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0624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는 애니메이션 그 자체 보다도 수많은 종류의 프라모델로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국내 공중파에서 방영된 건담 시리즈는 '기동전사 건담 0083 극장판' (그나마도 참 많이 편집된..) 단 하나 뿐이다. 케이블 에서는 '기동전사 건담 W' 가 방영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프라모델은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 '진퉁' 반다이의 제품이 있고,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하는 아카데미 과학의 정교한 모작들이 있다. 우리는 그 조그만 플라스틱 모형들을 질리도록 봐왔지만, 정작 그것들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뿐이다. 뭐 그거이.. 그냥 로보트 만화겠구만.. 

과거의 로봇 만화들 (이를테면 마징가 Z 와 같은) 의 구도라는 것은 참으로 명쾌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영웅 로봇이 절대 악인 미케네 제국의 헬 박사와 아수라 남작을 물리치고 인류의 평화를 수호하는 뭐 그런 것. 기동전사 건담은 아마 이러한 구도를 최초로 무너뜨린 로봇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기동전사 건담에 등장하는 적은 절대 악이 아니다. 우주로 진출한 인류가 지구권의 부당한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을 요구하며 지온 공국을 만들어 내고 시작된 1년 전쟁,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적들도 나름대로의 인간적인 고뇌가 있으며 휴머니티를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최소한의 리얼리티의 반영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모습을 우리는 항상 보아왔다. '빨갱이' 란 말이 그랬고 '수구 꼴통' 이라는 말이 그랬다. 

기동전사 건담은 그 리얼리티를 로봇물에서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정작 79년에 처음 방영 되었던 기동전사 건담의 최초 시리즈를 보면, 분명 그러한 리얼리티가 곳곳에 드러나긴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참으로 촌스러운 것임에 틀림 없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기동전사 건담 0083은 바로 이러한 역설 위에서 출발한다.

기동전사 건담 0083은 기본적으로 외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동전사 건담에서 소멸 되었던 '지구' 대 '우주' 의 구도가 어째서 기동전사 제타 건담에 이르러 '지구 연방 군사 독재 정권 티탄즈' 대 '반 지구 연방 에우고' 대 '지온의 후예 액시즈' 로 변화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시기적 으로는 1년 전쟁의 종전 3년 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설정 이라는 것이 그랬다는 것이고, 실제로 기동전사 건담 0083이 제작된 시기는 91년 이다. 설정상의 시기는 3년 후지만, 실질적으로 제작된 시기는 원작이 제작된 때로부터 12년 후라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좀 의미심장 하다.

앞서 언급하기를, 기동전사 건담이 나름대로 로봇물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최초 시리즈 자체를 가지고 본다면 촌스러운 것 이었다고 했다. 이게 시리즈를 거듭 하여 기동전사 제타 건담, 기동전사 더블 제타 건담, 기동전사 건담 - 역습의 샤아 - 로 이어지면서 원래의 의의가 미친듯이 확장되어 버렸다. 즉,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 밀리터리물의 형식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때마다 나오는 건담 시리즈에만 적용된게 아니라, 과거에 나왔던 건담 시리즈들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건담의 팬들은 촌스러웠던 79년 건담에도 자기 최면을 걸며 멋대로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즉,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제 기동전사 건담 0083 은 그러한 유사-밀리터리물의 관점에서 기동전사 건담의 초기 시리즈를 다시 재구성 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작화나 메카닉 디자인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어딘가 아둔하고 엉성해 보였던 기동전사 건담 RX-78 은 건담 시작 1호기 GP01 의 날렵하고 번쩍이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기동전사 건담에서 어색하고 제멋대로였던 군인들은 정말 리얼한 군인의 모습으로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건담의 세계에서 모빌 슈트라 불리는 로봇들이 균형을 잡으며 움직이기 위해 몸에 달린 각종 버니어 들을 작동시키는 세부적인 묘사들, 그리고 지상 전용 이었던 GP01 이 우주에 나가서 보여주는 무력한 움직임 들.. 이 모두가 리얼리티적 표현의 산물이었다.

기동전사 건담 0083은 1년전쟁 중 연방의 적이었던 지온 공국의 잔당들이 전술 핵 탑재 모빌슈트인 건담 시작 2호기 GP02A 를 테스트 기지로부터 탈취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통적인 로봇물의 관점에서 '적' 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온 공국의 잔당들은 대부분 신념과 긍지에 불타는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시마 가라하우와 같은 비열한 캐릭터는 예외.) 그들은 연방 군인들을 게으르고 규율이 없는 제멋대로인 녀석들 이라며 저주한다. 연방 군인들은 지온측 병사들을 극도의 이상주의에 빠진 극단적인 혁명론자 쯤으로 치부하며 싸움에 임한다. 그들의 서로에 대한 평가는 반쯤은 옳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규정이 좀 더 처절하게 싸우기 위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지온의 잔당들은 결국 커다란 스페이스 콜로니를 지구의 곡창지대에 떨어뜨리는데 성공하고, 이는 결국 군부 독재의 빌미를 제공한다. 군부 내의 사병 집단인 '티탄즈' 는 '거봐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따위의 구호를 외치며 전 지구적 단결과 군비증강을 주장하며 정권을 잡는다. 기동전사 제타 건담에서 독단적이고 오만한 집단으로 그려졌던 티탄즈.. 기동전사 건담 0083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과 함께 지온 잔당의 콜로니 낙하 작전을 저지하려 최선을 다했던 전함 알비온의 승무원들이 티탄즈의 새 군복을 입고 신이 난 표정으로 거울을 보는 장면에서, 우리는 어떤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요컨대, '적' 은 '절대악' 이 아닌 것이다.

여하튼 이 작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 두 가지. 하나는 로봇물 에서 전쟁물 로서의 리얼리티 추구라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후의 시리즈에서 제기된 리얼리티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이전 시리즈에 적용이 되는 가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초점에 신경을 쓰며 감상하면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생기는 작품.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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