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816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서양의 민족국가는 주로 근대의 산물이며, 국가의 이념은 근대적 갈등의 산물인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였다. 흔히 말하는 [좌우의 이념갈등]이란 과도하게 단순화된 표현이며,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정치적 민주화와 전체화, 자본의 사유화와 사회화 사이의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의 합리적 조절과 교정 과정이다. 그래서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균형과 절충은 각기 그 역사적 궤적이 다르다.

좌우의 이념갈등, 혹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 등의 도식적인 선전문은 일종의 전략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단순화되고 극단화된 모형은 선명한 메시지를 통해 대중동원이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빛의 천사들과 악룡들은 아마겟돈의 전투를 벌인다. 권력투쟁은 현대세계에서도 종말론적 신화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집단자살교도의 광신적 종교가 아닌 한, 권력을 잡은 뒤에 집권층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하며, 사회적 피해와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필수적인 전진을 하기 위해 택해야할 합리적인 방안들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그 한 두 개의 대안을 놓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 소위 정쟁이다. 대개는 조금 빨리, 혹은 조금 늦게 [2% 더와 덜]을 놓고 최후의 결사항전을 하는 준비하는 비장한 드라마가 모든시대 모든 나라의 정치현상이다.

선거철마다 제의적으로 순환되는 종말론적 투쟁은 전통적 신앙이 붕괴된 근대 무신론 사회의 집단 정신병이 영웅정치의 신화로 투사된 모습이다. 따라서 근대 언론의 권력비판은 신화적 대중동원에 대한 탈신화론적 감시와 비판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영웅신화적 최면과 세뇌에 의한 대중동원은 필연적으로 극우와 극좌의 전체주의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영웅의 신화를 현실화하려 하며, 영웅의 혈로에서 대중은 짓밟히는 개미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권력의 신화를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웅 신화를 창출하고 보급한다. 이들은 예언자 전승이 아니라 왕정신학자의 전승을 물려받았다. 이들은 권력을 감시하고 민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창출하고 민중을 동원하는 기능을 본업으로 한다. 사회가 민주화, 자치화되어 가는 전환기에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언론이 새로운 권력창출의 거점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언론의 제자리찾기]를 촉구하는 시민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언론을 비판/감시하는 시민운동조차도 권력창출의 새로운 거점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새로운 비판운동이 등장할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러한 갈등의 핵분열은 악순환이며, 아래로부터 통합되는 민주화가 아니라 오히려 분열되고 절단된 전체주의의 다양화다. 통합되지 않는 전체주의적 분파들은 사회를 해체시킨다. 가정에서 가족관계가 분열되고 절단되면 가정이 해체되는 것과 같다. 지성과 양심에 근거한 최소의 필수적인 공감대는 사회적으로 보존되고 건전하게 육성되어야 한다. 사회윤리란 기본적으로 각자의 인간미의 문제이다.

그러나 악순환에 대한 해법은 오히려 단순하다. 정치권의 권력투쟁에서 종말론적 선악투쟁의 신화를 벗기면 된다. 언론이 탈신화론적인 권력감시와 권력비판을 하면 된다. 언론을 비판하는 시민운동이 불필요하게 되면 된다. 민주주의 헌법정신에 따라 정치권은 사회적 갈등을 민주적으로 통합하면 되고, 언론은 권력의 오남용을 감시하고 탈신화화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서 정치와 언론이 각기 제자리를 찾으면 된다. 그렇게 되면 시민들은 제각기 관심과 흥미의 공동체에서 사회를 위한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민주주의 대중문화운동이다.

빛의 천사와 악마의 자식들이 대단원의 격전을 벌이는 아마겟돈의 전투는 신화에 불과하다. 신화가 민중의 열정을 동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의식적 열망에 대해 원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점괘와 같은 것이다. 한편 정책결정은 전혀 다른 수준의 것이다. [조금 빨리, 혹은 조금 늦게, 2% 더 혹은 2% 덜]을 놓고 정책토론할 때 분개심과 적대감을 동원해서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비정상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초연해야 한다. 언론비판운동에서 필요한 것은 영웅신화의 집단적 열기로부터 면역된 초연한 평정심이다. 민주주의 대중문화를 창출하는 시민운동의 첫단추는 전염성 영웅신화로부터 초탈한 평정한 마음들의 연대다.

초연한 태도는 오히려 보편적인 인간미를 배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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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7 우리모두

지난 4년간 국민적 수준에서 인터넷 토론이 활성화되었다. 민주화의 오랜 염원이었던 '의사표현의 자유'가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한 사회쟁점의 다각적 접근에도 발전이 있었다. 민주적인 대화토론의 바람직한 수준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대다수가 언론을 교시적으로 수용하던 때를 돌이켜보면 실로 주체적인 사고와 표현의 환골탈태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도가 한 척 자라나면 마는 삼 장이 늘어난다는 말이 있다.

공동체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는 국민통합의 문제는 1)공동의 체험을 지향하는 체험의 민감성, 즉 약자에 대한 역지사지의 공감대와 문제해결의 현장에서 당면하는 난관들에 대한 공동의 민감성을 전제하며, 2)복잡한 사태의 요소들을 질서있게 파악하는 지성적 통찰과 신선한 문제해결방식을 조망하는 지성적 창의력, 3)이용가능한 자원과 기술의 한계 안에서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를 우선시하여 문제해결의 가닥을 잡는 판단의 균형감각과 차분한 인내심, 4)민주적인 설득과 결정을 통해 공동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행동력을 전제한다.

공감대와 민감성, 통찰력과 창의성, 판단력과 가치순위, 설득력과 행동력이 두루 원만한 균형을 이루어야만 최선의 사회적 통합이 달성된다는 원리는 그 어느 공동체에도 예외가 없다. 더구나 민주사회는 이러한 인간적 능력들이 어느 한 영웅적 지도자에게만 은총(카리스마)적으로 구비되어 있어서, 그 지도자의 결정을 자동적으로 추종하는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사회적 통합과정 안에 자기의 공감대와 민감성, 자기의 통찰력과 창의성, 자기의 판단력과 가치관, 자기의 설득력과 행동력을 투입해야만 한다는 점에 있어 고도의 인내심과 관용력, 열린 마음과 선의를 요청한다.

간단히 말해서, 민주사회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선의의 경쟁의 문제이다. 이제 경쟁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현상에는 두 가지 매우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 이른바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승리주의'와 승자는 없이 공익이 승리하는 '사안별 경쟁'이다.

승리주의는 처음부터 자기편의 승리를 지향하며 이용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승리주의에서 최선의 귀결은 경제적으로 '독점'이라고 부르고 정치적으로 '독재'라고 부르는 권력독점 현실의 창출이다. 승리주의의 추진자들은 영웅적 독재자, 이데올로기, 탈법적 기득권, 교조적 계급투쟁, 자동적 지역감정, 집단적 이기주의 등 모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집단이다. 이들은 사회적인 수준에서 종교적 선민의식을 천명하며 그러한 선험적 귀족주의에 합당한 물리적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 세습하려고 노력한다. 승리주의의 분파들이 충돌할 때 세력경쟁이 발생하고, 세력은 세력을 압도하여 탄압한다.

한편 사안별 경쟁은 자기편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구체적인 때와 장소에 따라 사안별로 발생하며, 문제와 연관된 거시구조는 역사의 고유한 문맥 안에서 이제는 공익적 기능을 상실한 구태의연한 제도들에 국한된다. 따라서 사회개혁에도 사안별로 큰 수술이 있고 작은 수술이 있다. 세계체제가 문제라면, 세계체제의 변혁은 내부적으로 민주화된 각 국가들이 자국이기주의를 벗어나 국제적 세력균형의 틀을 깨고 민주적인 자기교정력을 세계적인 수준에서 획득할 때에야 달성된다. 그 중간과정은 유럽/동아시아/중앙아시아/미대륙 수준의 거대 지역단위 민주적인 결합이며, 이러한 지역공동체의 결합은 아직도 모색단계에 있다.

