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04014 우리모두 / 토론 / 문화연구, 이대로 좋은가 >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다큐멘터리 <콜롬바인을 위한 볼링 Bowling for olumbine>은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날이었다. 우유배달부는 어김없이 우유를 나르고 있었고, 농부들은 어제와 같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으며,
대통령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이름 모를 어느 도시를 폭격하고 있었다."

"우리는 총에 미친 멍청이들인가, 아니면 그냥 멍청이들인가?(Are we a nation of gun nuts or are we just nuts)"라는 포스터의 문구가 말해주듯, 마이클 무어는 총과 폭력성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재치와 풍자를 통해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웃음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결코 무디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어의 유머는 특별하다.

무어는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사건부터 시작해서 여섯 살 아이의 총에 죽은 다른 여섯 살 여자 어린이, 그리고 전국총기연합회의 집회로부터 대형 슈퍼체인의 총기판매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이 총에 가진 집착과 이것의 원인 및 결과들을 추적해 나간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주제는 결코 총기규제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캐나다인들은 미국인들보다 더 많은 총을 소지하고 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총기로 인한 사고가 일년에 평균 300번인 반면, 미국에서는 총 11,000번으로 캐나다의 35배를 넘어선다. 그렇다면 단지 총이 많다는 것이 총기사고의 주된 원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총기사건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서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아주 손쉬운 해결책이 있다. 바로 대중문화를 비난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영화, 음악, 뮤직비디오가 그들 내부에 잠재된 폭력성향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콜롬바인 총기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은 마릴린 맨슨의 음악과 매트릭스 등의 영화였다. 수많은 청소년들을 앗아간 그 어처구니 없는 사건에 대해 무수히 많은 '전문가'들이 수없이 많은 '처방;을 제시하였다. 폭력적인 영화, 선정적인 텔레비전, 비이성적인 대중음악,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요즘 애들'의 혈기 등.

하지만 그런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어디 미국인들 뿐인가? 캐나다는 미국문화의 가장 큰 소비시장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사회의 폭력의 손쉬운 용의자로 대중문화를 공격하는 것은 그다지 공정한 처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 보자. 잠시 죽은 시늉을 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배우들과 주권국가의 상공에 수십만 개의 폭탄을 떨어뜨리는 살륙을 선두지휘하는 대통령 가운데 누가 더 폭력적인가?

마이클 무어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묻는다. 부시 대통령의 학살과 맨슨의 락음악 가운데 누가 더 청소년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고. 자신이 뽑은 대통령이, 자신이 낸 세금으로 수백만의 머리 위에 폭탄을 쏟아붓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식들이 학교에서 주먹질을 배워올까봐 걱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두 명의 고등학생이 13명의 학생들을 사살했던 콜롬바인 고등학교는 미국 콜로라도주의 리틀튼(Littleton)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 사람을 먹여살리는 가장 큰 기업은 군수회사인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이다. 무어가 그 회사의 책임자에게 콜롬바인 사건의 왜 일어난 것 같느냐고 묻자, 그 역시 앞에서 '전문가'들이 제시한 '정답'을 나열한다. 세태를 한탄하는 그 관리 뒤로 미사일 조립 라인은 계속 가동되고 있다.

대량학살 무기를 만들어 팔면서 자기의 아이는 폭력을 모르고 살기를 바라는 이 '순진한' 가장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스스로 옳지 않다고 믿는 전쟁에 대해 '국익을 위해' 군대를 보내기로 한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들이 '이익을 위해' 주먹과 칼을 꺼내드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이클 무어가 주목하는 것은 총기 자체보다는 이처럼 우리 주위에 일상화된 폭력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고 이에 열광하기까지 하는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무감하면서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작은 폭력에 대해서는 한없이 소심하고 민감하다. 그리고 이 폭력은 상대에 대한 증오보다는 공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무어의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미국인들이 이라크인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허구적인 공포는 권력과 언론이 대중을 선동하고 동원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지금 그들을 쏘지 않는다면 그들이 우리를 쏠 것이다."

