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가 생각 안 남.. 우리모두나 진보누리였던 듯>

그저께 저녁,허름한 선술집에서 한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아니다. 처음엔 기울였지만 나중엔 퍼 부었다는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우리가 앉은 상 옆에는 누군가 보다가 던져 놨는지 신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근세 우리 역사의 풍운아 여운형의 딸이 피붙이를 만나 눈물을 흘리는 사진이 선풍기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그친구는 국악을 업으로 하는친구다. 대학 강사로 일하며 소위 말하는 알바도 뛰면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살고있다. 얼마전 다른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가끔 생각나면 소주한잔씩 하는 사이다.그런데 이친구 경력이 특이하다.
국악한다는 그 친구의 출신교가 엉뚱하게도 모 공업전문대이다.난 공과와 국악의 상관관계를 아무리 생각해도연결 할 수 없었다. 몇번 물어봤으나 친구는 싱긋이 웃는것으로 답하곤 했다.

술자리는 통상 하듯 안부로 시작해서 일상 신변의 얘기로 시작 되었다.그리고 8시. TV에서 뉴스가 방송이 되었다.자연스레 얘기는 정치로 흘렀다.그때부터 우리는 술을 퍼붓게 되었다. 그렇게도 내 궁금증을 싱거운 웃음하나로 넘기던 친구가 속내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누구나 한번쯤 할 만한 소리로 시작되었다
'얌마. 이래뵈두 나 어릴때 나 가야금 신동이란 소리 듣고 자랐다.내가 리틀 앤젤스 1기야. 젤 대빵이라구.내후배들 아주 빵빵해. 너 리틀엔젤스가 무언지 알어?'
'통일교 문선명이가 한거? 니 아부지 통일교도 이셨니? 그거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다 갖다 바쳐야 한다며?'
'우리 아버지?...'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친구는 소주잔을 벌컥 들이켰다.

'나 울 아버지 무지 싫어한다.'
'왜? 약주를 좋아하셨니?'
'응.알콜 중독자라 해야겠지....근데 그 분이 일제때 유명한 일본 모 대학 출신이야.'
'그럼 한 자리 하셨겠네'
'아니 사거리에서 뻥튀기 장사 하셨어. 뻥 하고 강냉이 튀기는것..아주 거지생활이지.'
'.....'
'생활도 생활이지만 신분을 속이려고.....'
'음? 무슨신분?'

친구네는 친구의 부친을 일본에 유학 보낼정도의 꽤 있는 집안이었다.그런데 당신의 친구분 중 한분이 여운형의 동생이였단다.
그 영향 이었을까? 당신께선 여운형의 철학과 인품과 열정에 반하였고 여운형의 비젼까지도 사랑했단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청년기를 보내셨다 그런데 결과는... 다 알다 시피 여운형은 암살되었다. 여기서 여운형의 암살의 배후니 의의니 그런것은 생략하련다.그 얘기가 길었지만서도...

친구의 부친은 깊은 좌절을 맛보았다.상상이 가지 않는가? 빨갱이로 몰린..아니 공산당조차도 반동분자로 몰고 가던 그들(건준)의 처지가...결국 진정한 민족주의를 꿈꾸었던 당신은 어느 한쪽을 택 해야하는 처지가 되버렸다.
당신 생각은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 앞잽이 놈들이 미군정과 야합하여 일제때와 다름없이 호위호식하는 남쪽 보다는 북쪽이 좀 더 정의롭다고 판단 했을지도 모른다. 뿐만아니라 그시대의 사회가 당신을 애궂게 빨갱이로 몰면서 북쪽으로 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당신은 북한군 장교가 되었다.

그리고 당신은 또 좌절한다. 어느날 홀연히 북한군에서 탈주하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동족상잔의 전쟁은 그가 꿈꾸던 조국을.. 그토록 위하고자 했던 이땅의 민중의 위상마저 모두 그의 가슴으로 부터 죽여 버린것이다.
남은 것은 피폐해진 마음과 빨갱이로 찍힌 낙인 뿐이었다.

얼마나 자책 했겠는가?남보다 많이 배워서 죄인가?아니면 자신이 바라던 조국이 감히 꿈꾸어선 안될 금기였단 말인가? 그자책 보다도 그업보가 자신보다 자식들에게 쏟아지는 현실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펐으리라. 누구를 위해 꿈꾸던 세상인데... 자손만대에까지 내조국 내땅에서 행복하라고 꿈꾸고 열정을 다했던 당신의 일생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손에게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아오다니... 술을 마시며 달래고 또 달랬으리라. 그리나 그 술마저 이기지 못했다. 울분탓에 주사가 심해졌다. 마누라에게 주먹질이나 하는 룸펜으로 전락했다.

친구의 부친은 정치보다는 예인이 더 어울렸나보다.말년에 그분께 글도 얻어가고 자문도 받으러 유명한 대학 교수도 자주 왔다고 하니까...그 와중에도 친구에게 국악을 가르치고 국악고등학교까지 보내신것은 자신이 피우지 못한 재능을 막내 아들에게 기대 한것이 아닐까? 덕분에 친구도 현실생활과 재능사이에서 고민하며 대학을 3군데나 다녔다고한다. 내 궁금증이 풀렸다.

'난 잊을수없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곤 해.장사 갔다 돌아 오신 어머님을 형사놈이 들이닥쳐갖곤...주머니를 뒤지고.. 돈을 다뺏는거야. 어머님은 땅에 업드려서.. 두손을 싹싹 빌며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빌고...우리 엄니가 무얼 잘못했냐구! 우릴 먹여 살리려고 장사 갔다 오셔서 그 돈 다 뺏기며..'
'설마,형사가...'
' 임마! 내가 어릴때 부터 보고 살아 왔다. 겁을 먹어 부들 부들 떨면서..... 나중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놈과 술 한잔 하시더군. 당신은 용서 하신게지... 하지만 지금도 난 그놈을 죽이고 싶어'

살인을 할 만큼 그 친구가 험상궂냐고?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
작고 갸날픈 체구에 대학교수다운 지성을 갖춘 외모다.깔끔하다. 심하게 말하면 기생오래비 타입이다.

북에서 온 여운형의 딸이 피붙이들, 사촌들을 만났다고 언론에 대문짝나게 실린날이다. 그리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동정을 TV에서 보도하고 있었다.여운형이 죽고 반세기가 지났다.그 시절에 여운형과 뜻을 같이 했던 한 청년의 자식들은 친형제지간도 같은 남한땅에서 살면서 서로 경원하고 산다. 생활이 불편하고 살아온 기억이 불편한 까닭이다.

그친구가 내게 술 한잔 하자고 전화 한것은 내가 보고픈 것이 아니라 여운형 딸 때문이었다. 아니다. 그녀 때문에 아직도 못내 원망하는 아버지가 생각 나서였다. 황폐한 가슴에 술을 쏟아부으며 달래야 했던, 그러나 그마음마저도 못 잡아서 주사가 심했던 그 아버지가 보고파서였다.

'이런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
이 절규가 누구의 것인지 우린다 안다.그때도 난 울었다. 하지만 그날은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한 천륜 때문에 우리는 절규 대신 허름한 선술집과 호프집을 전전하면서 새벽까지 술을 퍼부었다.
퍼붓다가 퍼붓다가 아주 망가져 버렸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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