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911 우리모두 먹방 / 진보누리 누리까페



대구광역시 서구청 맞은편에는 신평리 아파트로 들어가는, 남쪽으로 뻗은 길이 있다.
 서구청 쪽에서 볼 때를 기준으로 그 길 왼쪽에는 또 하나의, 신평리 아파트 들어가는 길과 평행하게 난 길이 있다.
이 길의 대부분은 신평리시장이다.
신평리 아파트는 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져 동들이 늘어서 있고,
그 중 한쪽(서구청 기준으로 왼쪽) 동들에 시장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국민학교 시절을 잠깐을 제외하고 신평리 아파트에서 살았고, 신평리시장은 어머니를 따라 장보러 가는 시장이었다. 가끔 '마음먹고' 대구백화점이나 동아백화점, 동아쇼핑에 쇼핑하러 가는 날은 제외하고 말이다.
길게 뻗은 그 길 중간 즈음에 아파트 쪽으로 난 문이 있다. 다른 샛길도 있지만 대개는 이 문을 지나 시장에 들어섰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아다니면서 어머니와 함께 장본 것들을들고 다녔다.
길 양쪽에 가게며 좌판이 즐비했고, 웬지 바닥은... 늘 축축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축축해서 기분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축축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곳곳에 어머니가 가는 단골 가게들이 있었다. 그리고 활기찬 이미지 - 시끄럽다는 생각은, 이상할 정도로 지금에 와서도 들지 않는다. 활기찬 곳. 상인들이(아저씨 아줌마들이) 웃으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좁은 길을 리어카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옆으로 비켜서서 가게나 좌판에 쫙 달라붙어야 하는 곳. 참 다들 신기하게도 잘도 비켜서던 기억.


당연히 시장이니까, 먹을 것이 많았다. 주로 사는 것도 음식들이었고.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왼쪽으로(즉 서구청 쪽으로) 돌아서면 핫도그 집이 있다.
왼쪽으로는 가게며 좌판이 많지 않았다. 태반은 문에서 오른쪽 그러니까 남쪽에 가게며 좌판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장도 주로는 그쪽에서 보곤 했다.

핫도그 집
집이라기보단 가게다. - 리어카에 튀김기름이 펄펄 끓고 있고 거기서 갓 나온 핫도그에다 설탕과 케첩을 뿌려 먹는 것이다. 시장 가면 어머니께 제일 자주 사 달라며 달라붙었던 군것질거리이다. 지금은 길다란 핫도그가 더 많지만 당시 그곳 핫도그는 동그란 쪽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쑥떡
문 오른쪽의 어딘가에 좌판이 있었다. 양푼에 쑥떡이 콩고물 묻혀 가득 담겨 있었다.
아주머니가 쑥떡을 썰어 비닐에 담아 넘겨 주면, 무게가 가벼운 탓에 대개는 내가 들곤 했다. 얼른 집에 가서 쑥떡을 먹어야지...... 가끔은 설탕을 묻혀 먹기도 했다.
신평리사장의 추억 때문인지 지금도 떡 중에선 쑥떡에 가장 눈길이 가고 맛도 좋다고 느낀다.

칼국수
검고 주름진 얼굴의, 여위고 몸집이 작고 키도 작은 아주머니가 밀가루를 반죽하고 방망이 굴려 반죽을 납작하게 만들고 그 담엔 기계가 무색한 정확도로 썰어서 납작하고 폭이 약간 있는 국수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집에 오면, 멸치 국물을 끓이고 간장에 파 썰어 넣은 양념을 준비하는 등 어머니의 수고를 더해 일품 칼국수가 되는 것이다. 아......!
그런데, 돌이켜보면 늘 나는 그분이 피곤에 절어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왜일까.