무어가 보여주는 폭력에 대한 무감함과 비이성적인 공포는 단지 미국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전쟁을 부추기는 한국언론들을 보자. 그들의 눈을 들여다 보면 공황에 가까운 공포심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이라크를 두려워하고, 북한을 두려워한다. 이런 비이성적인 공포는 상대를 이해하고 대화하기보다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도록 요구한다.
무지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폭력을 낳는 법이다.

공포에 퍼렇게 질린 한국의 언론들은 말한다. "나는 그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전쟁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전쟁 뿐"이라고 말이다. 공포는 끊임없이 남에게 위해를 가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피해자라고 믿도록 한다. 그리고 야만의 땅으로 변해버린 미국과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허구적인 공포다.

오늘도 일면기사를 통해 '국익을 위해' 전쟁에 나서야 하며, 북한에도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보수일간지들. 그들이 바로 뒷장에서는 '유해한 대중문화'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날 나의 미래의 아이를 위해 애도사를 쓴다.

<후기>

<콜롬바인을 위한 볼링>은 칸느에서 20분이 넘는 기립박수를 받으므로써 칸느사상가장 긴 기립갈채를 받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부시를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갈채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그러나 그의 열정적인 반전연설 이후 <콜롬바인을 위한 볼링>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두 배 넘게 늘었으며, 그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로 한 극장의 수가 세 배가 넘게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50주 넘게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누려오던 그의 저서 <멍청한 백인들 Stupid White Men>이 다시 베스트셀러 1위로 올라왔으며,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 비디오 예약주문의 수가 영화 <시카고Chicago>를 넘어섰다. 황폐한 모래사막에도 봄꽃은 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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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31 우리모두


목적이 동일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유지되지 않는다. 안티조선은 '공정한 사실보도'라는 언론의 금도를 벗어난 조선일보의 일탈과 왜곡을 지적하고 정론의 제자리로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애정어린 질책으로 시작되었다. 그 애정은 조선일보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조선일보가 몸담고 있는 우리사회에 대한 애정이다.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애정은 각자의 정치색을 넘어선다. 정치색이란 자기 사회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나 심리적 호오의 감정에서 나온 경향성에 불과하다. 사회가 급변할수록 사회의 변화하는 필요와 가능성에 따라 각자의 정치색도 수시로 교정된다. 이념적, 지역적, 당파적인 정치색이란 불변적이거나 근원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정치적 선택을 좌우하는 원천적인 힘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각자의 순수한 애정이다. 

  안티조선의 원천은 사회에 대한 애정이었고, 안티조선의 목적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이었던 조선일보가 최소한 '공정한 사실보도'라는 기본을 갖추게끔 요구하는 것이었다. 상습적으로 폭주하는 언론사에게 정론의 기본을 갖추라고 요청하는 사회적 요구는 그 자체로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요청자들 각자의 정치색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우리모두앙의 자격은 그저 우리사회에 대한 애정을 갖는 시민들이면 족한 것이었다.

  안티조선 우리모두는 태동과 번성, 전성기와 쇠퇴기의 한 순환을 겪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조선일보가 약화되었다는 점에 있다. 조선일보는 언론으로서 무능력하고 미숙하다. 사회변동에 적응하는데 실패한 결과, 과거처럼 여론의 향방을 좌우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민주화시대에 상호의사소통의 활성화를 통해 우리사회의 판단 역량이 크게 신장한 탓이다. 

  문제는 조선일보가 이러한 시대변화를 '정치적 권력투쟁'의 탓에 돌리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데에 놓여있다. 조선일보는 언론으로서는 기준미달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언론으로서의 기준미달성과 정치적 당파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안티조선운동이 '언론개혁운동'이냐, 아니면 '정치개혁운동'이냐의 두 가지 목적성을 놓고 분열될 수 있다. 

