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대환 님 글은 20030422 진보누리 게시판 메인글.  내가 생각하는 좌우, 보진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물론 이사람이 더 잘 생각하고 더 잘 썼다.^^
이호곤 님 글은 20030424 진보누리에서 발견 >



[주대환] 한국사회에 왼쪽의 이념은 존재하는가?

무엇이 왼쪽이고 무엇이 오른쪽인가? 그 답변은 항상 사회 상황과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져 마땅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 국가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 전환해가던 90년대의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주도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왼편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국가사회주의를 고수하고자 하던 사람들을 왼편이라고 해야 할지 헛갈렸던 적도 있다. 그것은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타파하든지 고수해야 할 현상(現狀)이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지향하든지 거부하든지 해야 할 그 무엇이었던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군사적 개발독재의 시절, 또는 그로부터 정상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던 시기에는 그런 변화를 주장하는 쪽이 왼쪽이고 그런 변화를 거부하는 쪽이 오른쪽이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이 진보파로 인식되고 극우 파시스트들이 보수파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구분되지 않은 한 덩어리였으며, 따라서 진보와 개혁은 혼동되고,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지 무엇이 진정한 보수인지에 대해서 지식인들이 말하는 것과 대중이 말하는 바가 달랐다.


지금 우리나라는 15년 간의 민주화 과도기를 막 벗어나 정상적인 국민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비로소 그런 개념적 혼란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자본주의라는 세계사의 한 시대에 통용되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개념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듯하다. 조만간에 우리나라에서도 진보는 사회주의자, 보수는 자유주의자를 정확하게 가리키게 될 것이다.


정상적 국민국가가 아니었던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오른쪽도 없었고 진정한 왼쪽도 없었다. 파쇼적인 개발독재를 벗어나고자 하면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구분 없이 모두 개혁이었으며 모두 진보였다. 우리나라 언론이나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진보로 인식되고 분류되는 입장들은 사실상 일반적인 현대 민주주의나 인권의 범주, 아니면 우리나라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찬성하면 진보라고 분류되었으나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해야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할 때 극우적, 시대착오적 사고를 고집하는 자들이 보수를 자처하는 이상한 양상이 나타났고 사회 전반의 흐름보다 뒤쳐진 이러한 정치권의 추세를 사회 전반의 흐름으로 오인하여 추수한 데서 지난 대선 시기 이회창이나 이인제의 실패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보수의 주류를 차지하지 못하고 보수 가운데 가장 오른편, 극우적인 부분, 아니면 반동적인 부분을 자기 색깔로 받아들임으로써 낭패를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대변하고자 했던 부르주아지의 주류가 이미 내버린 색깔로 승부를 보고자 설쳤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친(親)조선로동당이면 왼쪽이요, 반(反)조선로동당이면 오른쪽이라고 생각하는 오랜 습관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5, 60년 전의 상황에서 비롯된 사고 습관인 것이다. 조선로동당이 모든 정치철학적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면, 그리고 조선로동당이 곧 왼쪽이라면 조선로동당이 훌륭하면 왼쪽도 훌륭할 것이고 조선로동당이 아름답지 못하면 왼쪽도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분단된 지 50년, 남북한이 각자의 길을 간지 오래되어 조선로동당이 남한 사회에서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런 사고 습관을 애초부터 가지거나 물러 받은 세대가 5, 60대 이상이니 2, 30대에게 조선로동당이 더 이상 진리의 기준도 아니고 좌우의 기준도 아닌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회창과 이인제의 실패는 그런 사고 습관이 이제 젊은 세대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모든 ‘진보’를 친조선로동당으로 몰아붙여 쉽게 무찌르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사실 김용갑 같은 사람들은 이회창의 표를 많이 깨었다. 이회창이 만약 김원웅을 앞장 세웠다면 노무현이 이회창을 이길 수 있었을까? 부르주아지의 특정한 분파가 아닌 계급 전체의 입장은 이제는 자유주의자를 원하는 것이다. 재벌은 노무현을 거북하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부르주아 계급 전체는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이회창을 거북하게 느끼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반국가단체인 조선로동당을 찬양하는 일체의 언행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행동이니 만약 친조선로동당이 왼쪽이라면 남한에서 왼쪽은 존재하기 힘든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민족주의에 기대어 용케도 친조선로동당도 존재하고, 반조선로동당을 기치로 한 가짜 오른편도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을 일당 독재로 통치하고 비현실적 정책으로 수십만 백성들을 굶겨죽인 조선로동당을 지지하는 어떤 세력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한총련이나 한총련 출신 주사파 운동권은 결코 진보가 아니다. 그들은 극좌파도 아니다. 촌스런 민족주의자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반조선로동당을 깃발로 하는 조갑제 같은 사람들은 조선로동당의 그림자 같은 존재이니 조선로동당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존재들이다. 그들 역시 일관된 극우파도 아니다. 분단국 남한에서는 이렇게 이념 스펙트럼이 이렇게 모두 왜곡되어 있었다. 진정한 극좌파 아나키스트들이나 진정한 극우파 파시스트들도 모두 이제야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진정한 좌파 사회주의자도 우파 자유주의자도 이제야 자기의 정체성을 인식하거나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누군가를 반대하는 것을 자기의 존재의 이유로 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한국은 OECD 회원국이고 스페인 수준의, 부분적으로는 이탈리아 이상의 경제적 발전을 이룬 나라로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갈 예비군으로서 정치적으로도 이제 선진국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럽식으로 진보와 보수의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들이 무지개처럼 나타나는 가운데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양대 정당이 중심을 잡는 그런 정치구도를 형성하게 될 가능성보다는 미국식으로 전반적인 자유주의 우세의 지형 속에서 자유주의의 두 분파가 양대 보수 정당을 형성하고, 사회주의적 진보파는 자유주의 좌파 정당에 포섭되거나 아니면 그를 통해서 주장을 드러내는 정도로 그치고,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극우파들도 자유주의 우파에 포섭되거나 그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낼 가능성이 보다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정치철학의 흐름을 놓고 자유주의의 흐름을 오른편, 사회주의의 흐름을 왼편이라고 부르는 세계사 서술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좌와 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두고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각기 다른 전망을 제시하고 주장을 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점점 더 크게 달라지고 있다.


