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언이 필요해;;;;;; 20030711 우리모두

내 동기 중에 '쿨한' 내지는 '스마트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무리가 없을 동기 녀석이 하나 있다.
학번 모임이랍시고 대학 졸업까지 한 놈들이 두세 달에 한 번씩 볼 때도 
회사일 바빠서 늦긴 하지만 어지간해서 빠지지는 않고, 둥글둥글 사람을 아주 잘 대하는 그런 친구. 예를 들면...상대방이 좀 절실한 부탁을 해올 때에도 그 사람 기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거절할 줄 아는(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님), 
사람 대하는 데 있어서 비상한 친구이다.

근데 어제 전혀 예상 못했던 제 3자(동기와 나 둘 다를 알고 있긴 하지만)에게서 
"XX 오빠가 '창사랑'에 있었던 거 아세요?"란 말을 듣고 무척 놀랐었다.


왜 놀라는가 하면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거(특히 정치/사회 문제)를 잘 말하는 편이다. 학번 모임쯤 되면 더 그렇다. 한 번은 "김대중 정권이 역대 최고로 부패한 정권"이라는 또다른 동기 하나랑 투우사랑 투우처럼 씩씩댄 적도 있고...

문제의(?) 동기 녀석은 원래 그런 대화에는 잘 끼지 않는 편이긴 하다.


하여간 창사랑 회원이었단 얘길 들으니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서 한 마디도 안 한 그런 행동방식이 '둥글둥글'의 비결이었던가..."
"그에 비하면 난 너무 처세란 거 신경 안 쓰고 막 살고, 막 말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내가 어떻게 나올지 알 만한 놈이니깐 다른 상황이라면 말도 하고 그랬을 것을 나 있는 자리라 자기 생각도 표현 안하고 그런 거 아닌가?"

등등.
절대 그런 게 아닐 텐데도 왜인지 뒤통수 맞은 느낌이며, 미안한 느낌이며....그런 게 들었다.
다음부터 그녀석과 마주 앉으면...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아니아니, 이게 벌써 일종의 가식 아닌가.......친구 사이에 이 무슨...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뒤엉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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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뿔] [re] 조언이 필요해;;;;;;내 경우에는


제 주변에는 보수적인 인물들이 많습니다. 

집안 식구들이 그렇고, 자란 동네가 그렇고, 그러다보니 친구가 그렇고, 저 역시 특별히 진보적인 인간인 건 아니고, 될 수 있으면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는 힘을 쓰지만, 그 합리라는 것도 매우 소극적인 의미의, 그러니까, 내 삶에서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범위에서의 합리적인 사고에 만족하고 삽니다. 

대개의 친구들은 아주 보수적인 층들입니다. 

저는 그 사이에서 아주 둥글둥글하게 삽니다. 

한달이면 한 두 번, 이 먼 일본까지 전화하는 둘도 없는 친구는 상당히 보수적인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지난 대선 직전에 전화했을 때, 남편은 회창이를 지지하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친구는 제가 노무현지지를 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지도 대견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친구는 여직껏 한번도 투표한 적이 없으나, 이번에는 아들이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고하니 학습의 일환으로 투표장에 데리고 가고 싶은데, 누굴 찍을까하는 얘기였습니다. 남편은 당연히 회창이를 찍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라고, 낄낄거리면서 말입니다. 몽준이를 찍으라면 찍겠는데, 왜 도대체 무현이랑 손을 잡았는지 모르겠다는 게 제 친구의 생각입니다. 회창이를 찍는 것은 사회내 주류의식이 강한 남편의 성향이 불만인 친구의 감성과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반하는 것이라 꺼려지지만, 무현이를 찍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는 보수층의 고민이지요. 

물론 저는 둥글게족이다보니, 왜 무현이를 찍는 것이 당연한가를 사회정의차원에서 설명하지 않고, 왜 무현이를 찍기로 했는지 슬슬 얘기하고는 끊었습니다. 

물론 그 친구가 누구를 지지했는지, 혹은 요번에도 투표를 안 했는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그런 거 아닐까요? 


만약에 말입니다. 

시만님의 그 친구분이 시만님이 전혀 몰랐지만 사실은 노사모회원이었다면 시만님은 어떻게 느끼셨을까요? 

제 친구는 아주 감정적인 저보다 더 합리적인 인간입니다. 

전체의 이익과 자기의 이익을 비교해서 전체의 이익이 자기의 희생에 비해 크게 플러스가 되는 사안이면 주저 없이 양보할 줄 아는 합리성, 거기다가 단지 희생적인 인간이 아니라 전체의 이익이 자기의 희생의 크기에 비해 별로 플러스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누가 뭐라해도 단호히 거절할 줄 아는 과단성도 갖춘 인간입니다. 

그 친구는 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저도 역시 과거에는 이렇게 합리적인 친구가 이념지향성이 보수적인 것에 대해 의문을 갖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향이나, 이념,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항상 한 방향으로 조합되어 인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남편과 결혼한 것은 남편이 한국남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 남자, 제가 가장 그 이념지향성을 신뢰하는 제 남동생조차도 극복하지 못하는 폭력의 내재화를 경험하지 않는 문화에서 자란 사람인 것이 저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매우 보수적인 인간입니다. 남편의 부모님보다 더 보수적입니다. 남편의 어머니와 저는 전화로 수다를 잘 떠는데, 대개는 남편의 갑갑한 성격에 대한 험담입니다. 

저는 이념지향만큼이나 삶의 태도, 사고방식(이념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생활양식이나 방법적인 면의 사고), 몸에 밴 감성이나 습관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의 보수적이고 갑갑한 태도는 개인주의적인 남편의 사고방식에 도움 받아 크게 불편을 느끼지 못합니다. 

간혹 정말 불편할 때에는 제가 큰소리로 지랄지랄하면 남편이 삐져서 좀 침묵한 후에, 하루쯤 휴전기간을 거쳐 서로가 양보할 수 있는 제안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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