빵집
다른 빵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내가 가는 빵집은 늘 한 군데였다.
어두운 점포 안에 빵이 언제나 한가득. 나는 신기하게 둘러보곤 했다.
옥수수 식빵을 많이 먹었다. 건포도가 박힌 옥수수 식빵은 '굿'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고로케다. 지금도 '크로켓'이란 말이 입에 잘 안 붙는다. 고로케다.
이 빵집에서 파는 고로케는 속도 알차고 맛이 무척이나 좋았다. 핫도그보다 고로케가 더 좋아졌다. 정말 '열심히' 먹었다고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고로케보다는 덜 자주 먹은 냉동고로케도 있었다! 쇼핑가서 사와서는,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구워서(튀겨서?) 먹었다.
지금 서울에서 살면서 도무지 맘에 안 드는 것이 이 고로케다. 여러 빵집서 먹어 봤는데, 맛은 둘째치고 기름기가 너무 많다. 내 혀가 잘못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단코, 그 빵집의 고로케는 요즘 먹는 것들처럼 기름기가 많지 않았다. 어쩌면 빵집 주인 아줌마는 제빵업계의 숨은 실력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인은 자신을 숨긴다'더니.
아, 냉동고로케도 어릴 때 먹은 그놈이 정말 맛있었다. 완두콩 같은 것이 큼직하게 들어 있는 두꺼운 놈이다. 그놈과 비교하면 요즘의 냉동고로케라는 '얍실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꿩대신 닭이라고 그거라도 먹고는 있지만 매번 먹을 때마다 슬퍼질 정도로 옛날 그놈이 생각난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슬퍼진다.
(회사가 도투락인가 그랬을 것이다. 어느 날 망했고, 더이상 그 걸작 냉동고로케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근조.)
할란 엘리슨이라는 좋은 SF작가가 쓴 <다섯 살바기 제프티>
(정말이지 슬픔이 돋아나는, 기억에 남는 단편이다. 한국에는 고려원 <세계 SF 걸작선>에 수록되어 있다.)
에도 지나갓 옛것이 더 좋았다는 얘기를 주인공이 하고 있다.
 냉동고로케에 관한 한, <다섯 살바기 제프티>에서 읽은 그 얘기는 정확하다.

참기름집
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진행방향 왼쪽(즉 동쪽)으로 시장을 지나 다른 동네로 이어지는 길이 두어 개 있다. 큰 길 옆에 어두컴컴한 작은 길이 있다. 그 작은 길가엔 자주 가는 가게 둘이 있다. 참기름집과 분식집이다.
참기름집엘 가면, 방아인지 아님 뭐라고 불러야 될 지 모를 기계가 웅웅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누런 불빛이 비치는 그 어두운 곳에선 늘 고소한 냄새가 나고 있다. 갓 만든, 어쩔 수 없이 냄새가 솔솔 새어 나오는 참기름을 모양으로 봐선 - 짐작이 맞다면 상표를 깨끗이 뗀 - 소주병 모양의 옅은 푸른 빛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주는 것이다. 그 거무스름한 참기름의 색조를 보면 침을 꿀꺽 삼키곤 했다. 이 참기름은 이를테면 칼국수 간장 양념 같은 것들에 들어갔겠지.

지금은 이름이 기억 안 나는 분식집
참기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식집이 있었다. 만두며 우동 같은 것을 만들어 파는 점포였다.
근데 이 집을 기억하는 건 그 음식들보단 돈까스 때문이다.
처음부터는 아니었고 내가 그 집을 알게 되고 짧지 않은(그렇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 돈까스를 메뉴에 추가시키 것이다.
아마 그 돈까스가 내가 처음 먹은 돈까스였을 것이다. 분식점 수준의 간단한 경양식을 처음 접했다고나 할까.
아마 우리 가족 네 사람이 모두 우루루 몰려가서는 처음으로 돈까스라는 것을 먹었던 듯하다.
신기했다. 칼을 들고 포크에다......정녕 신기했다.
창칼로 식사를 하는 야만스런 양놈들...이라는 어머니의 우스갯소리는 거진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박혀 있다. 하하하.


아가씨
어머니는 실제 나이보다 젊어/어려 보이셨다. 날씬하기도 하셨고.
간혹 시장에서 어머니 등뒤로 리어카를 몰고 오는 아저씨들이 "아가씨, 좀 비켜 주세요."라며 어머니에게 길 양보를 청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와 나는 낄낄대며 기뻐하고, 우스워하곤 했던 것이다.



신평리 시장은 내 어린 시절 먹거리의 대부분을 사다 먹은 곳이며, 내가 참으로 자주(국민학교 저학년 땐 거의 매일) 가서 어머니의 장보기를 도운 곳이었다.
오후 - 돌아가면 가족들이 모이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기에 딱 맞는 타이밍(당연한 얘기겠지만 어머니의 타이밍은 '신기'였다.)에 언제나 어머니를 따라 갔던 그곳.

신평리시장에서 경험한, 그리고 그 경험을 가지고 상상할 수 있는 먹거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먹거리는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은 심리적으로 낯설다 - 맛이 있고 없고와는 별개로 말이다.
좋든 나쁘든(그러고 보니 나빴던 게 별로 없다.)
먹는 것에 대한 내 대부분의 기억들의 '원형질'은 그곳, 신평리시장에서 만들어졌고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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