 집중되어야만 하는가?"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읊어본다면, 당면한 정치적 목표를 위해서는 최악의 경우 좃선스러운 사이비성을 우리내부에 허락할 수도 있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정치형 안티조선>의 입장이라면 의문의 여지가 없이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선택하고 행동할 것이며 사실 이러한 경향성은 한때 우리모두를 휘젓던 유명논객들을 위시하여 지금현재 우리사회에서 거의 보편적인 현상인것으로 보인다. 한편, <종교형 안티조선>의 입장이라면 정치적입장과 무관하게 그러한 사이비성에대한 거부감을 무조건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며, 정치감도가 유달리 높은 우리사회의 풍토로 보았을 때 대체적으로 안티조선 내에서도 소수적인 입장이 아니었었나 싶다.

문제는 <정치형 안티조선>의 경우에는 모든 정치가 그러하듯 결국 종국에가서는 결과주의적 맹목성 내지 상대주의적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일텐데 이를 넘어서는 방법은 역시 그 신념체계의 힘과 생명력에 의존하는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념들은 그 생명력이나 하다못해 합리성-논리정합성에 있어서 차이가 없이 모두 동등한 것일까? 이렇게 일단 '신념'이라는 명찰을 달고서 서로간의 경쟁단계로 가면 결국 불필요한 물리적-언어적 폭력만 남는 것이 아닐까? 어떤내용의 신념이건 어떤수준의 신념이건 '신념'간의 폭력이기만 하면, 프랑스대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 동일하게 불가피하면서 동시에 필연적이 되는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것일까? 히틀러의 신념과 스탈린의 신념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것일까? 멀리갈 것 없이, 박정희나 전두환의 신념과 김대중이나 노무현의 신념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최근 노무현이라는 (어느형인지는 모르겠으나) 안티조선 성향의 정치가가 정치권력을 획득한 것이 계기로 작용하여 우리사회는 정말 오랜만에 (얼핏볼때) 이러한 어떤 신념들간의 경쟁이 시작된 듯 하다. <정치형 안티조선>을 지향하던 우리모두앙덜중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입장에 따라 한줌 품이라도 팔아서 돕기위해 여기저기로 떠나갔다. 그러나 한사람의 <종교형 안티조선>앙으로서 나는, 우리사회의 현재의 '신념'경쟁이라는것이, 그러한 신념속의 혹시모를 <좃선틱한 사이비성>정도는 전혀 문제가 될 필요도 없을만큼, 모든사람들이 훤히 다 알도록 모든것이 다 까발겨진 막다른 골목의 경쟁인지는 두고볼 일이 아닌가 싶다.

이제 생각컨데 '안티조선=반한나라'이건 '안티조선=좌파적 진보주의'이건 '안티조선=지역패권주의의 척결'이건 어떻거나 간에, 각자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떠나간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정정당당하게 경쟁에 임하리라 믿는다. 다만 바라는것은, 좃선이 지금도 멀쩡하게 언론의 탈을 쓴 채 앞장서서 밤낮없이 퍼뜨리고 있으며 아직 우리사회 여기저기 구석구석 악취를 풍기며 넘쳐나는 언어적 사이비성과 폭력성에 이를 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작금의 이 큰 판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멍청한건지 쪼잔한건지 이곳을 떠나지 못한채 나름대로는 비록 돈안되는 최선이지만 열심히 다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래야 이 난리굿판에서 각자 볼일을 다 본 다음 어느순간에는 그래도 사이비성만큼은 없으려 끈질기게 노력하는, 가끔식 생각나면 들러서 비비고 싶어지는 구석배기 언덕으로 남아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누군가의 말대로 이슬맞는 썰렁한 교회가 가장 교회답다고도 하는데, 엄마가 꼭 능력있고 돈많고 미인인 엄마만 엄마였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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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9호, 민음사, 1999.

1

내가 학생인 건 알겠는데, 그런 자각은 선생님의 존재가 전제될 때에야 가능하니 이는 학생임이 완벽하게 내재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이처럼 선생님이 내준 숙제하듯이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선생님들이나 펼칠 수 있는, 원리와 결말이 뚜렷하게 들어맞는 <길>을 찾아낼 수 없고, 내 머리 속을 채우기도 급급한 터에 <우리>의 공부 법까지 밝혀낼 수도 없다. 그래서 부탁 받은 제목인 <우리 공부의 길을 찾아서>를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제멋대로 바꾸어버렸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나의 선생님께 배운 바와 그것을 어줍잖게 응용해서 덧붙인 몇 가지다. 덧붙였다고는 하나 그것도 공부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부 외적인 것인데, 그건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세계가 조금은 다른 탓에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해당하는 걸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려 한다.


