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조선 인터넷 싸이트 우리모두의 묻고답하기 게시판에 올라온 한 네티즌의 질문에 대한 솔바람 님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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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님, 안녕하세요? 이리 글을 나누게 되어 기쁘네요.
저는 조서닐보(저는 이리 표현합니다)가 ‘문제 있다’고 인식하게 된 지 1998년 10월(keyword : 최장집)부터 시작하여 이제 3년 남짓되었지만,
왜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안티조선’이 정당화 될 수 있는지 짧은 글로 풀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내공이 딸린다고 표현하지요.
다만 초급 수준의 인식을 제공하고자 이 글을 시작합니다.

저는 님께서 조서닐보에 대해 현재 어떤 경로로 어떤 인식을 갖고 계시는지 당연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혀 관심이 없거나 경로를 가질 기회가 없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정도의 초급 인식에 도달되지 않은 단계를 기준으로
이 게시물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그 경우 제 경험상 만나서 이야기하면 평균 세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기에, 게시판 글은 보는 이가 스스로 확장할 수 있도록 keyword를 중간중간에 넣고 상세는 생략하겠습니다.

1. ‘열린 사회’란?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가?>
<아냐, 최악을 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keyword :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칼 포퍼, 파시즘, 전체주의)

조서닐보 문제를 논하는데 웬 ‘열린 사회’? 느닷없을 터입니다. 제가 인식하게 된 경로에 이 개념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에 이리 시작하는 것이구요, 어디서 시작하든 연결은 되리라 봅니다.
이래저래, 이 글은 무지 길 것입니다. 옛 이야기 듣는 기분으로 읽더라도 때때로 참조될 구석이 있다면 좋겠네요.

조국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군화발굽에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고, 칼 R 포퍼는
나치즘, 파시즘의 근원을 규명하고 비판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에서 출판한 책이 <열린 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 and its Enemies), 1945>
이고, 역사주의, 전체주의에 대한 탁월한 비판서라는 평을 받는다고 하는군요.

포퍼가 찾아 낸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시조는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가?”는 질문을 중심으로 답을 작성해 나갑니다. 요지는, 변증법에 능통한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사회, 그것이 플라톤이 제시한 유토피아, 이상향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전제는 ‘오류가 없는 지도자’였습니다. 항상 적중되는 직관을 지닌 신과도 같은 ‘영도자’가 있다면, 매우 효율적인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사회는 철학자 왕, 수호자, 전사, 인간 가축의 네 계급으로 이루어집니다. 상위 세 계급이 의사결정과 체제 수호를 담당한다면, 하위 농경, 상업, 공업에 종사하는 ‘인간 가축’이 체제의 물적 토대를 이루는 손발이 됩니다.
당연히 이 사회에서는 토론이 불필요합니다.

즉, ‘지도자’가 방향을 결정하면, 아래 계급은 시키는대로 자신이 맡은 기능에 충실하기만 하면 됩니다. 군더더기 없이 신속한 의사 결정, 인적자원 효용 극대화 따위 장점만 있게 되지요.
그 전제가 ‘똑똑한 지도자’이기에, 플라톤은 이 체제의 핵심인 철학자를 양성하는 방법에 상당 부분을 할애합니다.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 엘리트 자질을 가진 애를 선별해내는 방법, 교육 과정, 자격 시험, 철인으로 등록되는 최소 연령 따위.

1차 대전에 패하여 도저히 앞이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의 독일 사회에 등장하여 플라톤의 유토피아를 충실히 체현한 것이 히틀러의 나치 체제입니다. 소수 엘리트가 이끄는 사회, 군중의 열화와 같은 지지.
전제에 충실하기 위해 ‘영도자’를 신의 수준으로 끌어 올립니다. 다중의 미덕은 튼튼한 신체이고 여성의 미덕은 조직의 인적 자원 확보를 위해 아기를 잘 낳는 것이 됩니다.

