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13 우리모두에 올리신 글>
1.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영화다. 마치 영화 '챔피언'에서처럼 돌아보면 보잘것 없고 촌스럽게만 느껴지던 그 시절도 사람들이 살았고, 서로 사랑했고, 열심히 살았다는 그런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이라면 과거가 선명한 칼라로, 현재가 흑백의 모노톤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간 우리가 영화에 대해 갖고 있던 버릇을 거스르는 방식이다. 우리에겐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칼라가 흑백으로 변하는 상황이 익숙하지 그 반대는 어색하다. 게다가 이 영화의 감독은 그 유명한 장이모 감독이다.
장이모 감독의 전작들을 모두 섭렵하지 않고, 그저 '영웅'만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색감에 공을 들이는 감독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영웅'은 한 사건에 대해 다수의 화자와 관점을 도입하는 수법(원래 일본의 어느 소설에서 유래한 것인데 불행히도 그 소설의 제목이 떠오르질 않는다)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한 영화다. 그런데 그 과하다 싶은 원색사용도 처음만 눈에 거슬릴 뿐 금방 익숙해진다. 즉 웃도리 하나만 촌스러운 것을 입으면 아무리 봐도 어설프지만 아예 머리에서 발끝까지 촌스러움으로 둘러 감으면 금방 익숙해지는 그런 이치다.
그렇다고 그런 원색의 사용이 장이모 감독의 원래 스타일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장이모 감독이 애용하는 원색은 사실 붉은 색 하나뿐이다. 그나마도 인위적인 색은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붉은 수수밭'만 해도 영화전체를 휘어감았던 색은 붉은 색보다는 오히려 황톳빛에 가까운 색이었다. 이런 경향은 '국두'와 '홍등'까지 이어진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인위적 장치들과 색깔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귀주 이야기'를 거쳐 '집으로 가는 길'에 이르면 전작들에서 보이던 원색들마저 거의 자취를 감춘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달리 '영웅'에선 원색들이 떼로 등장하는 걸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영웅'은 그가 각본하시고 감독하시며 제작까지 한 영화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만들기만 하면 되던 감독이 아니라 감독뿐만 아니라 흥행까지도 신경을 써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번째는 그의 이전 전작들과는 달리 '영웅'은 그야말로 상상속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원래의 스타일보다 좀 더 오버해도 될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처럼 장이모의 영화에선 색깔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그런 그가 영화관습과는 달리 과거를 칼라로, 현재를 흑백으로 표현했을 때는 그 의미가 사뭇 크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촌스럽고 유치하지만 나름대로 순수했던(혹은 맹목적이었던) 사랑이란 것이 남아 있었던 그 옛날이, 이거저거 잴만큼 재보고 따질만큼 따진 후에야 거래(?)를 성사시키는 요즘의 그런 것보다 더 인간적이고 보기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영화다. 중국의 어느 동네에서 훈장질하던 선상 하나가 밥숟갈을 놓으셨는데 도시사는 그 훈장의 아들되는 양반이 부음에 접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장례식을 놓고 어머니와 이차저차 의견차이를 보이다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촌스럽고 우악스럽다시피한 러브 스토리를 듣고 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하여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가 아니라 산길과 고갯길을 넘어넘어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온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리고 그 길은 그 옛날 어머니가 꼭 돌아오겠다던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바로 그 길이기도 하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이거 절대로 그렇고 그런 영화는 아니다. 요즘 우리네 러브로망처럼 별스러운 설정 하나없다. 게다가 여성이나 남성이 상대방 성에게 바라는 일종의 환타지같은 것조차 하나 보이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요즘 우리네 영화판에서 나름대로 사랑이란 주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흥행을 위해서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갖추고 있어야 할 두 가지 덕목(?)들중 단 한개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사랑영화'가 된다. 그것도 꽤나 잘 만들어진 영화로 말이다. 진실로 이런 곳에서 내공의 차이란 것이 느껴진다.
3.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영화다. 그렇다. 단순한 사랑영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머리는 거기서 멈추질 않는다. 이건 온전히 내 관점의 문제이며, 일종의 장님이 코끼리 다리만지는 이야기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중국엔 이른바 '하방운동'이란 것이 있었다. 도시의 엘리트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 일정 기간을 살게 함으로써 도농간의 격차를 줄이고 상호 이해를 넒힘과 동시에 향후 중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엘리트들로 하여금 중국의 현실에 대해서 좀 더 넓고 깊게 알도록 만들려는 일종의 중국판 '민중속으로'였던 셈이다. 단 이 운동은 정부의 주도하에 시행되었다는 치명적인 약점때문에 당시엔 그다지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 했다. 그렇다고 그 의미까지 퇴색된 것은 아니다. 물론 이 운동의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권력암투가 깔려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긴 명분없는 싸움이란 없는 법이고 명분만 타당하다면야 발생원인이 어찌 되었든 그 운동의 의미까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니까 크게 신경쓸 일은 못 된다. 특히 '귀주 이야기'에서 보여진 것처럼 권력층이 형식적이 된다고 해서 민중들까지 형식적이 되는 것은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이것이다. 중국의 '하방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 중국의 엘리트들이 민중들의 요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저 계도하려고만 했지 민중들의 삶과 관점, 가치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풀기 힘든 문제중의 하나다. 그래서 엘리트들은 엘리트들대로, 민중들은 민중대로 서로에게 실망하고 각자의 길로 무관심하게 매진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이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선 약속이 지켜진다. 도시로 갔던 선생은 약속했던 것보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또 바로 이 지점에서 내 나라를 돌아본다. 진보든 보수든 과연 얼마나 약속을 지켰을까? 이루기 힘든 일을 잠깐의 주저함도 없이 함부로 약속해 버리지는 않았을까? 명분과 당위만 앞세우면서 말이다. 그 의문의 끝에서 내 결론은 어디를 봐도 그저 막막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들은 과연 알고나 있는 것일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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