2

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을 분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학문적 업적이나 주위 사람들의 평판을 참고해서 선생님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는 지도 교수를 고르는 방법이지 선생님을 찾는 방법은 아니다. 선생님은 지도 교수 이상의 그 무엇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작 지도 교수 고르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교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강의를 성실하게 하는 교수. 개념을 철저하게 따져서 강의하는 교수. 무슨 일이든지 원칙대로 처리하는 교수. 자신은 늙은이면서도 일 학년 학생에게도 반말하지 않는 교수. 리포트를 써내면 빨간 펜으로 고쳐서 되돌려주는 교수. 어떤 일이 있어도 학점을 고쳐주지 않는 교수. MT도 공식 행사라면서 반드시 참석하며, 그것도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가는 교수. 이렇게 처신하는 교수는 강의 시간에 늦게 들어와서 일찍 나가는 일도 없고, 무슨 보직을 맡을 겨를도 없으며, 어디에 잡문을 쓸 여가도 없고, 텔레비전에 나갈 시간도 없고, 정치에 돌릴 눈은 더욱이나 없다. 이런 교수가 있다면 계속해서 강의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빨아들여야 한다. 이런 원칙주의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머지 작년에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경우가 없으며, 말을 옮겨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수가 많으니 공책에 적어 두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런 교수에게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은가? 우선 개념 따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은 개념의 학이니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철학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개념을 알아야 처리할 수 있다. 이것부터 시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공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두번째로 원칙대로 처리하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 되어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원칙 지키기를 기업가에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아무리 어린 사람이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도 기본이다. 공부를 계속하지 않을 사람도 배워두어야 하는 것들이다.

지도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것 또한 지도 교수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지도 학생에게 잔심부름시키지 않는 교수. 자기가 쓴 논문을 자기가 타이핑하고 편집까지 하는 교수. 출판사에서 넘어온 교정본을 자신이 교정보는 교수. 새로울 것도 없고, 치열함은 더더욱 없이 사교장으로 변해버린 학회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교수. 대학원 수업 시간을 꽉 채우고 끝내는 교수. 고전만 붙잡고,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그것만 읽히는 교수. 논문 주제를 상의하면 <알아서 써보라>고 하는 교수. 막상 논문을 써 가면 주격 조사나 접속사부터 따지는 교수. 논문 인용문의 원전을 죄다 찾아보고 잘못된 번역과 적절치 않은 인용을 지적해 주는 교수. 이렇게까지 해놓고도 <지금까지는 문장 연습과 논문 쓰기 연습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주제를 잘 정하고, 본격적으로 써보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교수.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아무리 여러 학기가 지나도 결코 논문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교수.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견해와 달라도 학생의 주장이 논리적이면 인정해 주는 교수. 자신에게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에게 다른 학교 강의 하나 알선해 주지 않는 교수. 아무리 오랜 세월을 공부해도 두 사람의 거리가 딱 그 만큼에 멈춰 있게 하는 교수.

이런 교수가 있을까 마는 부지런히 찾아보면 있을 거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없으면 다른 학교에서 찾아보고 한국에 없다면 외국에서 찾아보자. 외국에서 그런 교수를 만났으면 계속해서 거기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오지 말자. 예를 들어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치자. 그 뒤로 그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공부 성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말에 심정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는다. 지도 교수가 뭐라 하면 모를까. 또 자기가 쓴 글을 지도 교수가 언제든지 읽어볼 수 있다면 공부를 대충하고 글을 적당히 쓸 수가 없다. 그런데 학생은 한국에 있고, 지도 교수는 외국인이어서 외국에 있다면 어떨까? 무서울 게 없다. 아직도 먼길을 가야 할 사람이 게을러지고 망가지기 십상이다.

하여튼 이런 지도 교수 밑에서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을까?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는 법을 배운다. 공부하는 사람들 세상도 일종의 사회여서 쓸데없는 인간 관계가 많은 것을 좌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걸 딱 잘라 버릴 수 있는 뱃심이 생긴다. 고전만 붙잡고 앉아서 공부를 했으니 기본이 튼튼해진다. 게다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소홀히 읽는 일이 없게 된다. 무슨 문제든지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서양의 철학을 공부했어도 결국 그걸 풀어내는 건 우리말을 통해서인데, 문장 쓰는 훈련을 하므로 자신의 언어로써 생각하고 말하는 힘이 길러진다. 이러다 보면 외국의 책을 번역해도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을 하게 되질 않는다. 공부 가르쳐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안 써주니까 학생도 자연히 쓸데없는 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는 습성이 생긴다.


3

공부하는 데 제일 좋은 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선생님 없이도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 훌륭한 학생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이런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20년쯤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를 만나서 <비법>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베껴라>였다. 베끼라니, 표절을 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초보자가 대단한 걸 만들어보겠다고 덤벼봤자 땀만 빼고 시간만 낭비되니 잘된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보는 일을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거였다. 똑같은 물체를 두고 그대로 그린다 해도 그리는 사람마다 그림은 다르다. 초보자가 내놓은 그림과 숙련자가 내놓은 그림, 대가가 내놓은 그림은 아주 다르다. 어떤 대가의 그림은 전혀 엉뚱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그 대가는 처음부터 그런 엉뚱한 그림을 그렸을까? 그건 아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데생을 했었다.

철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 베끼기를 할 때는 베낄 책을 잘 골라야 한다. 일테면 서양 근대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최소한 코풀스턴의 철학사를 잡아야 한다.

