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222 우리모두

내가 1학년 때부터 줄곧 발을 들여놓고 있는 '태극권연구회'라는 
대학 동아리에는, 지금은 전보다 드물게 오시지만, 한때 많은 후배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수련이 엄청나게 깊은 81학번 선배가 있다.

그 선배는 고시를 준비중인데 그러다 보니 고시생 중에 건강에 관심 있는
다른 고시생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 중에는 같은 단과대의 선배인 79학번 선배님도 있었다.

내가 군대 있어서 알지 못하던 3년 여 전부터 그 선배님은 매우 맹렬하게 연습을
해 왔고 이제는 태극권의 사부인 81학번 선배에게
혼자 수련해도 되겠다......는 평까지 받았다고 한다.(혼자 하는 거 위험하다)

난 연수로는 5년 가까이 동아리에 들락날락 하고 있지만 늘 수련에는 게을렀기
때문에 잘 안다. 그만큼의 경지까지, 그것도 몸이 굳어가는 그 나이에 시작하여
그만큼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 무서울 정도의 노력과 집념을 잘 알긴 하지만
내가 제대해서 만나 온 선배님의 모습은 잘 웃고, 잘 이야기하는...
호인 풍의 모습 뿐이었다.

그런데 어제 나는 선배님을 따라 우리 동아리에서 수련터로 애용하는,
사람의 왕래가 적은 편인 풀밭으로 갔다. 선배님의 모습을 보고
배우려는 생각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선배님의 '바로 그 표정'을 보게 되었다.

그 분은 태극권의 투로
(태권도의 품새 같은 것. 공방의 동작을 순서대로 연결해 놓은 것)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정말 멋진 모습이었다.

방탕한 생활로 몸을 혹사하기 쉬운 20대 젊은이보다 오히려 활기 넘치는 몸놀림,
단정하고 유연하며 힘이 느껴지는 다리의 움직임,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들어가야 할 것이 모두 있는, 한마디로 깨끗한 동작들.

언제 봐도 감탄스런 모습이다. (당연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비록 찬탄을 거듭해도 모자람이 없을 그 모습이지만, 자주 보던 것이었다.
어제, 정작 그때까지는 보지 못하다가 보고 놀란 것은 선배님의 얼굴이었다.

언제나 웃음을 띠던, 아니면 웃음까진 아니더라도 온화한 분위기를 주위의
공기에 흘려보내던 선배의 얼굴은 참으로 엄격하고
매섭기까지 했다. 심약한 내가 순간 움츠러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내가 겁먹을 필요는, 냉정하게 따지자면, 없다.
그 엄격하고 매서운 표정은 남이 아니라 선배님 자신에게 향한 것일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투로를 펼치는 바로 그 때만은 자신을 대하는 선배님의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난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81학번 선배가 말한 적이 있다. 수련하는 모습을 잘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얼마나 귀한 순간인가.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짓는 표정을,
그것도 참으로 본받고 싶은 표정을 볼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소중한 배움의 시간이었을 뿐더러 또다른 의문을 가지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과연 나는 나에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당장은 남들에게 보여드리기 부끄러운 표정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문들.
과연 나는 내가 지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의 바로 그 표정을 보았던가?
나는 그들이 안심하고 그 표정을 보여 줄 만큼의 신뢰를 심어주었던가?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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