엘리트 집단이 이끄는 대중은 선택 받은 백성이 됩니다.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노력과 더불어 체제 단결을 위한 희생양이 채택됩니다. 민족주의가 민족우월주의, 민족 팽창주의로 귀결된다는 사례를 인류에게 남기지요. 이 과정에서 체제 유지를 위해 끊임 없고 광범위한 대중 조작이 필수적으로 행해집니다. (keyword : 괴벨스)

포퍼는 인류가 배울 교훈을 여기서 찾습니다. 즉, 그 전지전능하다고 믿어져온 ‘영도자’ 또는 엘리트 집단이 맛이 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히틀러와 그 집단이 생생한 사례가 되거든요.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이 체제는 재앙이 되지요. 자신만 파멸하면 낫겠지만 따르는 집단, 주변국 백성들을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맞는 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포퍼는 ‘인간의 이성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명제를
찾아내고, 아테네 민주주의의 시조인 페리클레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서 다시 시작하며 묻습니다. 즉,
“우리는 최악을 면하기 위하여 어떻게 정치 체제를 조직할 것인가?”

긴 사유 끝에 포퍼가 도달한 체제는, 누구나 사회의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체제였습니다.
개체가 체제 비판을 해도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사회, 어떤 권력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그래서 구성원들끼리 갑론을박 치고 받아 조직의 의사 결정에 반영될 수 있다면,
최악은 면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런 사회를 그는 ‘열린 사회’라 이름한 것이지요. 유토피아가 구조적으로 불능이라면, 이것이 차선이 됩니다.

포퍼가 이렇게 점진적 사회 개조를 주장한 반면, 구조적으로 열린 사회가 되기 어려운 사회라면 답이 여전히 안 나오는 측면이 있습니다. 1960년대 하버마스와 벌였던 논쟁이 유명하다고 하는군요. (keyword : 위르겐 하버마스, 이성적 사회, 의사 소통)

어쨌든, 대립되는 개념인 ‘닫힌 사회’는, 인류가 수도 없이 많은 사례를 갖고 있습니다. 체제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을 조금이라도 하면 몸이 성할 수 없는, 당장 불이익이 오는 사회지요. 중세의 교황 체제는 물론이고, 대한민국만 해도 조선시대에 왕정체제, 일제시대, 유신 정권, 전두환 정권 따위. 닫힌 사회는 대개 전체주의의 속성을 갖습니다.

전체주의에서 개인 하나하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도구가 되지요. “대를 위해서 소는 희생되어도 좋다”고 멀쩡하게 이야기하는 이 지금도 많습니다. 소수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되고 집단주의, 획일주의가 특질이 되지요.

닫힌 사회가 정당화되는 조직도 있습니다. 기능상 전시 체제의 군대 조직이 그것이지요. 병사들끼리 토론해서 전투 방침을 건의하고 장교가 검토한다면, 이거 비효율적입니다. 빳빳한 상명하복, 까라면 까라, 사병이 똑똑하면 군대가 안돌아간다는 이야기의 근거가 됩니다. 그저 엘리트집단이 의사 결정하면 사병은 기능에 충실하는 것이 미덕이지요.

그 효율성을 높이 사서 사회 모든 분야에 군대 체제를 도입한 것이 군국전체주의입니다. 전 사회의 병영화, 일본 군국주의를 차별 없이 적용한 동네가 박정희 정권이었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20세기의 대부분 90여 년 간을 군국전체주의로 일관한 곳입니다. 그에 대립되는 열린 사회, 그 주요한 도구인 토론은 불필요할 뿐더러 일신의 화를 초래하는 물건이었습니다.

재벌 그룹 대우와 현대의 해체, 몰락도 이 측면으로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제왕적 의사결정자인 그룹 총수는 신과 동격이었다는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차선을 찾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 이르기 위한 토론시스템은 기능하지 않았던 게지요. 님이나 어르신의 말씀을 감히 비판하거나 거스르면 당장 밥줄이 끊어지는, 이 사회에 권위주의가 뿌리 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리 길게 쓴 이유는, 조서닐보가 닫힌 사회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는 경로는 무수히 많겠지만, 그 신문의 속성, 이력, 현재의 능력을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고구마 줄기마냥 줄줄이 딸려 나옵니다.