  안티조선운동이 언론개혁운동일 때, 조선일보의 당파성은 '공정한 사실보도'의 기준 하에서 비판받지만, 이때 비판자들의 당파성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문제시되는 것은 '언론의 공정한 사실보도 여부'일 따름이다. 한편 안티조선운동을 정치개혁운동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할 때, 안티조선운동의 향방은 자기 당파의 '당리'에 따라 좌우된다. 당리들이 충돌할 때, 당파들이 분열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과연 안티조선운동에서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중요한가?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왜곡된 용어를 채용하면서 정명을 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귀감삼아 경계하지 않으면 삼투되기 쉬운 상징들이 존재한다. 합법적 의무사항인 언론사 세무조사가 언론자유 탄압의 상징으로 왜곡되었다. 법률집행이 안티조선운동의 성공인 것처럼 오해되었다. 운동의 열매를 각자의 당리에 따라 분배하자는 '공정성'의 개념이 등장하였다. 그 결과 안티조선운동은 원래부터 정치개혁운동의 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었고 도처에서 당파들은 깃발을 들고 헤쳐 모였다. 

  정치적 무관심도 사회적 병폐이지만, 정치과잉심리도 심각한 병폐다. 사실상 수십년 간 국회의 기능은 거수기에 불과했으며 태업이냐 아니면 파업이냐를 놓고 고심할 뿐이었다. 국회의 상시적인 기능마비와 고착된 지역감정은 표리의 관계에 놓여있다. 언론은 삼김상징을 통해 지역감정을 관리해서 시민들의 정치심리를 대권의 향방에만 쏠리게 만들어 놓고 대권 아래 여당은 거수기, 야당은 파업정당이라는 정치 무력화 현상을 정착시킴으로써 혼맥과 인맥으로 중첩된 기득권의 중추를 보존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이제 전라도는 천민이 아니며 경상도는 선민이 아니다. 오직 시민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도 체제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그때마다 경기의 부침에 따라 주어진 재정 하에서 정책적 선택의 우선성 문제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정치개혁은 안티조선이나 노사모의 운동을 통해 온 것이 아니라 개혁세력이 지역세력을 넘어설 정도에 도달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민주헌법의 작동과 정권교체의 보장이라는 거대한 정치개혁 이후에는 지역정당을 탈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들 각자가 거수기나 상시파업을 벗어나 소신에 따라 정책대결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회가 일하고 경쟁하게 하라. 그러면 이러한 선의의 정책경쟁을 통해 사회적 필요에 따라 불가피하게 지역감정 자체가 와해될 것이다. 

  수십년 간 입법부는 놀면서도 우리사회는 발전해왔다. 첫째로는 일상에 충실한 시민들 덕분이며, 다음으로는 우수한 행정관료들 덕분이다. 그러나 이제는 국회의 활성화를 통해 행정부의 관료주의를 제대로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시점이다. 복지제도가 점차 중요해질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사회의 정치적 단계이다. 언론과 여론의 과도한 대권중심 정치상징들은 이제 말소되어야 한다. 사회전체는 대통령 일인이나 청와대 참모조직의 일거수 일투족에 매달리기에는 너무나 거대해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전체로서의 우리 사회다.

  조선일보가 다소 약화되면서 조선일보가 수행했던 정치적 상징놀이를 각 정파의 입장에서 지속하는 인터넷 대안언론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재미있고 여전히 잘 먹힌다. 시민으로서 그 정도의 오락을 즐길 권리는 있다. 단지 오락을 오락인 줄 알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는 서구의 어떤 이념이나 사회과학을 암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다른 사회의 역사성에서부터 나온 이론들은 참고사항에 불과할 뿐 우리사회의 역사법칙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사회는 자신의 것을 스스로 연구하고 체득해야 한다. 사회관계는 논리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현행 추세의 확률을 고려한 각자의 결단과 책임성의 문제이다. 

  따라서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지성적이고 양식있는 판단력이다. 누가 내 판단을 대신해주지 않으며, 내가 내일 하게 될 판단을 지금 내릴 수도 없다. 안티조선운동은 언론에게 공정한 사실보도를 요청하며, 그에 따라 내가 나의 지성을 동원해서 판단을 내리고 그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자 하는 시민들의 운동이다. 판단에 스며드는 경향성이 선입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항시 주입된 이념성을 경계해야 한다. 각각의 판단은 매 사안마다 사안이 요청하는 만큼의 충분성을 갖추면 된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다. 