사안별 경쟁은 수시로 가치에 따라 헤쳐 모이는 가치공동체들의 경쟁이다. 19세기 이념정당이란 식민지 제국주의 수준에서 국내통합을 위해 조성된 과점적인 민주화의 소산이다. 이념이란 19세기의 사회수준에서 자유, 평등, 이익 등에서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하여 그 단일 가치를 최상위에 놓고 그에 따라 연역된 한 꾸러미의 정책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그것은 19세기 논리주의의 결실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극우민족주의 등은 밀의 논리학과 헤겔의 논리학을 당시의 사회에 적용한 변증적 연역의 결실이다.

19세기 서구사회에서 왕정독재와 귀족독재를 겨냥한 과점적 민주화는 진보였지만, 오늘날 과점적 세력균형은 민주적인 사안별 경쟁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왕정독재는 귀족과점의 도전을 받았고, 귀족과점은 유산층 신흥자본가의 도전을 받았고, 유산층 신흥자본가의 과점은 무산노동자층의 도전을 받았다. 20세기 내내 이러한 이념정당의 양당제적 과점의 틀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념정당은 이미 구태의연한 제도일 뿐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이념 꾸러미만을 선택해야만 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사안별로 그때마다 독자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중층적인 지역감정의 과점정당이다. 한국의 양당이 중층적인 이유는 지역감정이라는 자동성의 큰 틀 안에 나름대로 이념지향성, 정책지향성, 사안별로 개혁적인 판단들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이념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지역감정을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한다. 우리시대의 지역감정은 지역의 이익이나 지역의 고유문화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구획한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서구이념을 대체하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전통적인 역사관이다.

중국의 존왕양이 중화사상이 존재한다. 일본의 천황중심 신국사상이 존재한다. 한국의 신라중심 사대주의가 존재한다. 서구의 민족은 근대 200년의 산물이지만, 동아시아의 민족은 3000년 이상의 갈등의 산물이다. 그것은 근대적 개념의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 혈통과 문화에 기반한 1300년 이상의 실체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에서 근대 자본주의는 100년 미만의 역사를 지닐 뿐이다.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쥐잡는 고양이에 불과하다. 서구이념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패권주의, 전체주의의 근대적 도구에 불과하다.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주변국을 한족 내의 소수민족으로 보는 중국의 중화패권주의, 국민을 신민으로 보는 일본의 천황제 자본주의, 그리고 한국에 고유한 무속적 연대성에 기반한 지방자치 민주주의 모델들이 등장하고 있다. 각 모델들은 현재 국내적으로는 각자의 전통적인 역사관과 충돌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는 그 일반성과 통합성에 있어 경쟁하고 있다. 이 중에서 아직은 태동단계에 있는 한국의 민주적 모델이 동아시아의 공익을 위한 보편적 모델로서의 잠재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세력과 흡수력으로 따지면 고구려를 지방정권으로 흡수하는 중화패권주의를 감당할 수는 없다. 따라서 차후의 전개상은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민주주의의 사안별 경쟁이란 정당도 없고, 정파도 없다. 광신도도 없고 ~빠도 없다. 국회의원들은 정책 사안별로 지성과 양식에 따라 판단하고 정책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현대의 정치개혁이다. 국회의 다수당을 따지는 사고방식은 의원들이 거수기 투표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의원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신념에 따라 결정한다면 다수당과 소수당의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정당의 지역성 구별도 무의미해진다. 국민의 공익을 위한 헌법기관으로서 국회의원 개개인이 국민 앞에 책임지는 것이 옳다.

사안별 경쟁이란 시민들이 사안별로 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들이 이념에 묶여있을 이유가 없다. 그때마다 공익이 발생하게 하는 것이 시민들의 의무이며 공익의 발생은 사안별 개혁과 그때마다의 독창적인 창의성에 달려있다. 시민들이 이념으로 서로 갈려 욕하고 싸울 이유가 없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담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연역적인 정책 꾸러미로 싸우지 않는다. 언제나 그때마다 제한된 공적자원 안에서 사안별로 2%와 4% 사이의 배분을 놓고 판단력과 설득력을 경쟁할 뿐이다. 서로 감정 상할 이유가 없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의원들은 대부분 지역으로 갈려져 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갈려져 있지 않고, 유사한 이념을 추구하면서도 소속이 다른 의원들도 많다. 이들은 어떤 경로를 밟아갔는가? 서로 싸우고 개인적으로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을 뿐이다. 서로 이념을 내세우지만, 원인은 이념이 아니라 감정싸움이다. 감정에 따라 패가 갈렸을 뿐, 사안별 판단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감정으로 패가 갈리고 세력경쟁을 위해 거수기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국정치는 공전한 지 이미 수십 년이 된다. 그 분열의 단초는 자존심 대결이었다.

시민들은 공익을 위한 사안별 경쟁을 하도록 정치권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 어느 한 패거리를 지지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다. 정당 안에도 사안별 경쟁을 하는 정치인이 있고, 거수기 노릇을 하는 정치인이 있다. 거수기 의원들은 지도자의 하수인이다. 지도자에게 무게가 쏠리면 그는 독재적 성향을 갖게 된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헌법기관은 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하도록 국민적 압력을 넣어야 한다. 노동정당이 집권한다 해도 매사에 재벌노조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사안별로 판단하게 되면 문제해결의 객관적 한계가 강요하는 타협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개혁은 기존틀의 변혁이며 그 결과 희생과 불평이 따라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정책과 제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개인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시되는 사회현상의 통계적 추세를 개선하는 것에 불과하다. 복지제도에서 재정과 제도에 대한 지나친 과신은 금물이다. 복지제도의 관료화는 인간소외의 또다른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필요한 것은 현장에서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봉사요원들이다. 현장에서의 인간적 봉사와 제도적 해결방법은 차원이 다르다.

시민들이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우리 사회 단계에서는 국내적으로 어느 정당이 집권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국제적으로 제국주의가 횡횡할 때는 안보와 외교면에서 여전히 대권이 중요하기는 하다.) 국내문제에서 정치권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된 재정을 놓고 우선순위에 따라 분배하는 문제이다. 장기적으로 이들은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당이든간에 연역적인 정책꾸러미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정치인들이 사안에 따라 양심적으로 투표하고 공익을 위해 노력한 뒤에 자기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국민 앞에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논리주의, 연역주의, 변증법과 같은 사회이론들은 현안해결에 있어 정치인들의 지적 태만의 원인이 된다. 문제마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접근하도록 압박하라.

정치인들이든, 시민들이든 간에, 사안별로 경험적 자료를 수집하고 기능적인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질서와 무질서의 요인을 통찰하고 문제해결의 창의성을 발휘하고 창의적 해결방식을 사회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날카롭게 논적을 찌르는 비판들은 아무 경쟁력이 없다. 현실적으로 경쟁하는 것은 대안들이다. 대안 없는 비판은 하소연에 불과하다. 그것은 민감성과 공감대의 대상이다. 그러나 문제해결은 대안들의 설득력의 문제이다. 대안이 없는 비판자들은 경험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고, 기능적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질서와 무질서의 요인들을 통찰하고, 문제해결의 창의성을 발휘할만큼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상대를 단순히 조소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고도로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사회이다. 시민들은 모든 사안에 대해 즉시 판단할 수 없다. 정보들을 수집하고 그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고 갈등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우 힘든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자기 힘으로 자료들을 수집해야 한다. 그것이 힘들면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태의 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료수집능력, 분석능력, 판단력과 결단력 등 인격적 잠재성의 총체가 사회적으로 투입될 때에만 민감하고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통합이 가능하다.

민주화의 단계에 있어 우리는 지금 희망을 갖고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잠재성에 있어 우리는 서구의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피해나가면서도 민주적인 사회통합을 달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화적 자원들을 갖고 있다. 현대의 시민정치는 정치권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의 심화확대에 달려있다. 아래로부터 자기표현의 구조망을 건설하는 것이 민주사회다. 우리 시대는 민주적인 대중문화를 건설하는 시대다.