철학 공부를 베끼기에서 시작하라니 의아해할 수도 있다. 철학사 따위는 무시하고 <내 철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베끼기 없이 <내 철학> 해봤자 남는 건 처치할 길 없는 거만과 아무런 맥락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현란한 단어들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기 마련이고 남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자신의 철학이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이라는 도취에 빠지며 급기야는 도사가 된다. 이런 도사들은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접하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읽은 몇 안 되는 책 속에 나온 말로만 설명할 뿐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학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 한다. 이런 도사는 철학 공부하는 사람 중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철학의 제문제}(벽호)처럼 주제별로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정확한 문맥 속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제에 관련된 철학자들의 원전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덧붙여 두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책도 50번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누가 중요하다고 하는 부분만 읽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에게는 그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자기 맘에 드는 학설이나 학자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맘에 드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내주는 건 아니다. 그 사람의 학설은 수많은 대답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무덤덤하게 대하지 않으면 그 학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 신앙인의 자세이다.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한 분야, 한 시대만 파고들다 보면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져서 철학의 전 분야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입만 열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술에 취했어도 헤겔만 떠드는 건 광신자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what's new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언뜻 듣기에는 옳아 보이나 <학>이라는 게 <체계적 지식>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대중의 수준에 걸맞게 성교육을 잘한다 해도 그는 성의학자가 아니며, 자장면을 아무리 많이 팔았다 해도 그는 경영학자가 아니다. 어쨌든 베끼기를 거치지 않은 독학은 시간 낭비, 지적인 허영일 뿐이다.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면 대개는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노트에 정리한 뒤 끝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책도 기억에 남지 않고 문장 몇 개만 막연한 추억처럼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닌다. 차라리 가장 표준적인 책을 한 권 정해서 모든 말과 문장을 따져가며 끝까지 읽는 게 낫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는데 막상 실천하려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참고문헌을 적게 읽으면 뒤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이거 한 권 읽다가 새로운 것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따위가 엄습하는 것이다. 이런 걱정과 불안이 생겨나는 것은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기본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를 충실히 읽은 이는 철학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풀리는 건 아니며,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4

베끼기를 열심히 하는 건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기초가 다져졌으면 구체적인 자기 공부에 들어갈 차례다. 도대체 무얼 공부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을 주제로 삼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제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어떤 이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공부 주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여야 한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본 문제를 다듬어서 철학적 주제로 삼는 것이다. 별로 해주는 것 없이 규제만 하고 세금만 잔뜩 걷어 가는 국가가 못마땅했으면 국가론을 주제로 삼아보는 것도 좋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마다 죽어나가는 게 이상했다면 존재와 무의 문제를 주제로 택해도 될 것이다. 주제를 이런 식으로 정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거, 남들이 하는 거 붙잡아서 공부하다 보면 유행이 지나서 말짱 헛것이 될 수도 있고,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만 하게 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공부는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따로 노는 공부가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자기 스스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남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면 최신 이론 들춰서 적당히 요약 정리한 논문이나 쓰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그 논문의 내용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느냐고 묻는다면 <철학은 본래 메타 학문이므로 구체적인 현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고상한 대답을 하게 된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이 논문은 내 삶과도 별로 관계가 없고, 단지 나는 논문을 위한 논문을 썼을 뿐>이라고 말이다.

탐구할 주제를 정했으면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그럼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철학자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철학자를 판별하는 근거는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이다. 그 철학자가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면 일단 그걸 정독한다. 번역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또 제대로 된 번역본이 드문 것도 사실이므로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서 해당 외국어를 익혀야 함은 당연하다. 철학자의 책을 읽어나갈 때는 머리를 비우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읽어야 한다. 괜한 말 덧붙여 봐야 쓸데없는 일이고 감상일 뿐이다. 철학자의 책을 충분히 읽어서 그 책에 등장하는 개념과 논지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으면 관련된 책, 즉 해설서나 참고 문헌을 읽는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관심 가진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학자가 칸트라면 칸트의 책부터 읽어야지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민음사)부터 읽기 시작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순서를 바꾸면, 칸트의 책을 읽을 때에도 이미 들뢰즈가 규정한 칸트, 즉 <들뢰즈 버전의 칸트>를 머리에 담고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글에도 들뢰즈가 강조한 문장만 인용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도서관에서 어떤 철학자에 관한 논문을 여러 권 가져다 놓고 인용된 원문을 비교해 보라. 거의 다 똑같은 걸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눈으로 읽은 성과를 발견할 수 없다. 순서를 바꿔 공부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학자가 쓴 참고 서적이라 해서 크게 주눅들 건 없다. 그들이라고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니다. 어차피 철학사에 이름이 못 올라가기는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 논문에서도 본문에 이름을 올릴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각주로 처리해야 할 사람들이다. 국내에서 나온 해설서나 관련 논문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외국의 책들을 군데군데 떼어다가 짜깁기 해놓은, 이른바 <이중 저작>인 경우가 허다하고 내용상 학설 소개에 그치고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참고 서적을 읽은 다음에는 다시 철학자의 책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읽는다. 누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이거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읽어야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 자기 글을 써볼 차례다.

