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7월19일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세상에 누가 들어도 당연한 말처럼 어려운 말도 없다. 건전한 상식과 바른 양식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사실 당연한 만큼이나 심오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당연함에 만족하고 넘어가지 그 심오함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심오한 것도, 건전한 상식과 바른 양식만 갖는다면, 지나가는 상념들 속에서 꼭 붙잡아서 인격 속에 간직하고 필요한 양분들을 공급해서 인격적 덕성의 수준으로 체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깨어난 놀라움으로 눈을 빛내며 의미를 찾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의식의 각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것은 그저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도 아퀴나스는 사회의 난제를 다룰 때마다 곧잘 이 말을 되풀이하면서 반성을 시작한다. '산다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의 구분이 그만큼 원리적이고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잘 사는 것'이라는 그 미지의 X를 잘 이해하고, 그저 사는 것으로부터 잘 사는 것에로 가는 경로를 잘 파악하고, 그것이 정말 잘하는 일(좋은 일)이라고 납득이 된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잘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경로에 따라 잘 사는 삶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추동의 흐름을 따라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윤리적 숙고가 전개된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일이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자알 살아보세~" 어린 시절 새벽 아침을 깨우는 동네 확성기에서는 쿵짝쿵짝 쿵짝쿵짝 새마을노래와 함께 이 노래도 항상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새벽종이 울리면 졸린 눈을 비비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기 위해 지긋이 아랫배를 당기며 새벽길을 나선다.

당시엔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꽤 명백했던 것 같다. 일제랑 미제는 국산보다 이쁘고 튼튼해서 좋다. 잘 사는 것이란 일본이나 미국처럼 사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이란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자동차도 사고 부자가 되는 것이다. 이건 아주 당연한 말이다. 결국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는 말의 의미는 인간은 부자가 되서 마음 놓고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것은 어린 시절, 다소 배고프던 시대의 이야기다. '잘'이라는 말이 간직하고 있는 의미심장성은 결코 불고기 3인분에서 멈추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잘'이란 말은 신발끈을 메는 기억과 연상되어 있을 수도 있다. 술레잡기에서 술레한테 잡히지 않고, 다방구에서 친구들을 구출하는 것도 정말로 재밋게 잘 사는 일이다. 잘 사는 것은 두루 잘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국어도 잘하고 산수도 잘하고 사회도 잘해야 한다. 그런데 거짓말을 잘하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을 잘 하는 것이다. 그니깐 그것은 잘하는 것이긴 하지만 잘 사는 것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이란 좋은 일은 두루 잘하고 나쁜 일은 두루 잘 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 살려고 노력하면서, 마치 티끌을 모아 가듯이, 나름대로 학식과 기술이 발전하고, 윤리의식과 사회성이 성숙한다. 그것은 생각 속에 스쳐가는 상념들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몸과 마음이 함께 익힌 습관이 된다. 그것은 각자의 성격과 역량, 가치관과 세계관, 개성과 인격을 조성한다. 나의 온 생애를 통해 누적된 나만의 독특한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결정과 행동은 나의 인격으로 통합되서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누구나 지금까지의 생애와 앞으로의 생애는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분투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말로 '잘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삶을 통해 마주치는대로 가능한 한 무엇이든 나에게 좋은 것을 모아들이고 나에게 나쁜 것을 피하면서 그것들을 수단, 도구, 디딤돌로 삼아 무언가 '잘 사는 것 그리고 보다 더 잘 사는 것'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당시에 나에게 좋은 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도 아니요, 당시에 나에게 나쁜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만도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또 결국에 가서는 그 자체로 좋은 것과 일치되는 노선으로 잘 해가야만 두루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한 좋은 것 모두 다와 가치있는 것 모두 다를 어떤 좋은 질서 안에서 어떤 올바른 선호에 따라 그때마다 음미평가하면서 수용하고 창조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내가 혼자서 그 모든 좋은 것을 다 얻어낼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협력을 통해 서로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면서 좋은 것을 두루 공유한다. 가족들은 나에게 기초적인 인성적 가치들을 제공하고, 전라도의 농부는 나에게 생명가치를 유지할 수단을 제공한다. 경상도에 공장을 지으면 사람들이 흘러 들어가 가전제품이 줄을 지어 나온다. 공단에다 공장들을 여럿 지으면 제품들의 줄들이 열을 지어 흘러 나온다. 트럭은 밤을 새워 달리고, 택시들은 분주히 교차하고, 가득 찬 건물마다 사람들은 활동으로 분주하다.