장하성 교수는 노무현 정권의 경제 정책 책임자들에 대해 “경제팀 개혁 간 데 없고 안정만 남았다.”고 비판한다. 장하성 교수는 진정한 자유주의자로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 장하성 교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좌(左)인가 우(右)인가? 장하성 교수는 우(右)다. 진정한 우(右)인 것이다. 자유주의적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은 이제 ‘보수’라고, 보수 내의 개혁파라고 불러야 한다. 유시민은 스스로 자유주의자를 자처하고 있거니와 새로운 우파, 진정한 우파의 이론가로 자리 매김할 것이다. 문성근과 명계남과 유시민과 강준만, 그들이 진정한 우파인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부유세를 신설하고, 간접세를 줄이고 직접세를 늘이고, 상속세나 재산세율을 높이거나 엄격한 법률적용으로 재산과 소득이 많은 사람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걷고, 더 많이 걷은 세금으로 복지 예산을 크게 들이자는 주장을 한다. 그들은 또 군비를 축소하여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실시하자고 주장한다. 그들은 노동조합에 보다 많은 자유와 권한을 주자고 주장한다. 그들이 왼쪽이고 진보파인 것이다. 그들은 유럽의 진보정당들이 주장하고 실천해왔던 정책들을 우리나라에도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한국의 진보파들에게 지난 대선은 참으로 의의가 크다. 부유세라든지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슬로건이 진보의 내용을 채우고 진보의 정체성을 대중적 차원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이른바 ‘운동권’의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메우고 있던 국가 사회주의적 ‘맑스-레닌주의’의 환상을 벗어나 한국의 사회주의자들, 좌파는 이제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사의 우여곡절 속에 좌파 이념들이 상호 교배와 생식을 거듭하고 진화를 거듭하여 나타난 현대 사회민주주의, 유럽 진보정당들의 이념과 정책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내건 슬로건과 정책들은 유럽 진보정당이 이미 이루어 놓은 것들이다. 유럽의 노동자에게 사회주의는 더 많은 세금과 더 많은 복지 예산을 의미하고, 실업과 산재와 질병과 노후생활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보장을 뜻한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보다 능동적으로 보다 진지하게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철학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에서 ‘진보’도 대중적 정치 세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권영길의 선전(善戰)은 바로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자본주의와 한국 사회의 발전 단계와 그 모순이 바로 사회민주주의적 평등 이념과 정치철학,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정책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과 연대의 정신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통일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더욱 절실하다.


