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퍼온글

[너너때][노 굿디드] 팜므파탈이란 이런 것...

taichiren 2011. 12. 31. 09:38

<20040124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한탕을 노리는 은행털이범들, 위험한 음모를 가슴에 품고 있는 매혹적인 여인, 인질이 된 채 탈출을 계획하는 경찰관. 거미줄처럼 얽힌 그들의 관계는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속으로 치닫는다. 과연 승자는 누구인가?"

그동안 여기저기서 영화를 봐왔지만 이 영화처럼 인터넷에서 자료구해보기 어려운 영화도 참 오래간만이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자료중에 대강의 스토리란 것이 이것이다. 어이가 없다. 게다가 장르 구분을 보면 드라마/범죄/스릴러다. 그런데 점혀 드라마스럽지 않고, 범죄스럽지 않으며, 스릴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참 애매한 영화다. 오히려 나보고 분류를 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팜므파탈'영화, 그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팜므파탈'영화라고.

실제로 영화속의 '거미줄처럼 얽힌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단단하게 얽힌 것이 아니다. 은행털이범들은 은행원과 공모하여 아주 손쉽게 은행을 턴다. '인질이 된 채 탈출을 계획하는 경찰관'역시 별 문제없이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은행털이범들은 또 자기네들끼리 이리저리 티격태격하다 하나둘 죽어 나간다. 그 모든 죽음과 주저함의 정점에 바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밀라 요보비치' 즉, 팜므파탈이 자리하고 있다.

그 녀는 현실에서 자기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남자를 매혹시키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영화속 모든 남성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몰아가는데 성공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결말을 이끌어 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속 밀라 요보비치가 보여주는 팜므파탈로서의 능력이 다른 영화에서 보이는 마녀나 가지고 있을 법한 카리스마넘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영화속에서 그 녀에겐 별다른 선택권한이 없다. 실제로 영화의 모든 갈등장면에서 그 녀는 결코 아무런 선택도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와 관련된 모든 남자들에게 자신은 적이 아니라 동지, 나아가 절대적인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연인관계임을 믿게 만든다. 그 결과는 은행털이범들이 모든 같은 목적을 위해 움직이면서도 서로 다른 꿍꿍이를 품게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경찰관으로 나오는 사무엘 잭슨조차도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녀의 그런 행동에 의심반 믿음반이란 태도를 견지하게 만든다.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다른 영화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 이것이다. 때로 에로와 스릴러를 짬뽕시켜놓은 몇몇 B급 비디오물에서 이런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현실에서 실행가능한 여성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팜므파탈은 오히려 잘 만들어졌다는 영화에서 더 보기 힘들다. 어찌 보면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현실과 괴리된 인물을 만들어낸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밀라 요보비치는 인물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만한 결정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물들의 삶을 비극으로 이끌어 간다. 심지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녀는 선택하라는 경찰관의 요구에 은행털이범 두목을 선택한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그 녀는 은행털이범 두목모르게 경찰관에게 권총을 건네준다. 쉽게 설명하자면 자기는 책임을 질만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음으로 해서 양다리를 걸쳐놓고 '이기는 편이 내편'이란 대단히 여유로우며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한다. 비록 그 행동의 결과가 자신의 일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무책임한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말하자면 현실속의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처한 갈등관계에서 이런 행동패턴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많은 여성들이 어려운 갈등과 선택의 순간에 책임질만한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거나 심지어 도망쳐 버리기까지 한다는 말이다. 주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책임을 질 필요도 없고 그저 묻어가면 된다는 식이다. 물론 그런 행동패턴이 여성들만의 고유한 방식이란 말은 아니다. 게다가 그런 행동패턴이 나오게 된 원인이 비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강요된 오래된 사회적 관습의 결과물이란 점에 대해서도 난 분명하게 동의해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덧붙이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지금 현재 여성들이 보이는 비주체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변명은 결코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여성들 스스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불평등하고 부당하다고 느낀다면 그에 대해 말하는 동시에 책임을 지는 모습도 동시에 보여줘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밀라 요보비치가 보여준 팜므파탈의 모습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현실적이다. 그리고 경찰관으로 분한 사무엘 잭슨은 그런 애매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를 잘 보여준다.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는 경찰관이고 그 녀는 은행털이범의 일원이다. 그러니 체포하면 된다. 그 녀가 그에게 어떠한 행동이나 말로 일반적인 친밀감을 넘어선 호감을 갖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드라마/범죄/스릴러 영화가 아니라 새롭고 신선한 방식으로 변주된 연애/심리영화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드라마는 긴박감이 없고, 캐릭터는 붕 떠있는 별로 볼 것없는 이 영화를 그래도 그럭저럭 이끌어 가는 것은 밀라 요보비치와 사무엘 잭슨이고, 영화 내내 이 둘만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