다양한 관심과 필요에 따라 동호회 등의 기초공동체를 구축하고 전문적으로 재미있게 활동하는 것이 민주적 대중문화 건설의 요건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적절한 방향으로 진행중인 것으로 보인다. 당파적인 정치논객들보다는 재미로 참여하는 동호회원들이 시민정치의 성숙에 있어 훨씬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 정치개혁의 관점에서 초점을 바꾸어보라. 우리 사회에는 대중문화의 건설에 참여하는 많은 작은 꽃들이 도처에서 움트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사회에 대한 희망을 갖고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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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09우리모두에 올리신 글>

정보가 통제되던 시절에 사람들은 신문기사 안에 숨겨진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 고도의 독심술을 발전시켜야만 했었다. 억압된 정치열기가 기형적으로 분출된 결과 정치담론이 심각하게 왜곡된 경우다. 이렇게 왜곡된 정치독심술에 입각해서 언론은 '3김'이라는 왜곡된 정치상징을 개발해냈다. 이것은 잘못된 기초 위에 환상의 궁전을 지은 퇴행적 업그레이드다. 현실인물과 무관한 상징 조작이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이러한 정치상징을 단순한 흥미위주의 언론상품으로 애용했지만 또다른 일부 언론은 이를 권력투쟁의 게임소프트로 발전시켜서 유권자를 온라인게임의 참여자로 전락시켰다. 정치9단, 정치10단 승단식을 개최하고 음모론 감상법을 제시하며 미래를 맘대로 예측할 뿐 아니라 미래의 향방을 멋대로 좌우하는 언론권력을 획득해냈다.

상징게임이 현실을 지배하는 정치상황에서 한국에 고유한 정치담론이 형성되었다. 이른바 술자리의 '믿거나 말거나' 가십거리 정치토론이다. 민주헌법을 쟁취한 후에도 사람들은 현실문제의 분석과 해결보다는 게임시장의 정치놀이에서 더 큰 재미와 현장감을 느꼈다. 정계에서는 자질보다는 머리수가 중요했다. 우리편의 머리수와 너희편의 머리수가 정해지면 나머지는 권모술수의 단수가 결정한다. 그리고 밀실 음모가들의 단수는 전지전능한 주필이 정해준다. 이런 식으로 웃고 즐기는 가운데 한국 정치계에는 어느덧 잡초만이 무성해졌다.

잡초제거는 일종의 인적 청산이다. 그러나 한국의 못자리에서는 어떤 품종을 심어도 잡초만 재배된다. 경작자들이 바로 상습적으로 잡초를 말아 환각제를 피워 온 골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변화된 상황에서 과거의 게임은 계속될 수 없다. '3김'이라는 정치상징이 퇴장했다. 영웅 뒤만 따라다니던 병졸들만 남았으니 이제는 게임이 안된다. 이제는 병졸들이 아니라 저마다 자기 판단과 신념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현실정치를 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감상법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분석과 문제진단, 그리고 해결사이자 치유자로서의 각자의 신중한 판단력이 요구된다.

문제는 골초들의 금단현상이다. 과잉된 정치의식과 게임중독증은 그대로 남아있다. 현실은 너무나도 복잡한 전문화와 세분화의 거대한 종합이며, 다양한 이권들과 신념들은 깔끔하게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입장 안에서도 두루 중첩되어 있다. 우리편, 네편 갈라서 싸우고 욕하고 돌던지고 술먹는 놀이가 아니라 신중하게 단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문제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은 싫어한다. 정치게임이 좋았던 것은 그것이 무책임하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여에 책임이 부과된다면, 재미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은 40대부터 연구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했다. 당시 그리스의 40대 시민이면 하급자의 고달픈 일상에서부터 관리자의 무거운 책임성까지 두루 체험해본 사람들이다. 현대인은 보다 일찍, 보다 복잡한 문제의 해결에 참여해야 하며 자신의 다양한 체험을 지속적으로 통합해 나가야 한다. 이념이나 성향, 열정이나 욕망에 따라 깃발들고 줄을 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면상황 안에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영역을 파악하고 신중한 판단력과 책임성을 습득하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방향이 뒤틀려 있으면 열심히 전진해서 퇴보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출발점은 현재 당연시되고 있는 정치담론의 허구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별방법은 단순하다. 스스로 자문해보라. "지금 나의 관심이 문제의 규명과 해결에 놓여 있는가, 아니면 내가 편드는 진영의 영웅이나 그 반대영웅의 영웅적 행동과 언변에 놓여있는가?"

골초의 금단현상은 새로운 영웅상징을 요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각자의 판단력과 책임성을 사회적으로 통합하는 협력의 능숙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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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피 튀기는 권력투쟁인가, 아니면 거대한 통합의 과정인가?

현실주의 정치학자들과 야심가들의 끝없는 훼방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정치는 공동체 통합의 거대한 과정이었고, 또 지금 여기에서도 사실은 그러하다.

공정한 룰에 따른 경쟁과 적자생존의 투쟁은 다르다. 적자생존의 무자비한 투쟁은 문명과 질서가 결핍된 상황 속에서 심적으로 퇴행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다. 모든 문명권과 문화국은 사회적 분쟁이 발생하는 곳에서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힘의 과도한 집중을 견제하여 경쟁의 누적이 장기적으로 사회적 협력과 통합에 공헌하도록 조정한다. 정치는 정의로운 질서를 형성하려는 노력이며, 올바른 질서란 강자의 자의적 질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자발적 협력과 통합에 봉사하도록 기능하는 질서이다.

사태의 자연스러운 경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정치적 통합의 과정을 보다 느리고 보다 비효율적이고 보다 짜증나게 만드는 작동기제들은 무수하다. 일상의 부단한 협력과 사회적 통합의 거대한 작동과정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색안경들의 종류는 여럿이다. 그리고 각각의 색안경들, 이즘들, 주의들, 론들, 감상법들은 나름대로 자극적이고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또 부분적으로는 그럴 듯 하기도 하기 때문에 아직도 만병통치약은 시중에서 잘 팔려 나간다. 성적인 변태와는 별도로 정치적인 변태들도 허다하다. 변태들이 쓰는 신문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다.

정치담론의 문제는 딴 다리를 긁어야 말발이 선다는 데 있다. 정치얘기만 나오면 현실과는 무관하게, 마치 딴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인구에 회자되는 조어들과 관념들, 이미지들과 연상들을 통채로 습득해야만 옆에서 한 마디 거들 수 있다. 무협소설에는 내공과 외공, 경공술과 검장지법에 관한 고도의 학술적 체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이라는 것을 독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에 빠져 비몽사몽지간에 놓이면 적벽대전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정치권을 바라보고 조선일보를 읽다보면 그것이 생시라고 확신하게 된다. 요컨데 민주주의 정치란 중원무림의 대권투쟁을 감상하는 대권삼국지 감상법에 따라 독자들이 느낌과 말로 동조하는 양방향 게임이라는 것이다. 정치가와 시민을 매개하는 언론은 이 양방향 게임의 향방을 조정하는 역사의 지휘자이다.

정치담론에서 현실감각의 상실, 관념과 이미지의 오염은 심각하다. 신념에 가득 찬 고매하고 냉철한 사상가들은 한 꾸러미의 집합명사들을 논리적 체계 안에 가둔다. 그러나 그 집합명사는 자유로운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집합명사 안에 들어있는 등장인물들은 사실상 도처로 이동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는 유클리트 기하학처럼 깔끔한 논리적 추론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설득과 창의적인 분발을 통해 해결된다. 우리는 단지 종합적 추세를 분석 진단하고 개연성이 큰 예측을 얻고 그에 대해 가치판단을 한 뒤에 노력하고 인내하며 통합의 장기적 과정에 참여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인간적 과정을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주의자들은 책에서 얻은 판을 펼쳐놓고 그 안에서 이야기한다. 애독자들은 언론에서 읽은 기자들의 인상비평에 따라 판을 펼쳐놓고 그 안에서 이야기한다. 일단 판이 펼쳐지면, 그 판에 들어맞지 않는 사실증거들은 철저히 무시된다. 마침내 사실은 제쳐놓고 판들이 나와서 자기네끼리 싸움을 한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정치담론이라고 부른다.