2. 조서닐보가 꿈 꾸는 세상

어떤 절대 권력도 절대 부패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권을 비판하는 기능을 하는 곳이 언론이구요.
정권과 언론이 밀월관계가 되어 서로 봐주면 죽어나는 것은 국민이지요. 그 언론이 맛이 간다면 어떻게 하나요? 그래서 언론을 비판하는 세력이필요하게 됩니다.
근데 그걸 정치권은 못합니다. 신세 망치려고? 적어도 이 한국사회는 그래 왔습니다.

따라서 시민단체가 언론을 비판해야 하는데, 시민단체 다수도 언론의 눈치를 보나 봅니다. 언론은 무소불위의 성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적어도 2년 전까지는. 그래서 언론 끼리의 비판, 언론사 내부에서 일어나는 비판의 존재가 절실했었지요.
근데 원체 오랫동안 닫힌 사회에서 살다 보니, 그거 힘든가 봅니다. 언론사의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이는 소유주거든요. 그러기에 ‘족벌 언론’이란 표현이 쓰이고 있습니다.

님께서 참여하실 토론에서 반드시 나올 ‘안티조선의 부당성’을 설명할 논리는
“왜 하필 조서닐보인가?” 이거 정권을 비판하기에 꽤심죄가 적용된 것 아닌가? 따라서 안티조선에 참여하는 이는 현 정권의 나팔수 또는 홍위병일 것이다,
일 겁니다.

여기에 대한 반론은, 언론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조서닐보는 언론이다, 따라서 조서닐보는 비판의 대상이다, 다른 언론도 문제가 많지만 조서닐보는 특히 연구 대상이다, 왜? 아래와 같다, 는 구조를 가지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정권에 대한 비판, 그리고 ‘할 말은 하는 신문’ 매우 바람직하지요. 근데 그것이 사실에 기초했느냐, 어떤 의도이냐를 포함해서 그 경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비교적 합리적인 판단에 도달할 수 있지요. 근데 이 설명이 무지무지 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드러난 부분만 씁니다. 이것 역시 ‘딱지 붙이기’가 되는데 그 정합성은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확장이 가능하다는 뜻.

2-1 조서닐보는 ‘민족 정론지’가 아닙니다.
조서닐보든 동아일보든 스스로 민족지라 일컫지요. 근데 한국 사회의 ‘주류’집단 중 친일 경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동네는 별 없다는 것이 제 인식입니다.
조서닐보가 그나마 ‘민족지’로 기능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좌익 계열 지식인들이 기자 역할을 할 때였고, 일제 말 방응모가 조서닐보를 인수한 후 지면은 지극히 낯뜨거울 정도로 일제에 부역했습니다. (자료는 얼마든지 참조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조서닐보는 정직하지 않은 것이지요.

한국 사회는 ‘청산되지 않은 역사’를 갖습니다. 일제에 부역한 이들이 고스란히 해방정권에서 중책을 맡은 데에는 국내 지지기반이 부실한 이승만 정권의 필요, 미 군정의 극단적 반공 정책이 자생적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과 어울리고 6.25 전쟁을 겪으며 친일 세력이 다시 득세하고 민족주의 진영은 빨간 딱지가
붙여져 거세되는 경로를 밟습니다. (keyword : 태백산맥, 해방 전후사의 인식)

