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917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1. 여왕의 재판

마르크스가 사망한 뒤 1년뒤, 그리고 파비안 협회가 결성된 1884년,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세명의 어부가 극악 범죄로 기소되어 왕실 재판대에 서게 된다. 살인에 인육 마저 나눠먹은 엽기적인 사건 이었다. 희생자의 이름은 리차드 파커, 남자, 사망 당시 15세를 조금 넘긴 소년으로 피살당시 마지막 직책은 고기잡이배의 선실사환 이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죄로 어린 나이에 자기 밥벌이를 해야 했던 이 불쌍한 소년을 죽이고 그 고기 까지 먹은 혐의로 기소된 <극악범>들은 누구였나?

사건기록은 두명이 공모해 한명이 죽이고 세명이 고기를 나누어 먹은 것으로 되어 있다. 살인 공모를 주도하고 사실상 피해자를 살해한 주범은 이름은 토마스 두들리, 살인공모에 주도하고 고기를 먹은 공범은 에드윈 스테픈스 그리고 살인음모는 거부했지만 인육을 나눠먹은 목격자 부룩스. 세사람 다 장년으로 직업은 어부, 피살자와 같은 어선에서 일했던 선원 들이었다.

이름하여 <레지나 v. 두들리> 케이스, 바로 <여왕과 어부>의 재판사건이다. <레지나 Regina>는 <거룩한 여왕>을 뜻하는 말로 이들을 기소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당대 최고의 통치권자이던 빅토리아 여왕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사건이 왕실 재판에 오게된 이유는 원래 강력 범죄는 왕실에서 재판하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법의 발전은 중세부터 사회적 평화를 저해하는 사건이나 이슈에 대한 권력의 심판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그이유는 <왕관>에 < 영토와 백성들의 평화를 보장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형법은 검사가 용의자나 범인의 유죄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일하는데 여기서 검사는 사회나 국가 권력을 위임받아 대표하게 된다. 즉 형법 재판에서 피고의 상대는 피해자가 아니며 국가나 사회전체가 피해자를 기소한다.

당시 보통 살인죄의 경우 지방관이나 귀족, 성직자들이 재판을 하기도 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재판의 경우 피해자가 직접 왕실 재판으로 심리해줄 것을 청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왕실에서 여는 Royal Court 일명 King's Bench의 재판은 국가에 포고령이 내려져 심리절차나 내용이 개방됨으로써 사람들의 여론이 공정한 지렛대 역할을 했으며 최고의 명 재판관들이 왕을 대신해서 벤치에 앉게되기 때문이다. 즉 왕실 재판은 지방의 인맥이나 권력이 개입되는 지방 재판보다 훨씬 편견이나 이해 관계에 자유로운 평결을 내렸으며 귀족이 연루된 사건에서 평민들에게 <상대적으로 공정한> 절차를 보장했던 것이다.


2. 어부의 비극

날씨 좋은 리버풀을 출항할때 만 해도 피해자와 범인들은 자신들 앞에 다가올 잔인한 운명의 시련을 전혀 알지 못했다. 소년 파커는 분명 선장의 호령속에서도 콧노래를 부르며 잔심부름을 했을 것이고 범인 두들리와 스테픈스도 그 모습에 미소지으며 힘차게 돛을 올렸으리라. 그러나 배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 무렵 이들은 엄청난 폭풍을 만난다. 배가 파선되면서 선원 대부분은 몰살, 바다에 수장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피해자 파커, 가해자 두들리, 스테픈스, 그리고 목격자인 부룩스였다. 대략 희망봉에서 1600마일 떨어진 해상위에서 4인은 표류하는데 운좋게 탑승한 구명 구명보트에 먹을 것이라고는 오직 몇개의 마른 무우뿌리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 이들은 또 다시 절망에 빠진다.

표류 4일째 부터 이들은 바다거북을 잡아 날로 먹으면서 버티게 되는데 그나마 너무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식수였다. 그릇도 물도 없는 상황에서 마실 물이라고는 오직 바닷물이지만 조갈을 부추기는 바닷물은 마시는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이들 어부들은 잘 알고 있었다.