오로지 원저작만을 인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써서 글이 안 되면 원저작을 다시 읽어야 한다. 원저작의 인용만으로 글을 쓴 다음에는 참고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각주에 덧붙인다. 본문과 각주가 글에서 차지하는 지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각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문은 글의 뼈대요, 살이다. 각주에나 들어갈 내용을 본문에 쓰는 것은 페이지 늘리기이다. 앞서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면 칸트의 저작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자면 본문에는 그의 원전에서 인용한 것만이 들어가야 한다.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에 담긴 내용은 각주에서 처리하면 된다. 들뢰즈가 제시한 칸트 해석을 논문의 주제로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논문이 아니라 소개글, 또는 에세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학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논문을 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원저작과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대결이 없다면 영원히 참고서에 의존해야 하고 원저작을 넘어설 수 없다. 물론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쓰기보다는 자기 주장만으로 글을 쓰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현단계에서 그걸 하는 건 도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원저작과 대결함으로써 철학자의 사유의 힘을 익히고 깊이를 다져서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부딪히는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중 제법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문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주어 동사가 맞지 않는 문장으로 가득한 학술 논문,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본이 사방에 쌓여 있는 건 문장 쓰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 쓰레기 더미를 쌓는 일을 거들겠다면 문장 훈련을 게을리해도 좋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평소에 글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소개서 한 장도 안 써본 사람이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 여기저기서 떼다 붙인 글로 리포트를 써내던 사람이 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떼다 붙인 글들도 문장이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 주제나 붙잡고 글을 써봐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일기라도 날마다 써야 한다. 말은 일사천린데 글은 엉망이라면 공부를 접는 게 낫다. 생각이 표면에서만 떠돌 뿐 되새겨지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책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생각도 정리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책 한 권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과 주석으로 이루어진 논문을 배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무시해도 된다. 생각의 결을 따라서 물 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글은 언제든 쓸 수 있지만 엄격한 틀 속에서 글을 쓰는 훈련은 다시 할 기회가 없다. 글은 최대한 간결하게 써야 한다. 열 개의 문장으로 하던 이야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걸 단 한 문장으로까지 줄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주제 정하기, 원저작과 참고서 읽기, 글쓰기는 모두 혼자서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의논해서, 스터디를 통해서 함께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른바 <스터디>라는 거 해봐야 대강 대강 읽기 마련이고, 끝나고 벌어지는 뒤풀이나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니 시간 낭비다. 물론 이런 사교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런 사람과는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한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 정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에게 묻지 말고 지도 교수에게 물어야 한다. 선배가 가까우니 선배에게 묻는 것이 쉽겠지만 그거 좋은 점 하나도 없다. 우선 선배는 불확실하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삼 사년 선배라 해도 자신보다 크게 나을 것 없다. 또 선배에게 자주 묻다 보면 공부와는 관계없는 <인간 관계>가 생겨서 훗날 그 선배의 글을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어렵게 되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도 어렵다. 선배를 우습게 안다고 말하는 선배는 정말로 우습게 알아도 된다.


5

마지막으로 할 일은 공부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지금까지는 기존의 철학자의 사고를 검토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나의 언어로 소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 하는 일은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참으로 복합적인 영역과 재료로써 이루어진다. 철학으로 간주되는 영역만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공부를 심화시키는 목표는 교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가 되는 데 있다. 공부는 벼슬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교수가 되는 방법은 따로 있다. 교수가 되려면 철학 이외의 분야를 공부해서는 안 되고 철학에서도 자신이 전공하는 세부적인 부분 이외의 것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 세부 전공 분야에서의 다른 교수들, 특히 외국의 교수들의 논문이나 책을 대강이라도 많이 읽고, 그들의 논의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굳이 비판까지 할 필요는 없다. 될 수 있으면 가장 최근의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을 골라서 소개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글을 써서 학회에 가서 부지런히 발표도 하고 마찬가지의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사교도 하고 자신의 글이 학회지에 실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수가 되고 나서 그 바닥이 편협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스스로가 그런 것도 예측하지 못한 바보임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자가 되려면 우선 공부를 시작할 때 했던 일, 즉 베끼기를 계속해야 한다. 자신이 집중적으로 연구한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해서 철학의 전 영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다른 분야를 공부한 사람의 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해도 못하는데 토론과 비판은 더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을 계속해서 다지는 것은 심화된 공부에 있어서도 밑거름이다. 심화의 과정에서는 반드시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선 읽어야 할 분야는 역사이다. 통사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항목을 다룬 역사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역사책 읽기는 철학적 주제들에게 생동성을 가져다준다. 몰역사적인 철학적 사유는 위험한 것이다. 철학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려면 과거에는 어떻게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걸 전범으로 삼아 오늘날 요구하는 바를 파악해야 한다. 과거와 오늘날의 끊임없는 대조를 통해서만 철학적 탐구가 빠져들 수 있는 추상성이라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면 신문이나 잡지 등을 열심히 읽어야 함이 기본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가지고 읽어야 하므로 사회과학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에 대한 독서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만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기본을 갖출 수 있고, 그것이 공허한 탁상공론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한 메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철학 속에 <삶>이 들어간다. <생활 속의 철학>은 고매한 에세이 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철학 공부하는 이들도 시대의 아들이다. 그러니 시대를 넘어설 수 없고,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시대에 충실한 학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사유로 가는 첩경이 아닐까. 철학사에서 접하는 철학들 중에서 오로지 철학만 공부해서 얻어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모든 분야를 골고루 천착한 결과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훌륭한 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인데, 이게 구체적으로는 먹고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를 먹여 살려주는 사람을 욕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목이 걸려 있는 일에 소신을 거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말로는 대의명분을 지껄여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열이면 아홉이 수그러드는 게 사람의 행태다. 그러니 아예 속 편하게 학문과는 무관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학문적 독립성을 지키는 데에는 가장 좋을 것이다. 게다가 직업을 가지면 구체적인 현실 속에 정신이 자리잡을 수 있고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자학과 자만에 빠지지도 않는다. 글을 통한 현실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스피노자를 존경한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당장 안경사 자격증을 따라.

