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16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오늘날 우리는 행동이나 사고의 합당한 기준을 놓고 고민한다. 개인적인 윤리 문제 부터 사회생활의 행동규범까지 그리고 나아가서 정치 경제적 차원에서 사회의 공동관리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행동기준은 여러가지로 많은 도전을 주는 주제가 아닐수 없다. 개개인의 생물학적 사회적 개성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현대사회는 사상, 이념, 지식이 학술적으로 전문화되고 분화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존재 환경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행동규범의 근거로써 인간 개인의 표준적 정체성을 크게 두가지 면에서 찾는다. 그것은 바로 평균인과 상식이다.

평균인은 무엇인가? 평균인은 (homme moyen) 통계적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정치 사회 경제에서 수리적 인간측정의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영어로는 Average Person 이라고도 한다.

평균인의 개념을 알려면 먼저 평균의 개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평균을 쉽게 Average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평균에는 세가지 개념이 있다. Average, Medium, Mean 이 바로 그 개념들이다. 그런데 평균인은 정규분포 즉 Normal Distribution에 따른 Mean에 의해 구해진 평균수치의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average person 보다는 mean person 이 옳은 영어 표현일 것이다. 19세기 초 벨기에의 천문 통계학자였던 케틀레가 선배 천문학자 가우스의 정규분포 곡선 즉 종형분포도의 표준편차를 토대로 인간의 신체 사이즈를 나이와 인종 성별의 평균으로 구분해 비만지수를 창시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종형분포도는 오늘날 수능시험이 끝난뒤 신문에 나오는 통계 곡선으로 가운데 평균 부분을 중심으로 볼록하게 모자 혹은 종 모양을 그리는 곡선을 말한다. 또 옛날에만 해도 동네 목욕탕에 가면 흔히 보는 체중계 저울에 몸무게와 체중의 상관관계가 비교표로 나와 있는데 이것도 케틀레의 평균인 지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케틀레의 비만 지수는 개인의 건강 측정에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케틀레는 통계학자였지만 자신이 창시한 평균인의 개념을 사회학에 응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19세기 자연법 사조의 영향을 받은 케틀레는 평균개체야 말로 그 군체의 진선미를 대표하는 최고의 표상으로 생각했다. 케틀레의 이 낭만적인 사고는 20세기 들어와서 좀더 복잡하고 세분된 개념으로 확장되어 권력이 좀더 영악하게 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주요수단이 되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물건하나를 만들어 팔때 예를 들어 타깃 소비자 계층이 20대라면 기업은 20대 평균 치수에 따라 물건의 사이즈를 정하고 20대 소비자 계층의 구매력과 머릿수를 계산해 수익을 예상하거나 생산 시설투자를 결정한다. 상품을 생산할때 사용되는 테일러 모델이나 생산공정 관리도 평균인에 입각한 노동자의 생산능력을 전제로 한다. 나아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거나 구 소련이 생필품이나 빵을 배급할때도 평균인의 소비량이 배급량을 결정하는 통계 지수가 될만큼 평균인은 현대사회에서 체제를 초월한 기본개념이다.

그러나 평균인은 물리적 개념이지 관념적 개념은 아니다.

케틀레는 평균인이 최고의 진선미를 증보하는 자연의 정화라고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인류보다 훨씬 먼저 지구상에 서식하다 멸종했던 모든 생물 개체군의 평균도 전부 자연의 정화이고 진선미였을 것이다. 사실 케틀레는 평균인의 개념을 통해 인간의 물리적 사회법칙을 찾아보려고 했고 상당부분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다. 분명 평균은 현상에 의한 인과나 개연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균 개념의 가장큰 단점이자 장점은 이것이 순수 통계적 관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데 있다. 통계의 장점이 운동 경향성의 측정을 통한 미래 예측에 있다면 단점은 인간과 사회의 유기적 운동 즉 아메바 같이 호흡하며 확장 변환하는 인간의식과 사회의 불확정성을 선형의 기하로 밖에 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들쭉 날쑥한 데이터의 중간점을 연결해 직선처리하는 것. 그것이 통계적 평균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통계처리가 가공될수록 단순화되고 직선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우기 큰 문제는 사회 정치 의식으로 치환했을 때 평균인적 사고는 개체적으로 피동적인 자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이다. 즉 평균인은 분명 경제현상과 관련해서는 의미있는 수치를 제공하지만 사회의 가치규범을 추구하는 정치적 시각에서 보자면 능동적 주체가 아닌 수동적 군체의 한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인은 누구일까?

상식인은 간단이 말하면 의식을 가진 평균인이다. 영미권에서는 상식인을 OPRP 라고 하는데 <합리적 신중함을 가진 보통사람- Ordinary Person with Reasonable Prudence>의 준말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가치 중립어인 보통사람이 아니라 <이성적 신중함>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Reasonable Prudence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이성적 혹은 합리적 신중함- RP 는 상당이 범위가 넓은 개념이다. 이는 개인의 도덕에서 부터 법적인 행동기준은 물론 사회와 정치적 의식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에서 Reasonable Jurisprudence의 개념을 처음 체계화한 사람은 헤겔로 신학자이자 법학자기도 했던 그는 개인의 동기와 의식 그리고 행동등은 모두 우주의식이 자기를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핵심본체는 이성(Reason)이라고 설파했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자면 지독한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지만 그는 법은 객체화된 우주의식이며 이 의식은 국가의 사법활동을 통해 이성/합리성(Reason)과 보편성을 구현한다고 믿었다. 대륙계 법리 전통이 영미권의 개인주의와 결합해 정착한 것이 바로 Reasonable Prudence의 개념이다.