사회민주주의는 현대의 대승불교다. 삼국시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승 불교를 열렬하게 받아들여 세계적 수준의 나라를 만들고 통일을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세계적 수준의 나라를 만들고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하고 순진하다고 나무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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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곤] 어느 노무현 지지자의 물음에 답하며...


민주노동당은 ‘보수개혁주의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가?
-어느 노무현 지지자의 물음에 답하며-



얼마전에 나는 정치학 박사과정의 한 노무현지지자를 만났다. 그는 대통령선거전의 어떤 모임에서 권영길후보를 지지하는 박사과정의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였지만, 권후보의 지지자가 자신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일제식민지체제 시기를 예로 들자면,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무력 통치에서 문화통치나 제한적인 조선인의 자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한편 식민지체제를 합리적으로 바꾸는 것이 조선사람들에게 덜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당시로는 불가능해보이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요.
이처럼 식민지권력 자체를 해체하고 싶어하는 그들에게 식민지권력을 합리적으로 행사하라는 문화통치나 자치를 위한 운동만 벌이라고 하면 조선의 독립은 없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노무현후보에게 당신이 투표한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수구세력이 지배하는 소수독점체제를 조금 더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개혁하면, 많은 사람들이 덜 고통스러워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여전히 아프고 힘들어 할 사람들이 있지요. 모두 다 당신처럼 노무현에게 투표하면 그들을 대변하는, 소수의 지배세력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남한의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당,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는 거지요.”

그는 선거전에 나를 만났다면 투표를 달리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내친김에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최근에 내가 책에서 읽은 것을 약간 바꾸어 비유를 해볼까요. 굽은 절벽 길에 사람들이 급히 차를 몰다 자꾸 떨어졌습니다.
마음씨 착한 사람들은 구급차를 대기시켜놓고 그들을 병원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일부의 사람들은 절벽에 울타리를 치자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다니지 왜 차를 타고 다니느냐고 합니다.
벼랑길에 울타리를 쳐도 급히 차를 몰다가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이 생기니 어떤 사람들은 아예 안전한 새 길을 내자고 주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사회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불행의 원인보다 결과에 대한 처방을 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현실적’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입니다. 문제의 근본원인을 없애기 위한 노력보다 지금 당장 실현가능한 것, 부분적 예방책을 찾는데 주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로 민주당의 개혁파와 개혁적국민정당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들은 사회제도보다는 개인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데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반문명주의자나 소규모 공동체운동에서 많이 보이는 정치적 냉소주의자들입니다. 네 번째 사람들은 문제의 근본원인을 없애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사회제도를 만들자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 같은 민주노동당의 당원들 입니다.
저는 이런 네가지 노력들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다 소중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여기서 말한 다양한 역할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사회사업을 돕기 위한 성금을 내거나 저소득층 방과후학교의 운영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분적 개혁, 개량을 위한 활동을 하고 노무현정부의 개혁을 지지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건강하고 진보적인 삶을 살기위한 노력을 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누군가 사회사업, 부분적 개혁, 개인적 삶의 자세 바꾸기 등만으로 문제해결이 충분하다든지 각자 자신이 하는 일이 문제해결에 가장 중요하니, 나에게 새 길을 내는 노력을 그만두라고 한다면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겠지요.
새길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든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든지, 새길을 내는 노력이 자신들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든지 하면서 새 길을 내기위한 나의 노력을 유보시키거나 그 의미를 왜곡하려 한다면 저는 그것에 반대하여 싸웁니다. 앞의 세 가지 노력만 하다보면 저절로 새 길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새길을 내려는 노력이 앞의 세가지 노력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그러면 노무현의 개혁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고 물었다.