6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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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한 꿈 Fairdream.net (잡넘님 블로그)

 

자유

마음 2006/07/31 23:24

자유는 끊임없는 시도와 연습의 결과이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자유로운 동작은 아무리 새로워보인다 하더라도 이미 연습을 통해 몸에 익힌 수많은 동작들 중 하나를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반복 혹은 변용하는것에 불과하다.

less..

가령 유능한 테니스선수나 골프선수가 어떤 상황에서도 원하는 자세에서 정확한 동작으로 일관성잇게 타구를 쳐 낼수 잇는 것은 그러한 자세-동작이 언제어떤상황에서도 원하는대로 가능할 수 잇도록 관련된 모든 필요한 근육, 순발력-유연성, 심페기능 등등의 기초체력을 끈임없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충분히 넉넉한 수준에 도달시키고 또 유지강화 시켜왓기 때문이다. 유능한 발레리나나 체조선수가 기댈데 하나 없는 허공에서도 상상력이 원하는 대로의 자세와 동작을 할 수 잇는것도 마찬가지다.


또 유능한 재즈연주자가 그 음악안에서 홀로 마음가는대로 자유로우면서도 동료들과 어울려 아름다울 수 잇는것은 이미 수많은 날들을 연습과 기초훈련을 통해 시도, 반복, 불화, 좌절, 실패, 화해, 섬광같은 만족...등등의 기억이 몸속에 정신속에 이미 엄청난 양으로 쌓여잇고 또 게속 쌓아나가고 잇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명연주자가 되엇다 하더라도 스케일연습은 항상 빠지지않는 법이다. 유능한 엔지니어가 아무리 낯선 미로를 마주하더라도 변함없이 정직하고 자유롭게 차근차근 출구를 찾아나갈 수 잇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육체적-정신적 기초체력이 허술하면 허술한 그 기초체력이 허락하는 범위내의 몇몇 동작만이 겨우 가능할 뿐이다. 자유랑은 거리가 멀다. 오직 끈임없는 시도와 연숩만이 딱 그만큼만 우리를 자유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게 해 준다. 즉
평균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스케일연습이듯이, 모름지기 겉으로 드러난 자유로움이란 수면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연습과 기초훈련이야말로 물속에 잠겨잇는 빙산처럼 자유의 숨어있는 거대한 실체라고 할 수 잇을 것이다. 자유 역시 습관 혹은 버릇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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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두 분이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데,

이 마음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결혼식장에서 약속한 것 다 지키고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검은 머리가 하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거나,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겠는가 물으면,

예 하며 약속을 해놓고는 3일을 못 넘기고 3개월, 3년을 못 넘기고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 아내 때문에 못살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다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혼하기를 원해놓고는 살면서는 아이고 괜히 결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하는 게 나았을걸, 후회하는 마음을 냅니다.

그럼 안 살면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해놓고 안살 수도 없고

이래 어영부영하다가 애기가 생기니까 또 애기 때문에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가지고,

아내가 남편을 아이고 웬수야 합니다.

이렇게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고생 고생하다가

나이 들면서 겨우 포기하고 살만하다 싶은데,

이때 또 자식이 애를 먹입니다.

자식이 사춘기 지나면서 어긋나고 온갖 애를 먹여가지고

죽을 때까지 자식 때문에 고생하며 삽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혼할 때는 다 부러운데 한참 인생을 살다보면

여기 이 스님이 부러워, 아이고 저 스님 팔자도 좋다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스님이 되는 것이 좋으면 처음부터 되지 왜

결혼해 살면서 스님을 부러워합니까?

이렇게 인생이 괴로움 속에 돌고 도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이유를 말할 테니 두 분은 여기 앉아 있는

사람(하객들)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렇게 좋아서 결혼하는데 이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그 따져보는 그 근본 심보는 덕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지위는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이유는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손해볼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덕볼 수 있는 것을 고르고 고릅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에게 덕보고자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덕보겠다는 이 마음이 살다가 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주고 70% 덕보자고 하고,

남편도 자기가 한 30%주고 70% 덕보려고 하니,

둘이 같이 살면서 70%를 받으려고 하는 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보면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십중팔구는 하게 됩니다.

속은 것은 아닌가, 손해봤다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덕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

좀 적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쥐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 해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굴도 안보고 결혼해도 잘 살았습니다.

시집가면 죽었다 생각하거든.

죽었다 생각하고 시집을 가보니 그래도 살만하니까 웃고 사는데,

요새는 시집가고 장가가면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하고 가보지만

가봐도 별 볼 일이 없으니까, 괜히 결혼했나 후회가 됩니다.

결혼식하고 며칠 안 돼서부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 전부터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

신랑신부 혼수 구하러 다니다가 의견차이가 생겨서 벌써 다투게 됩니다.

안 했으면 하지만 날짜 잡아놔서 그냥 하는 사람들도 제가 많이 봅니다.

오늘 이 자리의 두 사람이 여기 청년정토회에서 만나서 부처님법문 듣고

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래도 저분하고 살면서 저분이 나하고 살면서

그래도 좀 덕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줘야 않느냐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보를 잘못 가져놓고 자꾸 사주팔자를 보려고 합니다.