표류 17일째 두들리가 스테픈스와 부룩스를 불렀다. '....이대로 있으면 모두 굶어 죽는다....기다리는 가족이 있는데 바다에서 죽을수는 없다..... 우리중 하나가 죽어 그 피와 고기를 먹을수 있다면....갈증과 허기를 조금더 버틸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제일 죽을 가능성이 큰 사람이 바로 저 소년 파커다..... 봐라. 이미 기진해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어차피 내버려 둬도 그는 죽는다. 차라리 그를 죽이고 우리가 산다면...' 이상은 두들리 본인의 자백과 목격자들의 진술로 확인된 법정기록이다. 다른 두사람 - 스티픈스와 부룩스-은 두들리의 이같은 말에 놀라며 본능적으로 구명보트 저쪽에 누워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가련한 소년 파커는 이미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 져서 말할 기운도 움질일 기운도 없었으며 잠자는 듯한 상태에서 가끔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 스티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들리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만일 필요하다면 두들리를 도와 소년을 죽이겠다고 까지 했다. 반면에 부룩스는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 아무리 굶어죽어도 사람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을 바에야 차라리 이대로 죽는편이 낫다고. 아직은 버틸힘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구조를 기다려 보자고..두들리는 두사람에게 생각해 보라고 말한 것으로 이날 대화는 끝난다.

표류 20일째... 먹을 것. 마실물. 아무것도 없이 3일이 또 지나갔다. 구조선은 나타나지 않고 섬하나 안보이는 망망한 바다만이 계속되는 상태였다. 허기에 지친 부룩스가 잠든 것을 확인한 두들리가 조용이 스티픈스를 깨웠다. '...지금 결행하자. 부룩스가 일어나기 전에....' 두들리의 말에 동의했던 스티픈스 였지만 막상 사람을 죽이기는 어려웠고 그역시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스테픈스가 일어나는 동안 두들리는 혼자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 파커는 이미 탈진이 극에 달해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두들리가 이름을 부르며 깨웠지만 눈조차 뜨지 못했다. 마침내 두들리는 하늘에 '....신이여 나를 용서하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올린뒤 울면서 소년의 멱을 땃다. 이미 탈진한 피해자는 비명도, 반항도 없었다고 했다.

표류 24일째..세사람은 살아남았다. 두들리가 가져온 <고기와 물>이 스테픈스는 물론 부룩스도 살렸던 것이다. 소년의 살해를 거부했던 부룩스 였지만 피해자가 죽자 아무말없이 그 고기를 먹었다. 한 인간의 육신을 식량삼아서 3명의 다른인간이 버틸수 있던 기간은 4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고 허기와 갈증을 해소할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굶주림과 바다.

표류 29일째.. 영국의 한 상선이 아프리카 바다에서 표류하던 작은 구명 보트를 발견한다. 구명보트안에는 세명의 탈진한 인간들이 널부러져 가는 숨결로 호흡하고 있었고 소년으로 추정되는 한 사람의 엄청나게 훼손된 시신도 함께 있었다. 이들을 발견하고 구조한 배의 선원들은 만일 하루만 늦었어도 이들은 필시 모두 죽었을 것 이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세사람은 영국으로 송환되었고 런던 도착 즉시 감옥에 수감, 살인혐의로 기소되었다. 사람고기를 먹은 부분은 필요성이 인정되 기소되지 않았지만 살인 부분은 기소되어 주범 두들리와 공범 스테픈스라는 두 사람의 어부는 여왕의 법정에(Queen's Bench) 서게 되었던 것이다.


3. 소송의 경과

우선 당시의 법부터 소개하자면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인 사람은 살인죄가 (Murder )적용되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관례였다.

의도적이라 함은 부주의나 실수로 인한 과실치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형사적 의미의 처벌이 가능한 마음의 상태를 (Mens Rea) 말하는 것이다. 사건의 내용상 분명 사람을 죽이고저 하는 의도가 있었다. 왕실재판의 원심을 주재한 허들스턴 경은 <배고픔 때문에 타인의 생명을 뺏는 것은 변명이 안된다. 정당방위의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은 자기가 살기위해 타인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판결했다. ( Hunger is no excuse for taking the life of another person. Except in self-defense cases, one person cannot kill another to save himself.)

그러나 피고인 두들리의 변호인은 피고의 행위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정당방위 였으며 상황에 의해 정당화 될수 있는 행위 였다고 주장했다. 피해자인 소년 역시 피고가 죽이지 않았어도 정황상 구조선이 그들을 발견했을 당시 피고들 보다 먼저 죽어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판결에 참가한 배심원들 사이에서 이문제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면서 배심원단은 <이경우를 살인으로 볼수 있는가?> 에 대해 특별 판정 (Special Verdict)을 발부했다. 이는 사건의 특수정황을 인정하며 이문제만을 특별 이슈로 다시 법원에서 재심할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들리와 스티픈스 두사람은 원로 판관인 코울릿지 경이 주재하는 왕실 특별심에서 이문제를 다시 심판을 받게 된다.