  우리모두는 언론개혁운동으로 시작했으며 여전히 언론개혁운동으로 남아있다. 그 과정에서 언론개혁운동을 정치개혁운동과 혼동한 사람들이 각자의 당파성에 따라 갈려져 나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에게 공정한 사실보도를 요구하는 언론개혁운동은 그저 시민이면 충분하다. 헌법에는 좌파시민과 우파시민이 없으며, 전라도 시민과 경상도 시민이 없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시민이면 충분하다. 언론개혁운동이 정치개혁운동에 대해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 이곳의 주도적인 목적에 충실하기만 하면 우리모두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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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동호회/지적성감대 / 20030224>

사랑이 생활이 되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다.
굳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것까지야 없지만 연애할 때의 감정에 비한다면
왠지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섭섭하다.
맛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달든지 짜든지 맵든지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던 것이었으나
지금의 것은 심심하고 싱겁고 맛이 좀 덜한 것 같다.
이미 중독이 되어버린 까닭 일게다.
그리고 또 하나.
새벽안개처럼 사라진 대상에 대한 신비감.
신비감이라는 것은 여자에게만 표현되어지는 것은 아닐 터.
오죽 관찰력이 좋은 내가 아니냐
이 남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며 살피니
아~불행인가 다행인가
벌써 이 남자의 뒷모습만 보아도 그의 심적 상태 및 행로를 알 수 있게 되어 버렸다.
(그 사이 허풍이 늘은 사실을 본인도 모르지 않는 바, 이해하시고 읽어 주시길 바란다
-이 글의 진실성과 명확성은 48%이다)
어찌됐건 간에 결론은- 뻔하다-는 것이다.
그와의 생활은 내게는 초등1년짜리 산수 문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그는 이렇게 하겠지...딩동댕!
요런 말을 하면 요런 대답을 하겠지?...역시 딩동댕!
그는 곧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서 그렇게 한 다음 어떻게 하겠지?...으음 역시 아니나 달라?! 부처님 손바닥이 따로 없군.
이런 경지는 필시 나만으로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 또한 나에 버금가는 잔머리와 눈치의 대가이다.
솔직히 아이큐는 그가 나보다 20이 더 높지만 눈치와 잔머리는 내가 으뜸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라 사실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증명까지 한 단 말인가.
어쨌거나 고수 아닌 고수들이 한 집에서 생활하게 됐는데....

그 이름하야 바로 눈치의 고수 밴댕이와 잔머리의 고수 골뱅이렷다.
밴댕이는 본인이 밴댕이 소갈딱지라 하여 자칭한 것이고
골뱅이는 쫀쫀하기가 골뱅이 같다하여 자칭한 것임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도사들은 원래 말이 필요 없다.
서로 텔레파시로 통하거나 지극히 간단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TV를 보다가 다른 채널을 원하면 턱을 그대로 옮겨 상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면 되고 맘에 드는 프로면 움직일 필요 없이 입술만 살짝 미소를 지으면 된다.
간단하다.
하지만 밴댕이가 보고싶어하는 프로가 아닐 때는?
더 간단하다.
끈다.
미소짓는 밴댕이....
골뱅이 일어나서 리모콘을 갖고 안방으로 사라진다.(리모콘 없이는 채널 전환이 안됨)
그 다음은 생각하지 말자.
식사 할 때
밴댕이가 맛이 없다고 무표정을 보인다.
내지는 고개를 갸우뚱한다거나 반응이 신통치 않다.
골뱅이 풀 죽은 한숨 소리 죽여 낸다.
그리고 다음 끼니... 굶긴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밴댕이는 혼자서 숨겨 놓은 막걸리로 배를 채운다.
질세라 소주병을 들고 나오는 골뱅이
이 또한 그 다음 얘기는 거론하지 않겠다.

