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20030510 >

예전에 누리까페에 그에 관한 글을 올린 적도 있기는 한데, <빌리 엘리어트>란 영화는 아마 보신 분이 많을 줄로 압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영화이고, 얼마 전에 다시 보게 되었을 때도 눈물이 날 뻔해서 울음을 겨우 참았었지요. 줄거리를 얘기하는건 정말 싫어하는 일이어서, 간략한 상황만 말씀드립니다.


탄광촌 출신의 빌리 엘리어트라는 소년이, 광부인 자기 아버지와 함께 발레를 가르치는 왕립학교(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요)에 입학하기 위한 오디션을 치르러 런던에 도착합니다. 당시는 대처가 집권하여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던 시기였고, 빌리의 아버지 역시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지요. 빌리는 오디션을 치르지만, 자기가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홧김에 자신을 귀찮게 구는 한 남자아이의 얼굴을 갈겨버립니다. 그로 인해 빌리와 빌리의 아버지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훈계를 받는 처지가 되죠. 훈계를 마친 심사위원들이 빌리의 아버지에게, 발레에 관심이 있느냐는 따위의 질문을 던집니다. 평생 석탄만 캐고 살아온 빌리의 아버지야, 발레를 볼 기회도 거의 없었겠죠. 그는 멀뚱거리며 얼빵한 대답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은 빌리에게, 춤을 추면 어떤 기분이 드느냐고 묻습니다. 빌리, 머뭇대다가 '춤을 추면 날아갈 것 같고 .. 어쩌고저쩌고..' ..

대화를 마치고 일어서는 그들의 뒤에다 대고,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말합니다. "엘리어트 씨, 파업이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 심사위원이 누굴 놀리는건가 생각했었습니다.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


그 때, PC 통신 상에서 제가 있던 한 영화모임에 하종강님께서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하종강님은 빌리 엘리어트에 대해 글을 쓰면서, 그 장면에 관해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것은 결코 조롱이 아니라고. 그런 말을 조롱으로밖에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 사회의 시민 의식의 천박한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것은 조롱이 아니라, 한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보여주는 연대의 표시라고 .. 저는 그 말을 듣고,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왕립학교의 입학시험 심사까지 맡을 정도라면, 결코 가난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 식으로 말하자면, 강남에 몇십평짜리 집과 차 두세대는 갖고 있는 부르주아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상상할 수 있습니까? 벤츠를 타고 가던 사람이 옆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는, 차의 창문을 열고 '힘내십시오!'라고 외친다는 것을 말이지요. 고급 와인을 마시면서도 노동문제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요. 저는 그런 행동들을 굳이, 모두 모순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노동자들의 아픔에 연대하기 위해 그들이 꼭 와인 대신 소주를 마시고, 벤츠 대신 티코를 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그들이 자신의 부유함을 누리는 것을 비판하는기 보다는, 자신의 부유함을 위해 남의 생존권을 억압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만 파묻혀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해버리는 것을 비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풍족한 생활에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다는 것 역시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저는 그 모든 행동을 '연대'라고, 진정한 '시민으로서의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우리모두에 이명원님이 올린 글 중에, 김현이 김지하에게 했다는 말 한마디가 생각납니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나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없어. 난 대신 성실한 부르주아로 살다가겠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에, 미약하나마 연대와 지지를 보냅니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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