궁합본다고 바뀌는 게 아닙니다.

바깥 궁합 속 궁합 다보고 삼 년을 동거하고 살아봐도

이 심보가 안바뀌면 사흘 살고 못삽니다.

그러니 이 하객들은 다 실패한 사람들이니까

괜히 둘이 잘살면 심보를 부립니다.

남편에게 '왜 괜히 바보같이 마누라에게 쥐어 사나,

이렇게 할 것 뭐 있나'하고,

아내에게는 '니가 왜 그렇게 남편에게 죽어 사나,

니가 얼굴이 못났나 왜 그렇게 죽어 사노'

이렇게 옆에서 살살 부추기며, 결혼할 땐 박수치지만

내일부터는 싸움을 붙입니다.

이런 말은 절대 들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괜히 심술을 놓는 것이다.

남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남편에게 덕되는 일 좀 해야 되겠다.

남이 뭐라 그러든, 어머니가 뭐라 그러든 아버지가

뭐라 그러든, 누가 뭐라 그러든

나는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딱 굳혀야 합니다.

괜히 애까지 낳아놓고 나중에 이혼한다고 소란피우지 말고

지금 생각을 딱 굳혀야지, 그렇게 하시겠어요?

덕 봐야돼요? 손해 봐야돼요?

'손해보는 것이 이익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분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성 좀 해야합니다.

이렇게 두 분의 마음이 딱 합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아내의 오장육부가 편안해집니다.

이 오장육부가 편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임신해서 애기를 갖게 될 때 .

편안한데는 편안한 게 인연을 맺어오고,

초조불안하면 초조 불안한게 딱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잉태라고 합니다.

태교가 아니고, 잉태할 때 여자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잉태를 하면 선신을 잉태를 하고,

심보가 안 좋을 때 잉태를 하면 악신을 잉태합니다.

처음에 씨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결혼해 가지고 덕보려고 했는데 손해를 보니까,

심사가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같이 자다보니 애가 생깁니다.

기도하고 정성 다해서 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둘이 좋아 가지고 더부덕덥덥 하다보니까 애기가 생겨버립니다.

그러니 이게 처음부터 태교가 잘못됩니다.

이렇게 잉태해 가지고는 성인 낳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밥 먹고 짜증내고 신경질 내면

나중에 위를 해부해보면 소화가 안되고 그냥 있습니다.

이 자궁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오장육부하고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짜증을 내면 오장육부가 긴장이 되어있습니다.

안에 있는 애기가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선천적으로 신장질환이 생기든지

아이가 불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엄마가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고 원기가 늘 따뜻하게 돌고,

애기가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나중에 태어나도 선척적으로

도인처럼 편안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애를 가진 이는 편안해야합니다.

편안하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편안한 것은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바로 남편의 영향을 받습니다.

남편이 애는 좋은 애를 낳고 싶으면서 아내를 걱정시키면

좋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애를 가졌다고 하면 집에 일찍 들어오고

나쁜 것은 안 보여주고 늘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거들어 줘야합니다.

시어머니들도 손자는 좋은 것을 보고 싶은데

며느리를 볶으면 손자가 나쁜 애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편안하도록 해줘야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편안한 것이 제일 좋고,

주위에서도 이렇게 해줘야합니다.

이렇게 정신이 중요하고 두 번째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합니다.

육식을 조금하고 채식을 많이 하고,

술 담배를 멀리하고 이렇게 해야 애기에게 좋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애기를 낳은 후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둘이서 서로 싸운다면 안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 배우고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말 배우고

일본에서는 일본말 배우고 원숭이 무리에서 자라면

원숭이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아이의 심성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기가 조그만하다고 애기를 옆에 두고 둘이서 짜증내고 다투면

사진 찍듯이 그대로 아기 심성이 결정이 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주정하고 그러면 아이가 나는 크면

절대로 그렇게 안 할거야 하지만 크면 술주정합니다.

다투는 집에서 태어나면 자기는 크면 절대로 다투지 않겠다고

하지만 크면 다투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모방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기를 낳으려면 직장을 다니지 말아요.

아니면 3년은 직장을 그만두어요.

아니면 애기를 업고 직장에 나가든지.

이렇게 해서 아이를 우선적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를 우선적으로 하려면 아이를 낳고 안 그러려면 안 낳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가 복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인생을 망치는 고생덩어리가 됩니다.

애 때문에 평생 고생하고 살게됩니다.

3년까지만 하면 과외 안 시켜도 괜찮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안 하려면 낳지를 말고 낳으려면 반드시 이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좋고 자식도 좋고 세상도 좋습니다.

잘못 애 낳아서 키워놓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첫째 명심하십시오. 가정에서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 제가 신도 분들 많이 만나보면,

애 때문에 시골 살면서 남편 떼어놓고 애 데리고 서울로

이사가는 사람, 애 데리고 미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절대 안됩니다.

두 부부는 애기 세 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적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합니다.

애기는 늘 이차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대학에 떨어지든지 뭘 하든지 신경쓰지 마십시오.

누가 제일 중요하냐, 아내요 남편이 첫째입니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면 무조건 따라가십시요.

돈도 필요없습니다.

학교 몇 번 옮겨도 됩니다.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남편은 아내를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살면

아이들은 전학을 열 번 가도 아무 문제없이 잘삽니다.