19세기 좌우의 학술적인 장르문학들, 20세기 삼국지의 대중적인 장르문학들이 시민사회의 대중문화를 장악할 때 애독자들의 감상소감 나누기를 우리는 정치담론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정치담론의 한 가지 중요한 효과는 그것이 우리의 정서와 심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그 영향력이 현실의 정치과정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밉고 화나는 경우도 많은 법이다.

원래는 판을 짜놓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안에서 현실로부터 판을 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반칙이 아니라,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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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7월19일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세상에 누가 들어도 당연한 말처럼 어려운 말도 없다. 건전한 상식과 바른 양식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사실 당연한 만큼이나 심오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당연함에 만족하고 넘어가지 그 심오함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심오한 것도, 건전한 상식과 바른 양식만 갖는다면, 지나가는 상념들 속에서 꼭 붙잡아서 인격 속에 간직하고 필요한 양분들을 공급해서 인격적 덕성의 수준으로 체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깨어난 놀라움으로 눈을 빛내며 의미를 찾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의식의 각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것은 그저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도 아퀴나스는 사회의 난제를 다룰 때마다 곧잘 이 말을 되풀이하면서 반성을 시작한다. '산다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의 구분이 그만큼 원리적이고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잘 사는 것'이라는 그 미지의 X를 잘 이해하고, 그저 사는 것으로부터 잘 사는 것에로 가는 경로를 잘 파악하고, 그것이 정말 잘하는 일(좋은 일)이라고 납득이 된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잘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경로에 따라 잘 사는 삶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추동의 흐름을 따라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윤리적 숙고가 전개된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일이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자알 살아보세~" 어린 시절 새벽 아침을 깨우는 동네 확성기에서는 쿵짝쿵짝 쿵짝쿵짝 새마을노래와 함께 이 노래도 항상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새벽종이 울리면 졸린 눈을 비비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기 위해 지긋이 아랫배를 당기며 새벽길을 나선다.

당시엔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꽤 명백했던 것 같다. 일제랑 미제는 국산보다 이쁘고 튼튼해서 좋다. 잘 사는 것이란 일본이나 미국처럼 사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이란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자동차도 사고 부자가 되는 것이다. 이건 아주 당연한 말이다. 결국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는 말의 의미는 인간은 부자가 되서 마음 놓고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것은 어린 시절, 다소 배고프던 시대의 이야기다. '잘'이라는 말이 간직하고 있는 의미심장성은 결코 불고기 3인분에서 멈추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잘'이란 말은 신발끈을 메는 기억과 연상되어 있을 수도 있다. 술레잡기에서 술레한테 잡히지 않고, 다방구에서 친구들을 구출하는 것도 정말로 재밋게 잘 사는 일이다. 잘 사는 것은 두루 잘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국어도 잘하고 산수도 잘하고 사회도 잘해야 한다. 그런데 거짓말을 잘하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을 잘 하는 것이다. 그니깐 그것은 잘하는 것이긴 하지만 잘 사는 것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이란 좋은 일은 두루 잘하고 나쁜 일은 두루 잘 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 살려고 노력하면서, 마치 티끌을 모아 가듯이, 나름대로 학식과 기술이 발전하고, 윤리의식과 사회성이 성숙한다. 그것은 생각 속에 스쳐가는 상념들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몸과 마음이 함께 익힌 습관이 된다. 그것은 각자의 성격과 역량, 가치관과 세계관, 개성과 인격을 조성한다. 나의 온 생애를 통해 누적된 나만의 독특한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결정과 행동은 나의 인격으로 통합되서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누구나 지금까지의 생애와 앞으로의 생애는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분투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말로 '잘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삶을 통해 마주치는대로 가능한 한 무엇이든 나에게 좋은 것을 모아들이고 나에게 나쁜 것을 피하면서 그것들을 수단, 도구, 디딤돌로 삼아 무언가 '잘 사는 것 그리고 보다 더 잘 사는 것'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당시에 나에게 좋은 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도 아니요, 당시에 나에게 나쁜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만도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또 결국에 가서는 그 자체로 좋은 것과 일치되는 노선으로 잘 해가야만 두루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한 좋은 것 모두 다와 가치있는 것 모두 다를 어떤 좋은 질서 안에서 어떤 올바른 선호에 따라 그때마다 음미평가하면서 수용하고 창조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내가 혼자서 그 모든 좋은 것을 다 얻어낼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협력을 통해 서로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면서 좋은 것을 두루 공유한다. 가족들은 나에게 기초적인 인성적 가치들을 제공하고, 전라도의 농부는 나에게 생명가치를 유지할 수단을 제공한다. 경상도에 공장을 지으면 사람들이 흘러 들어가 가전제품이 줄을 지어 나온다. 공단에다 공장들을 여럿 지으면 제품들의 줄들이 열을 지어 흘러 나온다. 트럭은 밤을 새워 달리고, 택시들은 분주히 교차하고, 가득 찬 건물마다 사람들은 활동으로 분주하다.

경제활동이 잘 사는 것의 끝은 아니다. 어느 수준에서든 반복적인 생활수준의 흐름 위에는 문화적 생활이 층을 지어 올라간다. 멋진 상대와 대화를 하며 잠시 시간을 멈추고 개성들에 매혹된다. 야구선수의 홈런은 한 여름밤의 더위를 식혀준다. 좋은 문학작품들은 의미들로 가득 차 있고, 노래와 춤은 원초적인 열정에 리듬을 부여한다. 만화와 영화는 창의성을 자극하고 창의성은 세계를 새로운 가치들로 채운다. 불멸의 작품은 영혼을 일깨우므로 아퀴나스와 같은 이들은 700년이 지나서도 강의를 계속한다.

문화적인 가치들의 향유도 잘 사는 삶의 끝은 아니다. 내면성이 성숙하는 만큼 연대성의 무게도 깊어지며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등장한다. 인격적 가치가 등장하며 그것은 사회 안에서 질서의 선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개성적인 인간들이 서로 다른 가치들을 결집해서 질서의 선에 공헌하는 와중에 상충하는 가치방향들이 충돌하고 분열하고 패권을 다툰다. 인류의 근원적 연대성 안에 인간존중의 가치를 채우려는 분투는 먼저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는 기초를 망각하고 연대성을 무시하는 개인주의로 후퇴하거나 아니면 권력을 잡아 차이들을 획일화하고 강압하려 한다.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 그리고 단지 잘 살려고 할 뿐 아니라 언제나 보다 더 잘 살려고 한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사용가능한 공적 거래계산서인 돈이라는 도구를 끝없이 쌓아 놓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수단이 무한히 필요할 수는 없다. 수단이 무한히 필요한 사람은 결코 '잘 산다'는 목표지점으로 전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잘 사는 삶은 결코 부귀나 영화, 명예나 칭찬, 권력과 숭배의 무한한 축적은 아니다. 잘 사는 삶으로 가는데 필요한 수단들이나 가능한 수단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수단들은 자신을 넘어선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들일 뿐이다. 잘 사는 삶은 수단의 무한성이 아니라 과정의 초월성이다. 내가 이제 신발끈을 잘 매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제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난관을 잘 해결하며 전진해야 한다. 잘 사는 삶은 본성적 갈망이 추구하는 의미심장한 가치들과 의미들을 몸으로 체현하고 어깨로 연대하면서 언제나 보다 더 잘 살려고 영적으로 분투하고 어느 정도 계속 성공하며 전진하는 삶이다.

