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04014 우리모두 / 토론 / 문화연구, 이대로 좋은가 >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다큐멘터리 <콜롬바인을 위한 볼링 Bowling for olumbine>은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날이었다. 우유배달부는 어김없이 우유를 나르고 있었고, 농부들은 어제와 같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으며,
대통령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이름 모를 어느 도시를 폭격하고 있었다."

"우리는 총에 미친 멍청이들인가, 아니면 그냥 멍청이들인가?(Are we a nation of gun nuts or are we just nuts)"라는 포스터의 문구가 말해주듯, 마이클 무어는 총과 폭력성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재치와 풍자를 통해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웃음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결코 무디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어의 유머는 특별하다.

무어는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사건부터 시작해서 여섯 살 아이의 총에 죽은 다른 여섯 살 여자 어린이, 그리고 전국총기연합회의 집회로부터 대형 슈퍼체인의 총기판매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이 총에 가진 집착과 이것의 원인 및 결과들을 추적해 나간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주제는 결코 총기규제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캐나다인들은 미국인들보다 더 많은 총을 소지하고 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총기로 인한 사고가 일년에 평균 300번인 반면, 미국에서는 총 11,000번으로 캐나다의 35배를 넘어선다. 그렇다면 단지 총이 많다는 것이 총기사고의 주된 원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총기사건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서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아주 손쉬운 해결책이 있다. 바로 대중문화를 비난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영화, 음악, 뮤직비디오가 그들 내부에 잠재된 폭력성향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콜롬바인 총기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은 마릴린 맨슨의 음악과 매트릭스 등의 영화였다. 수많은 청소년들을 앗아간 그 어처구니 없는 사건에 대해 무수히 많은 '전문가'들이 수없이 많은 '처방;을 제시하였다. 폭력적인 영화, 선정적인 텔레비전, 비이성적인 대중음악,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요즘 애들'의 혈기 등.

하지만 그런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어디 미국인들 뿐인가? 캐나다는 미국문화의 가장 큰 소비시장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사회의 폭력의 손쉬운 용의자로 대중문화를 공격하는 것은 그다지 공정한 처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 보자. 잠시 죽은 시늉을 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배우들과 주권국가의 상공에 수십만 개의 폭탄을 떨어뜨리는 살륙을 선두지휘하는 대통령 가운데 누가 더 폭력적인가?

마이클 무어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묻는다. 부시 대통령의 학살과 맨슨의 락음악 가운데 누가 더 청소년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고. 자신이 뽑은 대통령이, 자신이 낸 세금으로 수백만의 머리 위에 폭탄을 쏟아붓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식들이 학교에서 주먹질을 배워올까봐 걱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두 명의 고등학생이 13명의 학생들을 사살했던 콜롬바인 고등학교는 미국 콜로라도주의 리틀튼(Littleton)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 사람을 먹여살리는 가장 큰 기업은 군수회사인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이다. 무어가 그 회사의 책임자에게 콜롬바인 사건의 왜 일어난 것 같느냐고 묻자, 그 역시 앞에서 '전문가'들이 제시한 '정답'을 나열한다. 세태를 한탄하는 그 관리 뒤로 미사일 조립 라인은 계속 가동되고 있다.

대량학살 무기를 만들어 팔면서 자기의 아이는 폭력을 모르고 살기를 바라는 이 '순진한' 가장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스스로 옳지 않다고 믿는 전쟁에 대해 '국익을 위해' 군대를 보내기로 한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들이 '이익을 위해' 주먹과 칼을 꺼내드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이클 무어가 주목하는 것은 총기 자체보다는 이처럼 우리 주위에 일상화된 폭력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고 이에 열광하기까지 하는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무감하면서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작은 폭력에 대해서는 한없이 소심하고 민감하다. 그리고 이 폭력은 상대에 대한 증오보다는 공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무어의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미국인들이 이라크인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허구적인 공포는 권력과 언론이 대중을 선동하고 동원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지금 그들을 쏘지 않는다면 그들이 우리를 쏠 것이다."

무어가 보여주는 폭력에 대한 무감함과 비이성적인 공포는 단지 미국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전쟁을 부추기는 한국언론들을 보자. 그들의 눈을 들여다 보면 공황에 가까운 공포심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이라크를 두려워하고, 북한을 두려워한다. 이런 비이성적인 공포는 상대를 이해하고 대화하기보다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도록 요구한다.
무지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폭력을 낳는 법이다.

공포에 퍼렇게 질린 한국의 언론들은 말한다. "나는 그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전쟁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전쟁 뿐"이라고 말이다. 공포는 끊임없이 남에게 위해를 가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피해자라고 믿도록 한다. 그리고 야만의 땅으로 변해버린 미국과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허구적인 공포다.

오늘도 일면기사를 통해 '국익을 위해' 전쟁에 나서야 하며, 북한에도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보수일간지들. 그들이 바로 뒷장에서는 '유해한 대중문화'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날 나의 미래의 아이를 위해 애도사를 쓴다.

<후기>

<콜롬바인을 위한 볼링>은 칸느에서 20분이 넘는 기립박수를 받으므로써 칸느사상가장 긴 기립갈채를 받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부시를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갈채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그러나 그의 열정적인 반전연설 이후 <콜롬바인을 위한 볼링>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두 배 넘게 늘었으며, 그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로 한 극장의 수가 세 배가 넘게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50주 넘게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누려오던 그의 저서 <멍청한 백인들 Stupid White Men>이 다시 베스트셀러 1위로 올라왔으며,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 비디오 예약주문의 수가 영화 <시카고Chicago>를 넘어섰다. 황폐한 모래사막에도 봄꽃은 피는 모양이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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