“노무현, 유시민, 강준만 등은 스스로 인정하듯이 보수주의자이면서 개혁주의자입니다. 그들은 개혁을 위해 수구세력과 싸우지만 그들의 싸움과 개혁은 수구세력이 지배하는 권력과 체제 자체의 해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소수특권층의 권력이 합리적으로 행사되기를 바라고 특권층의 반칙과 부패를 개혁하려 하지만 특권층 자체를 없애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정치적 입장과 더불어 권력을 위한 욕망 때문에 그들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입니다.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는 여러 문제들에서 보수의 힘이 센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의 편을, 진보의 힘이 센 사안에서는 진보의 편을 더 많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지기 전과 가지고 난 후의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그것이 보수와 진보의 어느방향으로도 일관되게 나아가지 않는 그들의 정치노선, ‘현실주의적 개혁노선’이 가진 유일한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다수의 국민들이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도 개혁에 대한 전망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노무현의 말과 행동, 실천은 한편으로는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대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열망을 보수적인 틀과 전망속에서 가두어 두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치개혁, 재벌개혁, 교육개혁, 언론개혁, 검찰개혁, 의료개혁 등에서 그의 개혁목표는 정치인, 재벌소유자, 학교장, 언론사 사주, 검사, 의사 등이 가진 권력을 제한하여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권력이 행사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은 우리 사회의 정치와 경제, 교육, 언론, 검찰, 의료 등의 문제로 인해 다수의 국민들의 받고있는 고통을 부분적으로 완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러한 보수적 개혁마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적 상황에 따라 기회주의적으로 처리합니다. 해양수산부장관이 되기 전과 후 새만금에 대한 태도, 대통령 되기 전과 후의 미국에 대한 태도, 교육부 장관이 되기 전과 후의 교육정보화시스템 네이스에 대한 태도 등등 말로 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요.


우리는 국민들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대변하여 수구세력과 싸우는 노무현을 지지하지만 수구세력과 타협하여 국민의 열망을 지금의 체제에 가두려는 그의 언행과 정책에 비판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노무현의 보수적 개혁에 대해 우리의 진보적 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수구세력과 싸움을 하거나 개혁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그들이 수구세력과 진정으로 싸울 의사가 있으면
자신들보다 더욱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이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들의 이러한 행동이 수구세력과의 싸움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들의 더 많은 개혁, 더 근본적 개혁을 위한 요구에 대해 ‘비현실적 또는 관념적’이라며 공격합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수구세력과 같은체제의 수호자 역할, 보수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합니다. 그들은 수구세력과의 권력경쟁을 위해서 또는 그들의 신념과 원칙에 의해서 수구세력과 싸움을 하지만 다른 한편 같은 이유로 그들과 협력하여 체제를 수호하고 진보세력을 억압합니다.
그들과 우리가 수구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에는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남한사회의 미래와 권력을 놓고는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이나 유시민을 지지하는 네티즌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네티즌들 사이의 논쟁을 보면 비판이나 논쟁의 초점이 ‘그들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에 가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나는 노무현이나 유시민과 같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그들 지지자들도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나 목적이 좋으냐 나쁘냐, 그들이 나와 같은 정서를 가졌느냐 아니냐, 개인적으로 친하냐 아니냐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진 정체성, 정치적인 전망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 실제의 말과 행동, 실천을 통해 나타날 때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판의 초점은 인간 노무현이나 유시민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유시민은 좋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가 87년 대통령선거에서 4자필승론을 이야기 한 것은 잘못이지요. 노무현은 좋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가 김대중과 같은 미국식 정치, 경제체제를 향한 개혁을 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파병을 결정한 것, 노동자들에게 불법파업엄단 운운하는 것 등도 물론 잘못이지요.”