궁극적으로 '잘'이란 용어가 지칭하는 현실은 바로 우리의 본성적 갈망 안에 깃든 초월적 목적성인 것 같다. 그것은 물질과 생명의 약동을 자체 안에 간직하면서 생물학적 생명이라는 기초적 가치를 유지하고, 그 위에 삶의 반복적 필요들을 해결해주는 경제적 가치들을 획득하고, 그 위에 가정과 친지에서의 친밀성의 가치들, 공동선을 향한 공동체의 연대적 가치들, 정의로운 국가와 평화로운 세계의 질서의 선을 획득하고, 내면성의 다채로운 문화적 가치들을 충족하면서 그 너머의 어떤 궁극적 목표를 향해 수직적으로 상승한다.

아래로부터 위로 상승하는 인간적 삶에서 퇴행이나 도피는 가능하겠지만 단계를 뛰어 넘은 도약은 없을 것이다.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결정과 행동을 통해 몸으로 체현되는 가치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상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예기치 못한 순간에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뜻밖의 선물 안에서만 가치충만을 발견할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그래서 잘 사는 삶이란 또한 매순간 가치충만을 예감하며 고대하는 삶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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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넘 넘이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셨던 글>

토론을 무슨 사무라이나 카우보이들의 결투처럼 여기는것이 아주아주 잘못된 이유는
둘중에 한넘을 옳다고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사람들은 이긴넘을 옳다고 여길것이고, 어떤사람들은 진사람이 억울하다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그리하여...이런 습관은 스스로의 의견을 힘써 만들어나가는것을 다른사람에게(주로 잘나거나 힘쎈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미루는 아주아주 나쁜 버릇을 조장하게 된다. 즉 노예근성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런데...문제는 말이다...

의견이 다른 두사람이 충돌이 있을때...둘다 옳기는 불가능하다.(양시론은 항상 말이 안된다)
그러나 둘중 누구도 옳지않다 내지 둘다 틀렷기는 쉽다(양비론은 거의 항상 말이된다).
그래서 논쟁에 이겼다고 옳은것은 아니다. 그것은 곰곰히 따져보아야 하며, (토론이 정상적인 것이었다면) 대부분의 경우 <좀 덜 틀리는 의견>일 뿐이다.

그런데..여러가지(가령 A,B,C 세가지)가 뒤섞인 일에서는 세 사안에서 모두 옳거나 세 사안에서 모두 다 틀리는거는 (전모씨처럼) 사기꾼이나 도적놈이 아닌다음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ABC중 가장 중요한것에서 옳은놈이 이기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ABC중 하나라도 "가치판단"의 문제(가령 B)가 들어있다면 전체적인 결론 또한 (좀더 현명하거나 좀더 이기적이거나 등등 어쨋건) 개인의 선택일 뿐, 옳다 그르다는 별로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여제껏의 현실은..힘세고 재주좋은놈이 (물리적폭력이건 언어적폭력이건) 한판붙자 그런담에 너졋지? 너는꺼져...이렇게 되어왔던 것이다. 그넘이 <무조껀 옳은넘>이 되는것은 물론이고, 그안에 섞인 사안B에 대한 그넘의 <선택>까지 <옳은것>이되어 내 선택으로 생각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노예가 따로 있나?

그 주장의 말이되고 안되고는 따질 능력도 없고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좃시 한치건 한자건 이긴것처럼 보이는 놈한테 빌붙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좃선애덜이 그깟 자전거가 왜? 왜? 왜? 아깝것냐? (밤의) 대통령이 되는 참인데...^^) 그리고, 그러한 노예근성은 1차적으로 게으름을, 그다음으로 무지-부정직를 먹고산다. 단언컨데, 부지런하다면 그리고 무식하게라도 정직하다면, 절대로 노예가 되지는 않는다.

암만바도 아닌것은 아니라 하면서 좀 살자...^^ 그런다고 큰손해 보는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죽는것은 결코 아니다...^^
(뭐 평양감사도 지하기 싫으면 할수없다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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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넘 님이 예전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셨던 글>

안티조선에 동감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 동기라던가 구체적 사안에 대한 입장이 가지각색이다.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조선일보의 수구적 내지 극우적 정치편향성을 우선적 목표로 삼는 안티조선을 정치형 안티조선이라고 부르고, 조선일보의 뒤틀린 사이비언론으로서의 특징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는 안티조선을 종교형 안티조선이라고 일단 대별할 수 있을 듯 하다. 혹은 조선일보의 존재 그 자체를 우선적으로 문제로 삼는 입장과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우리언론 내지 公的인 말글살이의 어떤 (근원적이거나 현상적이거나간에) 심각한 문젯점을 문제로 삼는 입장의 대비라고나 할까?

여기서 <정치형>이라 칭함은 별로 오해를 살 염려가 없을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역시 정치선진국?^^), <종교형>이라 칭함은 일단 <내 살아생전에 결말을 못볼 가능성이 많은, 시간이 무지무지 오래 걸리는 그런 정치>라는 관점이라고 두리뭉실 정리해보기로 한다.

우선 <정치형 안티조선>이 관심을 두는 영역은 대략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적 정치세력과 좃선과의 퇴행적 정치야합의 분쇄,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지역감정 혹은 지역패권주의를 부추키고 유지-강화하려는 책동의 저지, 좃선이 앞장서서 부추키고 밀어붙이는 다수를 가장한 횡포, 등등....의 이슈들일 것이다.

이들 이슈들은 우리사회가 보다 민주적이고 사람다운 삶이 가능한 정상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가능한한 최단시간안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것들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략 열심히 하고 여건이 잘 맞아떨어진다면 한두세대안에 해결해 낼 수도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함은 매우 중요하며 내용은 달라도 우리앞의 많은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각 세대는 최선을 다해 가능한 모든 정치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 와중에도 어떤 안티조선앙들에게는 마치 하나의 족쇄처럼 떠나지 않는 갈등이 있다. 다름아닌 "이러한 현실정치를 최우선적으로 하는 노력의 중요성은 언젠가는 죽을 인간으로서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되, 그렇다고 인간의 모든 노력이 현실정치에 전적으로 집중되어야만 하는가?"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읊어본다면, 당면한 정치적 목표를 위해서는 최악의 경우 좃선스러운 사이비성을 우리내부에 허락할 수도 있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정치형 안티조선>의 입장이라면 의문의 여지가 없이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선택하고 행동할 것이며 사실 이러한 경향성은 한때 우리모두를 휘젓던 유명논객들을 위시하여 지금현재 우리사회에서 거의 보편적인 현상인것으로 보인다. 한편, <종교형 안티조선>의 입장이라면 정치적입장과 무관하게 그러한 사이비성에대한 거부감을 무조건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며, 정치감도가 유달리 높은 우리사회의 풍토로 보았을 때 대체적으로 안티조선 내에서도 소수적인 입장이 아니었었나 싶다.

문제는 <정치형 안티조선>의 경우에는 모든 정치가 그러하듯 결국 종국에가서는 결과주의적 맹목성 내지 상대주의적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일텐데 이를 넘어서는 방법은 역시 그 신념체계의 힘과 생명력에 의존하는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념들은 그 생명력이나 하다못해 합리성-논리정합성에 있어서 차이가 없이 모두 동등한 것일까? 이렇게 일단 '신념'이라는 명찰을 달고서 서로간의 경쟁단계로 가면 결국 불필요한 물리적-언어적 폭력만 남는 것이 아닐까? 어떤내용의 신념이건 어떤수준의 신념이건 '신념'간의 폭력이기만 하면, 프랑스대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 동일하게 불가피하면서 동시에 필연적이 되는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것일까? 히틀러의 신념과 스탈린의 신념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것일까? 멀리갈 것 없이, 박정희나 전두환의 신념과 김대중이나 노무현의 신념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최근 노무현이라는 (어느형인지는 모르겠으나) 안티조선 성향의 정치가가 정치권력을 획득한 것이 계기로 작용하여 우리사회는 정말 오랜만에 (얼핏볼때) 이러한 어떤 신념들간의 경쟁이 시작된 듯 하다. <정치형 안티조선>을 지향하던 우리모두앙덜중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입장에 따라 한줌 품이라도 팔아서 돕기위해 여기저기로 떠나갔다. 그러나 한사람의 <종교형 안티조선>앙으로서 나는, 우리사회의 현재의 '신념'경쟁이라는것이, 그러한 신념속의 혹시모를 <좃선틱한 사이비성>정도는 전혀 문제가 될 필요도 없을만큼, 모든사람들이 훤히 다 알도록 모든것이 다 까발겨진 막다른 골목의 경쟁인지는 두고볼 일이 아닌가 싶다.