그 친일파에 기반한 정권의 수장인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고,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일본군국주의를 충실히 이 땅에 심은 박정희를 아직까지도 신격화하는 신문이
조서닐보입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아라!)(조갑제)를 파시즘 계열로 비판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진중권)를 필독서로 추천하는 바, 조서닐보가 여하히 파시스트 노선과 일치하는지 명료한 논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조선일보는 자신=엘리트가 이끄는 세상을 꿈 꾼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조서닐보나 박정희가 딱 들어맞는 의미의 파시스트라는 뜻은 아닙니다. 차이점도 꽤 되기에 여기서는 간략하게
유사파시즘, 하나의 변종이라 둡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의 박정희 비판은 아직 한국 사회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경제는 잘했지 않아?라는 분들이 많은데, 그와 관련한 새로운 인식은 여기 쟁점토론방에서 주제 검색을 하면 원 없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2 안보 상업주의, 지역 차별
빨갱이라면 이를 가는 분들이 많지요. 6.25전쟁을 거쳐 미소 냉전의 상징으로 한반도가 기능한 50년 간, 남북 모두 상대 체제에 동조한다는 딱지를 붙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충분한 분위기였습니다.
사상이 의심스럽다, 이 한 마디면 끝났지요.이건 지금도 그다지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keyword : 매카시즘, 국가보안법)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 순서로 가면 갈수록 조서닐보는 안보를 팔아 신문 장사를 했다, 즉 영향력을 확대해왔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왜곡이나 오보, 때로 소설도 용인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김영삼정권의 대북정책이 냉탕과 열탕을 하염없이 오간 데에는 조서닐보의 공이 으뜸이지요. (keyword : 금강산 댐, 서울 불바다, 북한식량 군량미, 인공기)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북한을 대화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이들의 사상을 ‘검증’한다며 논쟁을 주도하거나 무대에서 끄집어내린 사례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keyword : 한완상, 이장희, 최장집, 황태연)

극단적인 반공을 추구하는 이 신문이 김대중 정권의 대북 포용 정책(일명 ‘햇볕정책)이 긍정적일 리 만무하지요. 존립 기반과 관계되는 문제거든요.
이 신문은 그래서 부시의 대북 강경 노선을 지지합니다. 저는 대북 포용 정책이 매우 논리적인 접근이라고 판단합니다만, 논리가 현실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반대 논리(?) 개발은 얼마든지 가능함을 이 신문은 몸으로 거의 매일 같이 보여주지요.

이것이 먹혀들게 하는 요인이 지역 차별 정서입니다. 지역 감정 또는 지역 차별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지요. 근데 그리 말하며 차별을 조장하는 논법이 먹혀드는 오묘한 동네가 한국 사회입니다.
그 뿌리는 1970년대 초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 진영이 개발한 ‘빨간 딱지 붙이기’ 무공이라고 합니다.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 김대중은 그 딱지를 붙이고 죽을 고비 몇 번 넘겼다지요.

정치인 김대중을 대립점(희생양)으로 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온 세력인 박정희와 공화당, 그 계보를 잇는 민정당, 민자당, 한나라당이
지속적으로 집권하는 동안, 조서닐보는 그 세력에 적극적으로 영합합니다. ‘전두환장군’을 ‘구국의 영웅’으로 찬양하고 1980년 광주 시민군을 ‘난동자’로 묘사하지요. (keyword : 5.18, 김대중 사회부장)

다른 신문이라고 달랐느냐? 그거이 조서닐보의 내공 수준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경지입니다. 그 하일라이트인 김영삼정권,
이른 바 문민정부 때 조서닐보는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능력까지 보여주지요. 조서닐보 출신 장관이 서너 명 생깁니다. (keyword : 김윤환, 최병렬,밤의 대통령)
그리고 노골적으로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후보 대통령 만들기를 주도합니다. 신문들이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체급이 다르다고 저는 씁니다.

경로야 어떻든 그 선거에서 김대중후보가 승리합니다. 이것은 조서닐보로서는 재앙이었을 터입니다. 그래서 일 년 정도 그 정권이 어떻게 나올까 탐색하다가,
정권의 핵심브레인으로 자리잡아가는 고려대 정치학 교수 최장집 당시 국가정책 자문위원장을 상대로 1998년 10월 ‘논문 사건’을 터뜨려 사상 검증을 시도합니다.
이 사건이 이 사이트 ‘우리모두’가 생기게 된 단초가 되지요.

그 이후는 반 김대중 정서에 기반한 한나라당과 조서닐보가 하염 없이 현 정권을 흔드는 기간을 거쳐 오늘에 이릅니다. 현 정권의 취약한 지지 기반, 위기 관리 능력 부재, 무능력이 때 맞춰 호응을 해 온 것으로 저는 봅니다.
문제는 그 세력의 왜곡에 기반한 부풀리기가 먹혀들었다는 데 있지요. 그 토대는 물론 이 땅의 ‘다수’입니다.