독자라면 이같은 사건을 어떻게 판결하겠는가? 만일 배심이 무죄를 선고하면 재판장은 피고를 방면하게 된다. 만일 배심이 유죄를 선언하면 재판장은 사건 유형에 따라 형을 선고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살인의 경우 유죄라면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

이 사건을 오래전 읽은 뒤로 나는 가끔씩 지인들에게 판단을 물어보기도 한다. 대충 통계를 보자면 12명을 배심으로 한다고 했을 경우 5명은 무죄를 7명은 유죄를 선고하는 것 같다. 이런 유형의 사건일 경우 오늘날 미국 평균 배심원단의 무죄: 유죄의 가치 스펙트럼이 40: 60 이니 대충 평균 배심원단의 의식이 생활속에서 반영되고 있다고 본다. 다만 미국에서는 진보적인 사람들일 수록 이런 유형의 사건에 대해 무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궁금해할지도 모를 독자를 위해 120년전에 치뤄졌던 이 사건의 재판 최종 결과는 이글 맨 나중에 소개하도록 한다.


4. Retrobutivism v. Utilitarianism ( 응보주의 v. 용도주의-ie 공리주의)

긴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가치관의 문제다. 추상적 도덕기준에서 시작해 구체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가치관이란 굉장이 개념이 포괄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다만 형법적 관점에서 보자면 크게 두가지 관점이 항상 충돌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오랜 역사와 전통 법리를 이루는 이루는 기본 개념은 사실 <응보주의> 이다. 신탁이나 계시에서 시작된 신의 정언명령에서 ( you must do.. ie: 십계명) 시작된 응보주의는 잘못을 하면 그에 대한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물론 제-정이 분리되고 국-교가 분리된 오늘날 응보주의는 도덕에 기반해 윤리의 토대위에 법리를 세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극단적 응보주의자들이 사회적으로 범죄 억제 효과가 별로 없다 하더라도 범죄자들에 대해서는 처벌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때 신학도였고 법학도였던 칼 마르크스가 혁명론에서 부르좌의 Bloody Legislation에 (유혈 입법) 치를 떨며 부르좌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할때 계급적 심판의 도구로 채용했던 개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신의 정언명령 대신 유물론적 변증법을 도덕기준으로 삼은 것이 다른점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스승이었던 헤겔은 법은 사회적 보편의지의 자기발전의 형태라고 규정한 사람으로 사실상 사회도덕에 입각한 처벌론 성향을 보였으며 응보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응보주의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사형집행에서 나타난다. 의도적 살인범의 경우 남의 생명을 빼앗는 자는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이 당연하며 피해자와 사회를 대신해서 법이 동등한 응보를 주어야 하므로 사형집행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설사 억제 효과가 별로 없다 해도 살인자에 대한 심판으로써 사형은 그 자체가 최선의 공평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논리다. 응보주의의 라이벌 공리주의의 가장 큰 관점이 < 억제효과>를 기준한 가치인데 비해 응보주의는 <공평한 심판>을 최우선 가치로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범죄행위와 범죄 처벌행위의 사회적 불쾌지수를 비교해 처벌을 조정한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는 사회의 행복을 해치는 요소지만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도 사회적 불쾌 요소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도둑의 처벌로 인해 다른 유사한 범죄들을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범죄 처벌 행위가 유사범죄 재발에 별 도움이 안된다면 그 처벌의 성격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인 것이다.

공리주의라는 말을 하면 존 스튜어트 밀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존은 말년에는 공리주의에서 멀어져 사회주의에 기울어졌다. 또 그의 사상은 아버지 제임스 밀에서 온 것이고 제임스 밀은 제레미 벤담의 측근이었으니 영국의 변호사 제레미 벤담이야 말로 공리주의의 시조이며 법적 개념의 공리주의를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연관시켜 사회-경제사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노동계급 독재도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점에서 공리주의 요소가 숨겨져 있으며 마르크스 자신도 제임스 밀의 스카치 댄디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긍정적 평가를 숨기지 않았다.

용도주의 혹은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살인범에 대한 사형은 통계적으로 살인 억제와 상관이 없으며 사회에 대한 살인의 불쾌지수를 (-100) 이라고 했을 경우 범인을 죽임으로써 또다른 불쾌지수 (-100) 이 추가되 결국 불쾌지수가 배가되는 (-200) 모순이 있다. 반면에 살인자를 가만 놔두면 본인의 재범(-100) 이나 타인의 모방범죄 (-100 * X )로 사회는 동일한 불쾌 지수의 무한증가를 체험하게 된다. 대신 살인자를 감옥에 가두면 사회의 불쾌지수는 (-30)으로 토탈 불쾌지수는 (-130)이 되니 살인자를 가만 놔두거나 사형시키기 보다는 감옥에 보내는 편이 가장 나은 것이다. 유용론 주류가 사형집행에 반대하는 이유이다.