이제 생각컨데 '안티조선=반한나라'이건 '안티조선=좌파적 진보주의'이건 '안티조선=지역패권주의의 척결'이건 어떻거나 간에, 각자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떠나간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정정당당하게 경쟁에 임하리라 믿는다. 다만 바라는것은, 좃선이 지금도 멀쩡하게 언론의 탈을 쓴 채 앞장서서 밤낮없이 퍼뜨리고 있으며 아직 우리사회 여기저기 구석구석 악취를 풍기며 넘쳐나는 언어적 사이비성과 폭력성에 이를 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작금의 이 큰 판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멍청한건지 쪼잔한건지 이곳을 떠나지 못한채 나름대로는 비록 돈안되는 최선이지만 열심히 다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래야 이 난리굿판에서 각자 볼일을 다 본 다음 어느순간에는 그래도 사이비성만큼은 없으려 끈질기게 노력하는, 가끔식 생각나면 들러서 비비고 싶어지는 구석배기 언덕으로 남아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누군가의 말대로 이슬맞는 썰렁한 교회가 가장 교회답다고도 하는데, 엄마가 꼭 능력있고 돈많고 미인인 엄마만 엄마였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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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9호, 민음사, 1999.

1

내가 학생인 건 알겠는데, 그런 자각은 선생님의 존재가 전제될 때에야 가능하니 이는 학생임이 완벽하게 내재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이처럼 선생님이 내준 숙제하듯이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선생님들이나 펼칠 수 있는, 원리와 결말이 뚜렷하게 들어맞는 <길>을 찾아낼 수 없고, 내 머리 속을 채우기도 급급한 터에 <우리>의 공부 법까지 밝혀낼 수도 없다. 그래서 부탁 받은 제목인 <우리 공부의 길을 찾아서>를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제멋대로 바꾸어버렸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나의 선생님께 배운 바와 그것을 어줍잖게 응용해서 덧붙인 몇 가지다. 덧붙였다고는 하나 그것도 공부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부 외적인 것인데, 그건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세계가 조금은 다른 탓에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해당하는 걸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려 한다.


2

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을 분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학문적 업적이나 주위 사람들의 평판을 참고해서 선생님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는 지도 교수를 고르는 방법이지 선생님을 찾는 방법은 아니다. 선생님은 지도 교수 이상의 그 무엇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작 지도 교수 고르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교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강의를 성실하게 하는 교수. 개념을 철저하게 따져서 강의하는 교수. 무슨 일이든지 원칙대로 처리하는 교수. 자신은 늙은이면서도 일 학년 학생에게도 반말하지 않는 교수. 리포트를 써내면 빨간 펜으로 고쳐서 되돌려주는 교수. 어떤 일이 있어도 학점을 고쳐주지 않는 교수. MT도 공식 행사라면서 반드시 참석하며, 그것도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가는 교수. 이렇게 처신하는 교수는 강의 시간에 늦게 들어와서 일찍 나가는 일도 없고, 무슨 보직을 맡을 겨를도 없으며, 어디에 잡문을 쓸 여가도 없고, 텔레비전에 나갈 시간도 없고, 정치에 돌릴 눈은 더욱이나 없다. 이런 교수가 있다면 계속해서 강의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빨아들여야 한다. 이런 원칙주의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머지 작년에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경우가 없으며, 말을 옮겨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수가 많으니 공책에 적어 두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런 교수에게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은가? 우선 개념 따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은 개념의 학이니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철학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개념을 알아야 처리할 수 있다. 이것부터 시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공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두번째로 원칙대로 처리하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 되어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원칙 지키기를 기업가에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아무리 어린 사람이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도 기본이다. 공부를 계속하지 않을 사람도 배워두어야 하는 것들이다.

지도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것 또한 지도 교수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지도 학생에게 잔심부름시키지 않는 교수. 자기가 쓴 논문을 자기가 타이핑하고 편집까지 하는 교수. 출판사에서 넘어온 교정본을 자신이 교정보는 교수. 새로울 것도 없고, 치열함은 더더욱 없이 사교장으로 변해버린 학회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교수. 대학원 수업 시간을 꽉 채우고 끝내는 교수. 고전만 붙잡고,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그것만 읽히는 교수. 논문 주제를 상의하면 <알아서 써보라>고 하는 교수. 막상 논문을 써 가면 주격 조사나 접속사부터 따지는 교수. 논문 인용문의 원전을 죄다 찾아보고 잘못된 번역과 적절치 않은 인용을 지적해 주는 교수. 이렇게까지 해놓고도 <지금까지는 문장 연습과 논문 쓰기 연습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주제를 잘 정하고, 본격적으로 써보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교수.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아무리 여러 학기가 지나도 결코 논문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교수.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견해와 달라도 학생의 주장이 논리적이면 인정해 주는 교수. 자신에게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에게 다른 학교 강의 하나 알선해 주지 않는 교수. 아무리 오랜 세월을 공부해도 두 사람의 거리가 딱 그 만큼에 멈춰 있게 하는 교수.

이런 교수가 있을까 마는 부지런히 찾아보면 있을 거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없으면 다른 학교에서 찾아보고 한국에 없다면 외국에서 찾아보자. 외국에서 그런 교수를 만났으면 계속해서 거기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오지 말자. 예를 들어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치자. 그 뒤로 그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공부 성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말에 심정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는다. 지도 교수가 뭐라 하면 모를까. 또 자기가 쓴 글을 지도 교수가 언제든지 읽어볼 수 있다면 공부를 대충하고 글을 적당히 쓸 수가 없다. 그런데 학생은 한국에 있고, 지도 교수는 외국인이어서 외국에 있다면 어떨까? 무서울 게 없다. 아직도 먼길을 가야 할 사람이 게을러지고 망가지기 십상이다.

하여튼 이런 지도 교수 밑에서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을까?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는 법을 배운다. 공부하는 사람들 세상도 일종의 사회여서 쓸데없는 인간 관계가 많은 것을 좌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걸 딱 잘라 버릴 수 있는 뱃심이 생긴다. 고전만 붙잡고 앉아서 공부를 했으니 기본이 튼튼해진다. 게다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소홀히 읽는 일이 없게 된다. 무슨 문제든지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서양의 철학을 공부했어도 결국 그걸 풀어내는 건 우리말을 통해서인데, 문장 쓰는 훈련을 하므로 자신의 언어로써 생각하고 말하는 힘이 길러진다. 이러다 보면 외국의 책을 번역해도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을 하게 되질 않는다. 공부 가르쳐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안 써주니까 학생도 자연히 쓸데없는 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는 습성이 생긴다.


3

공부하는 데 제일 좋은 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선생님 없이도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 훌륭한 학생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이런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20년쯤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를 만나서 <비법>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베껴라>였다. 베끼라니, 표절을 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초보자가 대단한 걸 만들어보겠다고 덤벼봤자 땀만 빼고 시간만 낭비되니 잘된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보는 일을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거였다. 똑같은 물체를 두고 그대로 그린다 해도 그리는 사람마다 그림은 다르다. 초보자가 내놓은 그림과 숙련자가 내놓은 그림, 대가가 내놓은 그림은 아주 다르다. 어떤 대가의 그림은 전혀 엉뚱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그 대가는 처음부터 그런 엉뚱한 그림을 그렸을까? 그건 아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데생을 했었다.

철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 베끼기를 할 때는 베낄 책을 잘 골라야 한다. 일테면 서양 근대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최소한 코풀스턴의 철학사를 잡아야 한다.