‘열린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그나마 이론적 이상향에 근접하게 하는 필수 하부구조는 ‘토론 시스템’이며 그 주요한 구성 요소는 ‘합리적 사고’입니다.
그런데 20세기 이 땅을 지배해 온 ‘닫힌 사회’는 주입식 교육(이거 조서닐보가 지지합니다.
열린 교육이 애들을 깡통으로 만든다고 하지요)을 통치 수단으로 삼아 왔습니다. 기본 토대가 부실한 게지요.

집단주의, 획일적 사고가 일상 구석구석에 배어 있습니다. 대학 서클 모임에서 사발주를 돌리고(직장에서는 폭탄주), 튀는 개체는 환영받지 못하고
아직 고등학생의 머리는 관리 대상이지요. 외양, 학벌, 출신 지역, 직장이 개체를 판단하는 우선적 기준이 됩니다. (keyword : 임지현, 일상적 파시즘)

그래서 저는 오늘 날 한국 사회 만큼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는 명제가 설명해주는 곳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주류(主流 ; main stream?)의 허위 의식이 되는 것이지요.

2-3 주류, 기득권, 가진 자
조서닐보는 이른 바 주류를 표방하는 신문입니다. 주류의 개념에 대해 설이 분분합니다만, 저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논의의 큰 흐름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부류로 둡니다.
때로는 양적인 우세 때로는 질적인 우세를 나타내는 그룹이지요. 정치권으로는 한나라당, 지역으로는 영남, 서울에서는 강남, 경제권에서는 재벌그룹 또는 대기업 또는 경영층입니다.

위에 열거한 ‘주류’의 본질은 소수 집단이고 다수는 주류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됩니다.
조서닐보는 주류를 표방 또는 지지 또는 영합함으로써, 그 신문을 구독하는 이로 하여금 주류에 편입되었다는 만족감 또는 환상을 충족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그 소수에 들어갔느냐 아니냐는 그 신문을 보는 것과는 무관한 현실이지요.

일례로, 이 사회의 ‘다수’는 노동자입니다만, 조서닐보가 노동자 또는 노조 및 노동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차갑기 그지 없습니다. 오만 논리(?)가 동원되어 거의 능멸하는 수준의 기사가 양산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노동자 ‘다수’가 조서닐보를 보는 모양이예요. 늦게나마 최근 민주노총이 안티조선을 표방했는데, ‘다수’가 호응할지는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

저는 조서닐보가 대립 각을 세우고 있는 ‘김대중’, ‘노조’, ‘북한정권’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단어들은 있는 그대로 가치중립이지요.
그 주체들의 행위에 따라 잘 하는 측면과 못 하는 측면을 때로 비판, 때로 지지할 일입니다. 경로와 논리에 따라 시각이 정해지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인데,
조서닐보는 시각이 선행되어 논리가 정해지는 매우 특이한 신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할 말은 하는 신문’이 아니라 ‘하고픈 말을 하는 신문’이라 표현합니다. 현 정권이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했지요. 저는 매우 바람직했다고 평가합니다.
적어도 정권과 언론이 사이 좋게 밀월관계가 되는 방향은 아니거든요. 이것은 조중동이 주장하는 ‘언론 탄압’ 또는 ‘길들이기’라는 논리가 자가당착임을 보여줍니다만, 여지껏 썼듯이 논리가 현실 세계를 온전히 지배하는 것은 결코 아닌 모양입니다. 그 우기기가 상당히 먹혀들거든요.

이제까지 되든 안되든 밑반찬을 마련해 보았습니다. 이 글 역시 비판적 인식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요. 여기서 확장하여 위에 링크된 ‘안티조선 우리모두에 대하여’를 참조하십사 하고, 이 게시판(묻고답하기)의 글을 처음부터 개괄하시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

그럼, 하실 토론 잘 하시고 다양한 인식으로 확장하시기 바랍니다. 내내 유쾌하시길~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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