이상의 두 관점을 위의 어부의 살인케이스에 비춰보면 재판부가 응보주의에 가까울수록 어부는 유죄를 받을 가능성이 크고 공리주의에 가까울수록 어부는 무죄에 가깝게 되는 경향을 볼수 있다.


5. 피상의 심판을 넘어서

세상의 일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 타인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아니 인간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존재다.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인간에게는 위악적인 면과 위선적인 면이 있으며 가학적인 면과 피학적인 면이 공존한다. 노출증이 있는가 하면 관음증도 있다. 결국 세상일의 판단에 대한 고민은 인간 스스로의 자기 판단에 대한 고민과도 같다. 사회, 정치적 판단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나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같은 인간의 본질적 자기 고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궁금해 하는 독자를 위해 어부의 살인사건 재판 결과를 끝맺어야 겠다. 특별심에서 왕실재판부는 원심의 판결을 재확인, 두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피고 토마스 두들리, 리차드 파커 살인사건 주범으로써 유죄가 인정되므로 사형.......'
'...............피고 에드윈 스테픈스, 리차드 파커 살인사건의 공범으로써 유죄가 인정되므로 사형.........'

특별심 재판부는 응보론의 원조인 브랙턴 경의 (Lord Brackton) <도둑은 도둑론>과 공리론의 원조 격인 헤일경의(Sir Hale) <필요성에 의한 살인 정당론>을 설명하고 <베이컨> 경의 <실용적 귀납론>을 차용해 장광설을 늘어놓았지만 결과적으로 두사람의 어부를 교수대로 보내는데 필요한 마지막 서명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끝났지만 의문은 남는다.
그같은 상황에서 두들리가 파커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은 것은 정말 원심의 판결대로 <악마> 같은 일이었는가? 그가 악마였다면 왜 소년을 살해하기 직전 울면서 신에게 기도했을까? 그는 왜 스테픈스를 강권해 소년을 죽이는 일에 동참시키지 않고 스스로 주범이 되었던 걸까? 스테픈스는 왜 두들리의 살인에 동의했으면서도 마지막 살인의 순간에 움직이지 않았는가? 두들리의 살인에 처음부터 완강히 반대했던 부룩스는 왜 살인의 열매였던 소년의 고기를 먹었나? 죽어가면서 십대의 피해자 파커는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가?

이런 정황들을 좀더 세밀히 판단해 본다면 법정 심리학의 응보주의나 공리주의 논쟁도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진리에 비하면 수박 겉핡기식 말장난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누군가를 심판하고 무언가를 평가할때 우리는 드러나지 않는 진실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위의 <여왕 v. 어부>의 판례에는 꼭 덧붙여야할 유명한 에필로그가 있다. 피고들은 유죄가 확정됐지만 그들의 사형은 결코 집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치권자였던 빅토리아 여왕이 군주의 사면권을 활용해 재판후 그들을 감형, 사면했던 것이다. 공범 에드윈 스테픈스 특별사면. 즉시 석방. 주범 토머스 두들리 감형 및 특별사면으로 징역 6개월 형. 여왕의 법정은 유죄를 평결했지만 여왕은 그들을 사면했고 이 사건은 훗날 살인범의 정황과 동기에 따라 형량이 바뀌는 선례가 된다.

120년전 유럽의 한 판례를 덮으며 한가지 아쉬운 것은 오늘날 우리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이나 사물에 대해 피상적 심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아쉬움이 어디 법정 심리 뿐이랴! 생활의 하루하루, 매순간의 결정이 실제적 판단으로 점철되는 우리의 인생과 사회속에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싫어하게도 된다. 또 무언가에 심취했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를 멀리하는가 하면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부터 떠나게 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을 깊이 알지 못하는 우리는 타인의 이같은 행위에 대해 피상적 판단에 머물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피상의 심판. 그것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아는자 끼리 인정하는 위선의 묵계일수도 있고 스스로 부족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우매한 교만일수도 있다. 그러나 위선은 위선대로 위악은 위악대로 과실은 과실대로 선의는 선의대로 인정하고 음미한다면 공리주의나 응보주의 같은 언어의 한계나 피상적 심판을 넘어 언젠가 우리는 인간과 세상의 진실을 조금 더 이해 할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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