그런데 애를 중심으로 놓고 오냐오냐하면서

자꾸 부부가 헤어지고 갈라지면

애는 아무리 잘해줘도 망칩니다.

여기도 그렇게 사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정신차리십시오.

제 얘기를 선물로 받아 가십시오.

이렇게 해야 가정이 중심이 서고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이렇게 먼저 내가 좋고 가정이 화목한 것을 하면서

내가 사는 세상에도 기여해야합니다.

우리만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늘 내 자식만 귀엽게 생각말고

이웃집 아이도 귀엽게 생각하고

내 부모만 좋게 생각하지 말고 이웃집 노인도

좋게 생각하고 이런 마음을 내면

내가 성인이 되고 자식이 좋은 것을 본받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식에게 정성을 쏟으면

반드시 자식이 어긋나고 불효합니다.

그런데 늘 자식보다는 부모를,

첫째가 남편이고 아내고 두 번째는 부모가 돼야

자식이 교육이 똑바로 됩니다.

애를 매를 들고 가르칠 필요없이

내가 늘 부모를 먼저 생각하면 자식이 저절로 됩니다.

그러니까 애를 키우다 나중에 저게 누굴 닮아 그러나 하면 안됩니다.

누굴 닮겠습니까.

둘을 닮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나쁜 인연을 지어서 나쁜 과보를 받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반드시 인연을 잘 지어서 처음에 조금만 노력하면

나중에 평생 편안하게 살수 있습니다.

두 부부는 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해야합니다.

자식을 낳으려면 잉태 할 때와 뱃속에 있을 때,

세 살 때까지가 중요하니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부부가 화합해야합니다.

주로 결혼해서 틈이 생길 때, 애가 생기고

저 남자와 못살겠다 할 때, 애기를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저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가 중학교까지 잘 다니다가 고등학교 가더니 그렇다,

친구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그러니 이미 자녀가 그렇게 되었거든

지금 엎드려서 참회를 하여야 고쳐집니다.

지금 이 부부는 안 낳았으니까 반드시 그렇게 낳아야 합니다.

세 번째 남편을 아내를 서로 우선시 하고 자식을 우선시 하지 않습니다.

첫째가 남편이나 아내를 우선시하고 둘째가 부모를 우선시해야지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부모를 우선시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일단 아내와 남편을 우선시 할 것,

두 번 째 부모를 우선시 할 것,

세 번 째 자식을 우선시 할 것,

이렇게 우선순위를 두어야 집안이 편안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사회의 여러 가지도 함께 기여를 하셔야합니다.

이러면 돈이 없어도 재미가 있고, 비가 새는 집에 살아도 재미가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즐겁자고 사는 거지 괴롭자고 사는 것이 아니니까,

두 부부는 이것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밖에 가서 사업을 해도 사업이 잘되고, 뭐든지 잘됩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개인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생각 고집해서 살면

결혼 안 하느니보다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좋은 이 마음이 죽을 때까지 내생에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따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살지 않아도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승보살의 길입니다.

제가 부주 대신 이렇게 말로 부주를 하니까

두 분이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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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경
네이버웹툰의 (정식연재 전 단계인) 베스트도전에 올라오던 [도사랜드]라는 작품이 정식연재 준비중. 베스트도전 단계에서도 충분히 재밌던 작품이라 기대가 크다. 무당집 이름을 "제네럴보살"로 지어주는 센스는 이 만화가 줄 수 있는 재미의 일부일 뿐!

2011.05.15.경
으앗 네이버웹툰 나이트런이 돌아왔다. 색감은 더욱 선명. 오타와 비문은 그대로인 듯ㅜㅜㅜㅜ. 그래도 기대기대.

2011.05.29.경
다음웹툰 목요연재[스틸레인]-무섭다, 진짜 무섭다. 무서워서 보게 된다(응?;;). / [스틸레인]때문만은 아닌데, 시사/사회적 소재 잘 다룬, 글이나 작품 보다 보면 내가 상식,정보,통계수치 등 "단단한 사실"들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절감하고 만다.

2011.06.12.
전에 '기대되는 웹툰'이라고 멘션 올렸던 [도사랜드]. 다음 웹툰란에서 정식연재 예정(6.13)이라고 공지문이 올라왔다.~~~~~~~~

2011.06.18.
다음 웹툰 [오늘 또 오늘] 월요일에 이미 대장정의 막을 내렸..구나. (때론 냉혹할 정도의)현실성 & 낭만성 & 건전성.. 삼발이 화로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른 감동. 거기에 더해, 수채화같은 색감은 연재 내내 수박 향 같은 상쾌함을 풍긴다.

2011.06.19.
미치도록 웃겨주는 네이버 목요웹툰[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이말년씨리즈와 함께 병맛만화의 쌍벽!!정상적(?)그림체와, 나이트런과는 또다른 화력한 색감을 갖고도 극화가 아닌 병맛!!!일주일의 스트레스 확!!!! 대체 다음 목요일은 언제 오나!!!!!

2011. 10.31
연재중인 네이버웹툰 [신의 탑]. 작가는 색채의 마술사. 정말 아름다운 색을 보여준다. 또 공간감의 묘사에 정말 능하다. 거대함과 극소함을 대비시키는 능력이 실로 대단. 베스트도전(웹툰 전 단계) 연재하다 멈춘 [카니발]도 언젠가 끝을 보고 싶다.