솔직히 이런 적은 아직 한번도 없다.
그냥 서로가 말없이 생활하는 것을 상상해 보니
이렇게 황당한 허무개그를 지어내고 말았다.
아~ 나도 허무하다.
용서.Please.


하지만 그는 분명 고수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절대 이 골뱅이 고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잠자는 시간 이외에 누워 있는 모습을 아직 보지 못 했고
멍청하게 시간을 그냥 보내는 걸 보지 못했다.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청소를 한다.
음악을 즐기거나 차를 즐긴다.
TV도 뉴스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면 보질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절대 눕지 않는다.
내가 그를 고수로 인정하는 것은 일단 이런 면들이 나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부분에서 진실성이 약간 결여된다.ㅋㅋ)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였던가
그런데 너무나도 서로가 지피지기 하다보니 승패가 안 난다.
역전과 반전을 오고 가며 피터지는 혈전 속에 드디어 골뱅이가 밴댕이에게
무너지는 순간이 생겼으니...
그것은 술 때문이었다.

어느 날
서울에서의 술자리에 홀로 참석했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부어라 마셔라의 과정을 거치다 보니 아뿔싸 우리집이 공기 좋고 인심좋은 동두천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축지법을 배워 둘 것을....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고리타분한 것을 배우지 않는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 좋은 시절을 누리지 못하고 축지법을 배우느라 시간을 허비하는가
돈만 있으면 편하게 비행기도 탈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어쨌거나 쫀쫀하기로 소문난 골뱅이는 일주일 분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을 부들부들 떨며 택시 비로 날리고 그 다음 날부터 여러 가지 후유증으로 참패의 형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고양이 앞의 쥐가 따로 없다.
"어머니가 당신 며느리가 고주망태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될까?"
으헉
"앞으로 당신은 소주 반병이상은 안 돼!"
허걱
"패널티로 일주일 간 별거야"
꽥!
-흥 그래 ? 당신은 여기에서 실수를 한 거야. 내가 죽부인(밴댕이는 이전까지 골뱅이의 죽부인 노릇을 했었음)없으면 잠 못 든다는 것을 이용하는 모양인데 쥐도 길을 트면서 몰아야 한다는 전법을 모르고 계시는군.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나의 필살기다.-
일단 밴댕이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근사한 아침상을 준비한다.
약간 밝고 경쾌한 음악을 틀고 옷도 화사하게 입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하고 다정한 어조로 그에게 대한다.
흐흐흐 밴댕이는 분위기에 약하다.
흐흐흐 밴댕이는 골뱅이한테 잘 홀린다.
절대 이 대목에서 귀여움을 떨면 안 된다.
목소리가 크거나 너무 쳐져도 안 된다.
오직 지성적이고 우아해야 한다.
밴댕이는 지성에 가장 약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소주 한 병까지 낙찰을 보았다.
패널티도 바로 해제되었다.
사실 패널티를 이용해 그를 반격할 수 있으나
그런 수를 쓰는 것은 배수진의 수법과 동일한 것이기에 되도록 피하여야 한다.
한 고비는 넘겼다.
다시 우리는 서로를 주시하며 살아갈 것이다.
가끔씩 허점도 보이며 서로에게 미끼를 던질 것이고 서로 도사가 되는 그 날까지
팽팽한 접전을 누릴 것이다.
(아래의 글은 IQ 80 이상만 읽으시오)
이런 접전은 서로에게 사랑과 신뢰라는 상처를 줄뿐이다.
이런 상처로 깁스하고 이런 상처의 흉터가 건달들 등판에 문신하듯 새겨지길 바란다.
쌍방 사랑의 대 결전 후유증이 너무 심해 불치의 병이 되고 말았소 라는 진단을
받았으면 좋겠다.

세상을 살다 보니 반 도사가 되신 분들 내지는 도사 지망생 여러분들
그러나 절대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무관심이라는 도끼는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 자신의 일부에 치명타를 줄 것이므로

고수가 되고 싶은가
관심이라는 주문을 늘 꾸준히 외워라.
천리안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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