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31 우리모두


목적이 동일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유지되지 않는다. 안티조선은 '공정한 사실보도'라는 언론의 금도를 벗어난 조선일보의 일탈과 왜곡을 지적하고 정론의 제자리로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애정어린 질책으로 시작되었다. 그 애정은 조선일보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조선일보가 몸담고 있는 우리사회에 대한 애정이다.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애정은 각자의 정치색을 넘어선다. 정치색이란 자기 사회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나 심리적 호오의 감정에서 나온 경향성에 불과하다. 사회가 급변할수록 사회의 변화하는 필요와 가능성에 따라 각자의 정치색도 수시로 교정된다. 이념적, 지역적, 당파적인 정치색이란 불변적이거나 근원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정치적 선택을 좌우하는 원천적인 힘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각자의 순수한 애정이다. 

  안티조선의 원천은 사회에 대한 애정이었고, 안티조선의 목적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이었던 조선일보가 최소한 '공정한 사실보도'라는 기본을 갖추게끔 요구하는 것이었다. 상습적으로 폭주하는 언론사에게 정론의 기본을 갖추라고 요청하는 사회적 요구는 그 자체로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요청자들 각자의 정치색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우리모두앙의 자격은 그저 우리사회에 대한 애정을 갖는 시민들이면 족한 것이었다.

  안티조선 우리모두는 태동과 번성, 전성기와 쇠퇴기의 한 순환을 겪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조선일보가 약화되었다는 점에 있다. 조선일보는 언론으로서 무능력하고 미숙하다. 사회변동에 적응하는데 실패한 결과, 과거처럼 여론의 향방을 좌우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민주화시대에 상호의사소통의 활성화를 통해 우리사회의 판단 역량이 크게 신장한 탓이다. 

  문제는 조선일보가 이러한 시대변화를 '정치적 권력투쟁'의 탓에 돌리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데에 놓여있다. 조선일보는 언론으로서는 기준미달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언론으로서의 기준미달성과 정치적 당파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안티조선운동이 '언론개혁운동'이냐, 아니면 '정치개혁운동'이냐의 두 가지 목적성을 놓고 분열될 수 있다. 

  안티조선운동이 언론개혁운동일 때, 조선일보의 당파성은 '공정한 사실보도'의 기준 하에서 비판받지만, 이때 비판자들의 당파성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문제시되는 것은 '언론의 공정한 사실보도 여부'일 따름이다. 한편 안티조선운동을 정치개혁운동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할 때, 안티조선운동의 향방은 자기 당파의 '당리'에 따라 좌우된다. 당리들이 충돌할 때, 당파들이 분열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과연 안티조선운동에서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중요한가?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왜곡된 용어를 채용하면서 정명을 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귀감삼아 경계하지 않으면 삼투되기 쉬운 상징들이 존재한다. 합법적 의무사항인 언론사 세무조사가 언론자유 탄압의 상징으로 왜곡되었다. 법률집행이 안티조선운동의 성공인 것처럼 오해되었다. 운동의 열매를 각자의 당리에 따라 분배하자는 '공정성'의 개념이 등장하였다. 그 결과 안티조선운동은 원래부터 정치개혁운동의 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었고 도처에서 당파들은 깃발을 들고 헤쳐 모였다. 

  정치적 무관심도 사회적 병폐이지만, 정치과잉심리도 심각한 병폐다. 사실상 수십년 간 국회의 기능은 거수기에 불과했으며 태업이냐 아니면 파업이냐를 놓고 고심할 뿐이었다. 국회의 상시적인 기능마비와 고착된 지역감정은 표리의 관계에 놓여있다. 언론은 삼김상징을 통해 지역감정을 관리해서 시민들의 정치심리를 대권의 향방에만 쏠리게 만들어 놓고 대권 아래 여당은 거수기, 야당은 파업정당이라는 정치 무력화 현상을 정착시킴으로써 혼맥과 인맥으로 중첩된 기득권의 중추를 보존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이제 전라도는 천민이 아니며 경상도는 선민이 아니다. 오직 시민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도 체제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그때마다 경기의 부침에 따라 주어진 재정 하에서 정책적 선택의 우선성 문제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정치개혁은 안티조선이나 노사모의 운동을 통해 온 것이 아니라 개혁세력이 지역세력을 넘어설 정도에 도달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민주헌법의 작동과 정권교체의 보장이라는 거대한 정치개혁 이후에는 지역정당을 탈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들 각자가 거수기나 상시파업을 벗어나 소신에 따라 정책대결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회가 일하고 경쟁하게 하라. 그러면 이러한 선의의 정책경쟁을 통해 사회적 필요에 따라 불가피하게 지역감정 자체가 와해될 것이다. 

  수십년 간 입법부는 놀면서도 우리사회는 발전해왔다. 첫째로는 일상에 충실한 시민들 덕분이며, 다음으로는 우수한 행정관료들 덕분이다. 그러나 이제는 국회의 활성화를 통해 행정부의 관료주의를 제대로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시점이다. 복지제도가 점차 중요해질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사회의 정치적 단계이다. 언론과 여론의 과도한 대권중심 정치상징들은 이제 말소되어야 한다. 사회전체는 대통령 일인이나 청와대 참모조직의 일거수 일투족에 매달리기에는 너무나 거대해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전체로서의 우리 사회다.

  조선일보가 다소 약화되면서 조선일보가 수행했던 정치적 상징놀이를 각 정파의 입장에서 지속하는 인터넷 대안언론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재미있고 여전히 잘 먹힌다. 시민으로서 그 정도의 오락을 즐길 권리는 있다. 단지 오락을 오락인 줄 알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는 서구의 어떤 이념이나 사회과학을 암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다른 사회의 역사성에서부터 나온 이론들은 참고사항에 불과할 뿐 우리사회의 역사법칙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사회는 자신의 것을 스스로 연구하고 체득해야 한다. 사회관계는 논리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현행 추세의 확률을 고려한 각자의 결단과 책임성의 문제이다. 

  따라서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지성적이고 양식있는 판단력이다. 누가 내 판단을 대신해주지 않으며, 내가 내일 하게 될 판단을 지금 내릴 수도 없다. 안티조선운동은 언론에게 공정한 사실보도를 요청하며, 그에 따라 내가 나의 지성을 동원해서 판단을 내리고 그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자 하는 시민들의 운동이다. 판단에 스며드는 경향성이 선입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항시 주입된 이념성을 경계해야 한다. 각각의 판단은 매 사안마다 사안이 요청하는 만큼의 충분성을 갖추면 된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다. 

  우리모두는 언론개혁운동으로 시작했으며 여전히 언론개혁운동으로 남아있다. 그 과정에서 언론개혁운동을 정치개혁운동과 혼동한 사람들이 각자의 당파성에 따라 갈려져 나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에게 공정한 사실보도를 요구하는 언론개혁운동은 그저 시민이면 충분하다. 헌법에는 좌파시민과 우파시민이 없으며, 전라도 시민과 경상도 시민이 없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시민이면 충분하다. 언론개혁운동이 정치개혁운동에 대해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 이곳의 주도적인 목적에 충실하기만 하면 우리모두앙인 것이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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