경제활동이 잘 사는 것의 끝은 아니다. 어느 수준에서든 반복적인 생활수준의 흐름 위에는 문화적 생활이 층을 지어 올라간다. 멋진 상대와 대화를 하며 잠시 시간을 멈추고 개성들에 매혹된다. 야구선수의 홈런은 한 여름밤의 더위를 식혀준다. 좋은 문학작품들은 의미들로 가득 차 있고, 노래와 춤은 원초적인 열정에 리듬을 부여한다. 만화와 영화는 창의성을 자극하고 창의성은 세계를 새로운 가치들로 채운다. 불멸의 작품은 영혼을 일깨우므로 아퀴나스와 같은 이들은 700년이 지나서도 강의를 계속한다.

문화적인 가치들의 향유도 잘 사는 삶의 끝은 아니다. 내면성이 성숙하는 만큼 연대성의 무게도 깊어지며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등장한다. 인격적 가치가 등장하며 그것은 사회 안에서 질서의 선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개성적인 인간들이 서로 다른 가치들을 결집해서 질서의 선에 공헌하는 와중에 상충하는 가치방향들이 충돌하고 분열하고 패권을 다툰다. 인류의 근원적 연대성 안에 인간존중의 가치를 채우려는 분투는 먼저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는 기초를 망각하고 연대성을 무시하는 개인주의로 후퇴하거나 아니면 권력을 잡아 차이들을 획일화하고 강압하려 한다.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 그리고 단지 잘 살려고 할 뿐 아니라 언제나 보다 더 잘 살려고 한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사용가능한 공적 거래계산서인 돈이라는 도구를 끝없이 쌓아 놓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수단이 무한히 필요할 수는 없다. 수단이 무한히 필요한 사람은 결코 '잘 산다'는 목표지점으로 전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잘 사는 삶은 결코 부귀나 영화, 명예나 칭찬, 권력과 숭배의 무한한 축적은 아니다. 잘 사는 삶으로 가는데 필요한 수단들이나 가능한 수단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수단들은 자신을 넘어선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들일 뿐이다. 잘 사는 삶은 수단의 무한성이 아니라 과정의 초월성이다. 내가 이제 신발끈을 잘 매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제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난관을 잘 해결하며 전진해야 한다. 잘 사는 삶은 본성적 갈망이 추구하는 의미심장한 가치들과 의미들을 몸으로 체현하고 어깨로 연대하면서 언제나 보다 더 잘 살려고 영적으로 분투하고 어느 정도 계속 성공하며 전진하는 삶이다.

궁극적으로 '잘'이란 용어가 지칭하는 현실은 바로 우리의 본성적 갈망 안에 깃든 초월적 목적성인 것 같다. 그것은 물질과 생명의 약동을 자체 안에 간직하면서 생물학적 생명이라는 기초적 가치를 유지하고, 그 위에 삶의 반복적 필요들을 해결해주는 경제적 가치들을 획득하고, 그 위에 가정과 친지에서의 친밀성의 가치들, 공동선을 향한 공동체의 연대적 가치들, 정의로운 국가와 평화로운 세계의 질서의 선을 획득하고, 내면성의 다채로운 문화적 가치들을 충족하면서 그 너머의 어떤 궁극적 목표를 향해 수직적으로 상승한다.

아래로부터 위로 상승하는 인간적 삶에서 퇴행이나 도피는 가능하겠지만 단계를 뛰어 넘은 도약은 없을 것이다.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결정과 행동을 통해 몸으로 체현되는 가치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상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예기치 못한 순간에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뜻밖의 선물 안에서만 가치충만을 발견할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그래서 잘 사는 삶이란 또한 매순간 가치충만을 예감하며 고대하는 삶이기도 한 것 같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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