상식은 사회정치적 의식을 말한다.
혹자는 상식을 논하면 Common Sense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부터 300년전 토머스 페인이 처음 사용한 Common Sense라는 책은 상식에 대한 어떤 명확한 철학적 관념적 정의도 주지 않는다. 물론 수단이 목적을 합리화할수 없다는 잠언이 나오긴 하지만 페인이 독창적으로 말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왜 영국 왕실의 신대륙 지배가 잘못된 것이고 왜 왕정제도가 낙후된 것이며 왜 미국이 독립해야 하는가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페인은 미국이 독립하는 것이 바로 상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즉 페인의 <상식>은 300년전 뉴잉글랜드 지식인들이 공감했던 특정 사회 정치적 규범이었던 것이다.

경제가 평균인의 개념을 중시하는 반면, 운용하는 반면 법과 정치는 상식인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법적인 문제로 변호사를 찾게되면 관련법에 관한 질문을 하지만 변호사는 오히려 내방자에게 팩트를 물어볼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법이 사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따라 법을 적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부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법적으로 양편 주장에 전부 일정부분 장점이 없는 경우가 드믈다. 그럴경우 설득력이 관건인데 그 설득의 과정이 바로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법조문을 구체적이고 복잡한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이며 이를 <법정심리- 즉 Jurisprudence>라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이 법정심리의 능력마저 시장원리에 좌우되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는 모순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심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상식이다. < 길거리에 떨어진 새끼줄을 집에 가져온것 뿐인데 알고보니 옆집 황소가 딸려 왔더라>는 말을 보통사람은 믿을수 있을까?

정치의 경우 유권자의 상식에 호소해 선거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기본이다. 87년 대선을 전후해 노태우 시절 <보통사람>이라는 말이 남발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열겠다는 신군부의 말장난 이었지만 저 18세기 낭만주의 성속투쟁의 유물인 이른바 < 범인들이여! 그대에게 축복이 있도다> 는 Blessed Mediocre ( 범인 축복론)을 깔고 당시 기득권 질서에서 철저이 소외되던 다수를 겨냥했던 나름대로 치밀히 계산된 프로파간다였다. 물론 신군부는 <보통사람>과 거리가 먼 계층이었고 당연이 <보통사람>을 외쳤지만 유권자를 <능동적인 상식인>이 아닌 <수동적인 평균인> 프로파일로 상정한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상식을 외면하는 정치모순은 신군부가 역사적으로 심판받은 지금도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 같다. < 정치 하려다 보니 필요해서 받았다>. <우리는 좀 덜 받았다...1/10 아니면 물러난다..> 는 식의 부패 합리화나 <경쟁당은 특정지역만 위한 정치를 하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는 식의 지역 패권주의론은 모두 유권자의 상식에 호소하는 형식이면서도 정작 그 메시지는 정치적 패배의식을 조장하고 이에 편승해 유권자의 상식을 정파이익에 짜깁기하는 퇴행적 조작이 아닌가? 상식에 호소하면서도 상식을 배반하는 정치의 변명이 아닐수 없다.

상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 이유는 사회가 변하기 때문이다. 상식이 사회를 변하게 만들기도 하니 양자는 상호 역동적 관계다. 정치건 사회건 법이건 도덕이건 모든 분야에서 상식 즉 보통사람의 합리적 신중함을 담보로한 가치판단 기준은 역사적으로 변해왔으며 지금 이순간도 변하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한국에서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면서 독재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지금은 더이상 그 누구도 독재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여자는 얌전해야 하고 무조건 남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이른바 여필종부의 사상도 사라진 것들의 일부가 된 느낌이다. 온라인에서 만나는 젊은 사람들의 언어와 의식은 장유유서나 가족주의의 인습을 상당부분 극복했다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상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주의나 계급문제 (쉽게말해 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상식이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희망은 이문제와 관련한 새로운 상식은 분명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주의로 소모적 논쟁을 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 기성 정치권은 개혁의 담지자로써 의지와 능력의 한계를 보였으며 오히려 다음시대의 정치아젠다인 빈부문제는 계급정당의 본격적 활동을 통해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 소비에트식 국가 독점 자본주의는 평등에 초점을 마추다 인격 존중의 가치와 조화하는데 실패했지만 미국식 금융 독점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잃고 점차 야만과 폭력에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 노동자의 연이은 분신이나 비정규직, 서민 생활고, 극단적인 빈부격차의 심화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로 풀어가야할 진정한 정치적 아젠다라는 것 등이 모두 우리 시대가 고려해야할 상식이다. 그리고 진보적 인간은 그같은 시대의 정치적 상식을 타인보다 조금 먼저 감지하거나 체득한 사람들이 아닐까?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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