그는 왜 이런 이야기를 다른 민주노동당원이나 당의 선전물에서는 제대로 볼수 없는지 물었다.

“사실 우리당도 그런 점에서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당간부들을 포함한 다수의 당원들이 민주노동당이 가져야 할 정치적 입장을 모든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일관되게 적용시킬 만큼
계급적으로, 정치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탓이지요.
당의 신문이나 성명서, 논평, 특보 등이 나 당의 대중정치가들이 그런 것을 제대로 할만큼 우리의 역량이 성숙되지 못한 탓에 세련되게 당의 입장을 표현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 전국민의 관심을 끈 검찰인사와 개혁에 관한 노무현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토론회에 대한 당의 논평이 있었지요. 노무현정부의 물갈이를 지지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개혁방안이 없음을 비판하면서 몇가지 검찰개혁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정한 인사위원회구성, 기소독점주의 폐해시정, 상명하복제 폐지, 검찰총장의 지위와 독립성 강화, 특검제 상설화
등등으로 우리당의 검찰개혁에 관한 입장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당의 전략적 사고가 묻어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은 보이지 않습니다. 진보정당의 논평이 한겨레 신문이나 개혁적국민정당의 논조와 별차이가 없지요.
우리의 검찰개혁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사이의 정치적 중립이나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 뿐만이 아닐겁니다. 자본과 노동, 권력기관과 시민들, 사회적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시장과 자본, 국가를 수호하는 검찰이 아니라 그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인간적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는 검찰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수호하는 일을 주업무로 하는 검사들, 공안사건과 시국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들이 주도하는
특권층화된 검찰의 해체이며 권력의 부폐와 불의를 엄단하는 반부폐검사, 약자들의 짓밟힌 권리를 찾아주는 민생검사들이 주도하는 평민화된 검찰의 건설입니다. 그럴려면 무엇보다 검사의 수를 늘려 ‘격무에 시달리는 검찰’을 격무로부터 해방시키면서 검찰내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검사를 소수전문화하고 검찰의 중심을 민생검사와 반부폐검사들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런 것이 남한사회의 다수 국민을 위하고 피지배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이 요구해야 할 검찰개혁의 내용에 기본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검찰체제 자체를 뛰어넘지 않는 검찰개혁을 주장한다면 목표와 방향은 같은데 노무현과 개혁의 시간표만 다른 것이 되고 말지요. 그래서는 우리당이 ‘노무현은 혁명중’(오마이뉴스)이라는 말로 검찰개혁의 보수적 한계는 숨기고 그 의미는 과대포장하는 보수개혁주의자들의 선전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번 보궐선거뿐만 아니라 내년의 총선을 거쳐 노무현의 집권기간 내내 우리는 노무현의 개혁에 대해 어떤 태도를 표명해야 할 것이다. 그럴때마다 그 문제가 파병결정이든, 철도민영화이든, 선거법개정이든, 교육문제이건 간에
우리당이 그들과 어떻게 다른 사상을 가졌는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즉, 그들이 존중하는 가치와 우리가 존중하는 가치들이 얼마나 다른지를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시장과 효율성, 약육강식의 경쟁, 개발과 성장 보다 인간적 요구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 기본적 인권, 사회적 책임, 연대와 협력, 강자와 약자간의 정의로운 질서, 절제와 생태계와의 조화 등등을 대비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혁사안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다른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진보적 개혁에 대한 상을 제시하고 이를 기준으로 노무현의 보수적 개혁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다수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에 대한 보수적 전망을 넘어설 수 있게 해야 한다. 남한 민중 가운데 노무현의 보수적 개혁만으로 행복할 수 없는 계급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 우리가 이런 차별성을 분명하게 보이지 못하면 우리는 노무현과 같은 정치적 지향을 가졌지만 개혁에 대한 시간표만 다른 집단으로 보일 것이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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