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살았던 오늘, 김형민, 2012, 웅진지식하우스

 

인터넷 세상(블로그 트위터 등)에서 산하라는 이름으로 이미 꽤 알려져 있는 김형민 님이 쓰신 ‘몇 월 몇 일자 오늘의 역사’ 형식의 역사 이야기책. ‘오역’이란 말은, 다른 의미도 머리말에 설명되어 있지만, 오늘의 역사의 줄임말이다.

길이가 짧은 글들의 묶음이라 한 부분씩 끊어 읽기가 가능한 책인데... 시간 여유가 조금만 있어도 자꾸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마성의 작품’이다.

 

필자 생각에 책의 장점은 크게 네 가지.

(유명 사건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좀 더 알게 되는 이른바 ‘잔재미’는 기본이다.)

 

우선 다른 평가 다 떠나서 내용이 재미있다. 저자를 아는 사람들 대개가 칭찬하는 그 필력 덕분이리라.

예를 들어 독일 나치의 분서를 다루면서, 불타오른 책의 지은이 중 하나인 하이네의 말 “책을 불사르는 곳에서는 마지막에 인간까지도 태울 것이다.”에 덧붙인 저자의 감상한 마디는, 특이한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공감으로 필자의 가슴을 쳤다. 이하 필자의 이런 예시들은 ‘빙산의 일각’일 따름임을 분명히 밝혀 둔다.

둘째로 역사라는 무대에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바로 옆 그림자 속에 묻힌 인물과 그의 행적을 알아가는 흥미가 쏠쏠하다.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유이한’ 두 대표 중 만해 한용운에 비해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일이 적은 나머지 한 사람을 다룬 2월 24일자 오역, 저자가 훌륭하기 첫째로 손꼽는 한국의 영부인을 다룬 11월 24일자 오역, (오역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 손기정의 이야기에 함께 등장하는 마라톤 동메달리스트에 대한 안타까움 섞인 서술 등이 그러하다.

셋째로 우리가 무심코 인용하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들의 기원을 알 수 있어 좋다. “여럿이 함께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됩니다.”와 같은 따뜻한 명언이 누구의 발언이었는지(8월 27일 오역) 등등.

넷째 종횡사해 전 세계 곳곳의 유명사건들이라는 ‘역사의 우물’에서 재미와 의미를 가득 길어올리고 있기도 하지만, 한국 현대사 상의 인물이나 사건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어 독자 입장에서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된다. 1월 1일과, 다시 보아도 다시 가슴이 아플, 너무나 아플 9일자 오역에서부터, 역시 분노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12월 30일자 오역까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자의 ‘세상 일들’에 대한 입장은 (필자가 보기에는) ‘딱히 또렷한 보수도 진보도 아닌 것 같지만 진보 쪽으로 아주 약간’ 정도.

자신의 입장을 모호하게 숨기고 좋은 얘기들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을 필자와 같은 게으른 사람들보다는 ‘좀더’ 알아내려 애썼고 알고 있기에, 저자는 쉽게(?) 한쪽 편을 ‘닥치고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입장을 소리 높여 일방적으로 외쳐 대는 것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2월 29일과 3월 28일자 오역은, 사회적 약자들이나 국가/사회의 개선에 힘을 쏟은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보다는 더’ 동정적이고 호의적인 저자가 그런 동정이나 호의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오역들. 심지어 4월 21일 오역에서는 그런 동정이나 호의를 품은 대상에 대해서조차 잘못되었다 여기는 것에 대해선 잘못이라 말할 줄 아는 ‘균형감각’을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풍부한 감성을 곳곳에서 잘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감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3월 4일자 오역의 비극적인 사건에서도, 흔히들 상상하기 쉬운, ‘사람이 남아 있다’고 주장한 화재 피해자를 추궁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트위터에서 우연히 접한 글 덕분에 실제론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저자가 이를 몰랐을 것 같진 않다.)

 

 

 

다소 다른 얘기를 덧붙이자면, 역사를 읽는 의미를, 필자 생각으로는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를 음미하는 것이 하나.

역사로부터 어떤 의미(교훈이란 말은 좀 꼰대스럽...다)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또 하나.

감히 판단하기에 [산하의 오역]은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좋은 글로 가득한데 아주 약간은 더 둘째 의미에 기울어 있다.

그러나 첫째 의미로도 충분히 주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할 만하다 본다. 이 책은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읽힐 만하다.

 

마지막으로 책에 부치는 소망을 밝힌다.

이 책이 예상보다는 덜 팔린다고 들었는데 좀더 많이 많이 팔리기를. 이왕이면 자신의 책이 너무 잘 팔려 부자가 되자 괴로웠다는 공산주의자 잭 런던의 에피소드만큼이나 저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대박’이 났으면.

그리고 잘 팔려서 2권 혹은 개정증보판이 나오기를.

97~98 ‘노약자과 부녀자’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보이지 않는 자잘한 오타(필자가 발견 못한 다른 오타나 비문 등도 만약 있다면 함께)와, 7월 28일자 오역의 제목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같은 다소 심각(?)한 오류도 함께 수정해서 말이다.

책이 365일 모두를 오역으로 채우고 있진 못하고 어떤 날짜들은 매우 간략한 사건 설명으로 ‘넘어가’기도 하는데 이왕이면 365일을 꽉꽉 채워 주었으면 한다. 넘어간 날들만 모아 2권이 나오거나, 아니면 365일 모두를 다룬 증보판이 나오거나.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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