철학 공부를 베끼기에서 시작하라니 의아해할 수도 있다. 철학사 따위는 무시하고 <내 철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베끼기 없이 <내 철학> 해봤자 남는 건 처치할 길 없는 거만과 아무런 맥락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현란한 단어들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기 마련이고 남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자신의 철학이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이라는 도취에 빠지며 급기야는 도사가 된다. 이런 도사들은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접하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읽은 몇 안 되는 책 속에 나온 말로만 설명할 뿐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학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 한다. 이런 도사는 철학 공부하는 사람 중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철학의 제문제}(벽호)처럼 주제별로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정확한 문맥 속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제에 관련된 철학자들의 원전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덧붙여 두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책도 50번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누가 중요하다고 하는 부분만 읽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에게는 그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자기 맘에 드는 학설이나 학자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맘에 드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내주는 건 아니다. 그 사람의 학설은 수많은 대답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무덤덤하게 대하지 않으면 그 학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 신앙인의 자세이다.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한 분야, 한 시대만 파고들다 보면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져서 철학의 전 분야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입만 열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술에 취했어도 헤겔만 떠드는 건 광신자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what's new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언뜻 듣기에는 옳아 보이나 <학>이라는 게 <체계적 지식>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대중의 수준에 걸맞게 성교육을 잘한다 해도 그는 성의학자가 아니며, 자장면을 아무리 많이 팔았다 해도 그는 경영학자가 아니다. 어쨌든 베끼기를 거치지 않은 독학은 시간 낭비, 지적인 허영일 뿐이다.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면 대개는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노트에 정리한 뒤 끝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책도 기억에 남지 않고 문장 몇 개만 막연한 추억처럼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닌다. 차라리 가장 표준적인 책을 한 권 정해서 모든 말과 문장을 따져가며 끝까지 읽는 게 낫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는데 막상 실천하려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참고문헌을 적게 읽으면 뒤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이거 한 권 읽다가 새로운 것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따위가 엄습하는 것이다. 이런 걱정과 불안이 생겨나는 것은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기본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를 충실히 읽은 이는 철학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풀리는 건 아니며,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4

베끼기를 열심히 하는 건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기초가 다져졌으면 구체적인 자기 공부에 들어갈 차례다. 도대체 무얼 공부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을 주제로 삼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제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어떤 이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공부 주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여야 한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본 문제를 다듬어서 철학적 주제로 삼는 것이다. 별로 해주는 것 없이 규제만 하고 세금만 잔뜩 걷어 가는 국가가 못마땅했으면 국가론을 주제로 삼아보는 것도 좋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마다 죽어나가는 게 이상했다면 존재와 무의 문제를 주제로 택해도 될 것이다. 주제를 이런 식으로 정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거, 남들이 하는 거 붙잡아서 공부하다 보면 유행이 지나서 말짱 헛것이 될 수도 있고,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만 하게 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공부는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따로 노는 공부가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자기 스스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남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면 최신 이론 들춰서 적당히 요약 정리한 논문이나 쓰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그 논문의 내용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느냐고 묻는다면 <철학은 본래 메타 학문이므로 구체적인 현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고상한 대답을 하게 된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이 논문은 내 삶과도 별로 관계가 없고, 단지 나는 논문을 위한 논문을 썼을 뿐>이라고 말이다.

탐구할 주제를 정했으면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그럼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철학자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철학자를 판별하는 근거는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이다. 그 철학자가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면 일단 그걸 정독한다. 번역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또 제대로 된 번역본이 드문 것도 사실이므로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서 해당 외국어를 익혀야 함은 당연하다. 철학자의 책을 읽어나갈 때는 머리를 비우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읽어야 한다. 괜한 말 덧붙여 봐야 쓸데없는 일이고 감상일 뿐이다. 철학자의 책을 충분히 읽어서 그 책에 등장하는 개념과 논지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으면 관련된 책, 즉 해설서나 참고 문헌을 읽는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관심 가진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학자가 칸트라면 칸트의 책부터 읽어야지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민음사)부터 읽기 시작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순서를 바꾸면, 칸트의 책을 읽을 때에도 이미 들뢰즈가 규정한 칸트, 즉 <들뢰즈 버전의 칸트>를 머리에 담고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글에도 들뢰즈가 강조한 문장만 인용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도서관에서 어떤 철학자에 관한 논문을 여러 권 가져다 놓고 인용된 원문을 비교해 보라. 거의 다 똑같은 걸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눈으로 읽은 성과를 발견할 수 없다. 순서를 바꿔 공부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학자가 쓴 참고 서적이라 해서 크게 주눅들 건 없다. 그들이라고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니다. 어차피 철학사에 이름이 못 올라가기는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 논문에서도 본문에 이름을 올릴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각주로 처리해야 할 사람들이다. 국내에서 나온 해설서나 관련 논문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외국의 책들을 군데군데 떼어다가 짜깁기 해놓은, 이른바 <이중 저작>인 경우가 허다하고 내용상 학설 소개에 그치고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참고 서적을 읽은 다음에는 다시 철학자의 책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읽는다. 누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이거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읽어야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 자기 글을 써볼 차례다.

오로지 원저작만을 인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써서 글이 안 되면 원저작을 다시 읽어야 한다. 원저작의 인용만으로 글을 쓴 다음에는 참고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각주에 덧붙인다. 본문과 각주가 글에서 차지하는 지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각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문은 글의 뼈대요, 살이다. 각주에나 들어갈 내용을 본문에 쓰는 것은 페이지 늘리기이다. 앞서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면 칸트의 저작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자면 본문에는 그의 원전에서 인용한 것만이 들어가야 한다.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에 담긴 내용은 각주에서 처리하면 된다. 들뢰즈가 제시한 칸트 해석을 논문의 주제로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논문이 아니라 소개글, 또는 에세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학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논문을 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원저작과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대결이 없다면 영원히 참고서에 의존해야 하고 원저작을 넘어설 수 없다. 물론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쓰기보다는 자기 주장만으로 글을 쓰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현단계에서 그걸 하는 건 도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원저작과 대결함으로써 철학자의 사유의 힘을 익히고 깊이를 다져서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부딪히는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중 제법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문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주어 동사가 맞지 않는 문장으로 가득한 학술 논문,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본이 사방에 쌓여 있는 건 문장 쓰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 쓰레기 더미를 쌓는 일을 거들겠다면 문장 훈련을 게을리해도 좋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평소에 글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소개서 한 장도 안 써본 사람이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 여기저기서 떼다 붙인 글로 리포트를 써내던 사람이 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떼다 붙인 글들도 문장이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 주제나 붙잡고 글을 써봐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일기라도 날마다 써야 한다. 말은 일사천린데 글은 엉망이라면 공부를 접는 게 낫다. 생각이 표면에서만 떠돌 뿐 되새겨지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책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생각도 정리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책 한 권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과 주석으로 이루어진 논문을 배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무시해도 된다. 생각의 결을 따라서 물 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글은 언제든 쓸 수 있지만 엄격한 틀 속에서 글을 쓰는 훈련은 다시 할 기회가 없다. 글은 최대한 간결하게 써야 한다. 열 개의 문장으로 하던 이야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걸 단 한 문장으로까지 줄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주제 정하기, 원저작과 참고서 읽기, 글쓰기는 모두 혼자서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의논해서, 스터디를 통해서 함께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른바 <스터디>라는 거 해봐야 대강 대강 읽기 마련이고, 끝나고 벌어지는 뒤풀이나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니 시간 낭비다. 물론 이런 사교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런 사람과는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한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 정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에게 묻지 말고 지도 교수에게 물어야 한다. 선배가 가까우니 선배에게 묻는 것이 쉽겠지만 그거 좋은 점 하나도 없다. 우선 선배는 불확실하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삼 사년 선배라 해도 자신보다 크게 나을 것 없다. 또 선배에게 자주 묻다 보면 공부와는 관계없는 <인간 관계>가 생겨서 훗날 그 선배의 글을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어렵게 되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도 어렵다. 선배를 우습게 안다고 말하는 선배는 정말로 우습게 알아도 된다.