2011. 11. 30
네이버웹툰, 베스트도전 & 다음웹툰, 웹툰리그 연재중인 [카산드라]를 봤다... 일찍 자겠다 맘 먹고 잠시 컴만 켰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정주행. 미칠 듯한 몰입도를 가진 만화. 그리스 신화의 그 카산드라인데.. 일단 함 보시란 말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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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님의 명복을 빕니다.


2011. 9. 5 프레시안 만평 손문상의 그림세상


2011. 9. 8 권범철 데일리노컷뉴스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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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rumee_k(트위터http://twtkr.olleh.com/rumee_k)님과 트윗 덧글잇기를 했다.
책과 술과 담배에 관한 거였는데 간만에 ‘순수한 희열’을 느꼈다. 여기 정리해 둔다.


==========옛날 옛적 트윗에서==========

rumee_k 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시며 왈(曰)

이것은 왜 술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열정은 어떻게 음주가 되었는가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심야 치유 바 (하지현, 심야 치유 식당)
아프니까 술이다 (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알코올이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몇가지 비밀 (신시아 샤피로,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


이에 내가 위로드리고자 백(白)하기를

술뼝을 버서난 술처럼 (박흥용,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안주와 술의 노래 (조지 R. R. 마틴, 얼음과 불의 노래)
은하주당전설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음주 콘서트 (정재승, 과학콘서트)
마신술병 이어서 지구 세바퀴 반 (한비야,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11병이 있다 (하기오 모토, 11인이 있다)
알콜 걸 (댄 킨들런, 알파걸-새로운 여자의 탄생)


이에 rumee_k 님 기뻐하시고, 퇴장 페이크를 시전하시다 돌아오시어 왈

마이 짝퉁 알코올 (고예나, 마이 짝퉁 라이프)
얼음과 양주의 노래 (조지 R. R. 마틴, 얼음과 불의 노래)
폭탄주방정식 (아야츠지 유키토, 살인방정식)
000의 음주 다이어트 (숀 리, 숀리다이어트)
낯익은 술 (황석영, 낯익은 세상)
지금 마시러 갑니다 (이치카와 다쿠지, 지금 만나러 갑니다)
술집으로 튀어 (오쿠다 히데오, 남쪽으로 튀어)
인체알콜 흡수의 밤 (나카지마 라모, 인체모형의 밤)
나는 담배와의 만남을 후회한다 (김정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88만원어치 알콜 세대 (우석훈, 88만원 세대)
서른 술자리는 안끝났다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에 내가 버럭감탄하여 백

논주 (공자, 논어)
음주현대사산책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마실건 있어도 무알콜은 없다 (박노자,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칵테일 라자 (이영도, 드래곤 라자)
알콜섭취 운동사 (한윤형, 안티조선 운동사)


rumee_k 님 더욱 필 받으사 왈

내 술잔에 침을 뱉어라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니 오바이트에 침을 뱉으마 (진중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고든진 (진피즈 리큐르의 브랜드명)
음주오디세이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안주는 주종을 가르고 흡연은 자리를 나눈다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안티조선음주사 (한윤형, 안티조선 운동사)
키보드워리어의 음주일지 (한윤형,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고기를 사랑한 음주덕후 (큰스승,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이렇게 참이슬은 조용히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음주의 힘 (조엘 오스틴, 긍정의 힘)
술크릿 (론다 번, 시크릿)
먼술집이웃편의점 (이원복, 먼나라 이웃나라)


이에 나도 힘겹게 잇기를

술마신 자들 (어슐러 K. 르귄, 빼앗긴 자들)
주신의 왼손 (어슐러 K. 르귄, 어둠의 왼손)
주소유 (법정, 무소유)
조선음주실록 (박시백, 만화 조선왕조실록)
누군가와 마셨어 (배명훈/김보영/박애진, 누군가를 만났어)
멀리가는 술자리 (김보영, 멀리 가는 이야기)
주당과 사상 (강준만, 인물과 사상)
보드카와 비어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제3의 안주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
알콜국부론 (우석훈, 음식국부론)
음주, 술값 및 카드에 관한 일반이론 (존 메이나드 케인즈,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무엇을 마실 것인가 (블라디미르 일리이치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


까지 잇고 나서 취침할 수 있기를 청하니, 님 허하시더라...(헉헉)

※ 마실건 있어도 무알콜은 없다..는 바틸트님(트위터http://twtkr.olleh.com/barTILT)에 대한 경배.
※ 원저의 이름을 몇 개 잘못 알고 있었는데 rumee_k님의 도움을 받아 수정.

==========(이제, 전설이 끝나고 역사가 시작..읭?)==========

맘 같아서야 주간지 술집in 이라든가, 일간지 주향신문, 술겨레신문 이라든가 더 갖다붙이고 싶지만 이래서야 끝이 없으니 ㅎㅎㅎㅎㅎ.
이건 뭐 무한의 주량(사무라 히로아키, 무한의 주인)..도 아니고 ㅎㅎ. 글고 이 트윗들 보다 든 우울(?)한 감상은,

이 모든 패러디를 ‘훗’하며 깔아뭉개는 [음주가무연구소(니노미야 토모코)]님이 보고 계셔...
(콘노 오유키, 마리아님이 보고계셔)
 
...이다. 패러디를 할래야 할 수가 없어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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