5

마지막으로 할 일은 공부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지금까지는 기존의 철학자의 사고를 검토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나의 언어로 소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 하는 일은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참으로 복합적인 영역과 재료로써 이루어진다. 철학으로 간주되는 영역만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공부를 심화시키는 목표는 교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가 되는 데 있다. 공부는 벼슬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교수가 되는 방법은 따로 있다. 교수가 되려면 철학 이외의 분야를 공부해서는 안 되고 철학에서도 자신이 전공하는 세부적인 부분 이외의 것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 세부 전공 분야에서의 다른 교수들, 특히 외국의 교수들의 논문이나 책을 대강이라도 많이 읽고, 그들의 논의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굳이 비판까지 할 필요는 없다. 될 수 있으면 가장 최근의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을 골라서 소개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글을 써서 학회에 가서 부지런히 발표도 하고 마찬가지의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사교도 하고 자신의 글이 학회지에 실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수가 되고 나서 그 바닥이 편협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스스로가 그런 것도 예측하지 못한 바보임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자가 되려면 우선 공부를 시작할 때 했던 일, 즉 베끼기를 계속해야 한다. 자신이 집중적으로 연구한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해서 철학의 전 영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다른 분야를 공부한 사람의 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해도 못하는데 토론과 비판은 더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을 계속해서 다지는 것은 심화된 공부에 있어서도 밑거름이다. 심화의 과정에서는 반드시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선 읽어야 할 분야는 역사이다. 통사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항목을 다룬 역사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역사책 읽기는 철학적 주제들에게 생동성을 가져다준다. 몰역사적인 철학적 사유는 위험한 것이다. 철학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려면 과거에는 어떻게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걸 전범으로 삼아 오늘날 요구하는 바를 파악해야 한다. 과거와 오늘날의 끊임없는 대조를 통해서만 철학적 탐구가 빠져들 수 있는 추상성이라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면 신문이나 잡지 등을 열심히 읽어야 함이 기본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가지고 읽어야 하므로 사회과학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에 대한 독서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만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기본을 갖출 수 있고, 그것이 공허한 탁상공론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한 메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철학 속에 <삶>이 들어간다. <생활 속의 철학>은 고매한 에세이 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철학 공부하는 이들도 시대의 아들이다. 그러니 시대를 넘어설 수 없고,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시대에 충실한 학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사유로 가는 첩경이 아닐까. 철학사에서 접하는 철학들 중에서 오로지 철학만 공부해서 얻어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모든 분야를 골고루 천착한 결과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훌륭한 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인데, 이게 구체적으로는 먹고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를 먹여 살려주는 사람을 욕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목이 걸려 있는 일에 소신을 거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말로는 대의명분을 지껄여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열이면 아홉이 수그러드는 게 사람의 행태다. 그러니 아예 속 편하게 학문과는 무관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학문적 독립성을 지키는 데에는 가장 좋을 것이다. 게다가 직업을 가지면 구체적인 현실 속에 정신이 자리잡을 수 있고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자학과 자만에 빠지지도 않는다. 글을 통한 현실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스피노자를 존경한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당장 안경사 자격증을 따라.

6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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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마음 2006/07/31 23:24

자유는 끊임없는 시도와 연습의 결과이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자유로운 동작은 아무리 새로워보인다 하더라도 이미 연습을 통해 몸에 익힌 수많은 동작들 중 하나를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반복 혹은 변용하는것에 불과하다.

less..

가령 유능한 테니스선수나 골프선수가 어떤 상황에서도 원하는 자세에서 정확한 동작으로 일관성잇게 타구를 쳐 낼수 잇는 것은 그러한 자세-동작이 언제어떤상황에서도 원하는대로 가능할 수 잇도록 관련된 모든 필요한 근육, 순발력-유연성, 심페기능 등등의 기초체력을 끈임없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충분히 넉넉한 수준에 도달시키고 또 유지강화 시켜왓기 때문이다. 유능한 발레리나나 체조선수가 기댈데 하나 없는 허공에서도 상상력이 원하는 대로의 자세와 동작을 할 수 잇는것도 마찬가지다.


또 유능한 재즈연주자가 그 음악안에서 홀로 마음가는대로 자유로우면서도 동료들과 어울려 아름다울 수 잇는것은 이미 수많은 날들을 연습과 기초훈련을 통해 시도, 반복, 불화, 좌절, 실패, 화해, 섬광같은 만족...등등의 기억이 몸속에 정신속에 이미 엄청난 양으로 쌓여잇고 또 게속 쌓아나가고 잇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명연주자가 되엇다 하더라도 스케일연습은 항상 빠지지않는 법이다. 유능한 엔지니어가 아무리 낯선 미로를 마주하더라도 변함없이 정직하고 자유롭게 차근차근 출구를 찾아나갈 수 잇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육체적-정신적 기초체력이 허술하면 허술한 그 기초체력이 허락하는 범위내의 몇몇 동작만이 겨우 가능할 뿐이다. 자유랑은 거리가 멀다. 오직 끈임없는 시도와 연숩만이 딱 그만큼만 우리를 자유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게 해 준다. 즉
평균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스케일연습이듯이, 모름지기 겉으로 드러난 자유로움이란 수면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연습과 기초훈련이야말로 물속에 잠겨잇는 빙산처럼 자유의 숨어있는 거대한 실체라고 할 수 잇을 것이다. 자유 역시 습관 혹은 버릇의 문제이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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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두 분이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데,

이 마음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결혼식장에서 약속한 것 다 지키고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검은 머리가 하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거나,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겠는가 물으면,

예 하며 약속을 해놓고는 3일을 못 넘기고 3개월, 3년을 못 넘기고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 아내 때문에 못살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다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혼하기를 원해놓고는 살면서는 아이고 괜히 결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하는 게 나았을걸, 후회하는 마음을 냅니다.

그럼 안 살면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해놓고 안살 수도 없고

이래 어영부영하다가 애기가 생기니까 또 애기 때문에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가지고,

아내가 남편을 아이고 웬수야 합니다.

이렇게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고생 고생하다가

나이 들면서 겨우 포기하고 살만하다 싶은데,

이때 또 자식이 애를 먹입니다.

자식이 사춘기 지나면서 어긋나고 온갖 애를 먹여가지고

죽을 때까지 자식 때문에 고생하며 삽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혼할 때는 다 부러운데 한참 인생을 살다보면

여기 이 스님이 부러워, 아이고 저 스님 팔자도 좋다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스님이 되는 것이 좋으면 처음부터 되지 왜

결혼해 살면서 스님을 부러워합니까?

이렇게 인생이 괴로움 속에 돌고 도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이유를 말할 테니 두 분은 여기 앉아 있는

사람(하객들)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렇게 좋아서 결혼하는데 이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그 따져보는 그 근본 심보는 덕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지위는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이유는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손해볼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덕볼 수 있는 것을 고르고 고릅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에게 덕보고자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덕보겠다는 이 마음이 살다가 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주고 70% 덕보자고 하고,

남편도 자기가 한 30%주고 70% 덕보려고 하니,

둘이 같이 살면서 70%를 받으려고 하는 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보면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십중팔구는 하게 됩니다.

속은 것은 아닌가, 손해봤다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덕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

좀 적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쥐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 해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굴도 안보고 결혼해도 잘 살았습니다.

시집가면 죽었다 생각하거든.

죽었다 생각하고 시집을 가보니 그래도 살만하니까 웃고 사는데,

요새는 시집가고 장가가면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하고 가보지만

가봐도 별 볼 일이 없으니까, 괜히 결혼했나 후회가 됩니다.

결혼식하고 며칠 안 돼서부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 전부터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

신랑신부 혼수 구하러 다니다가 의견차이가 생겨서 벌써 다투게 됩니다.

안 했으면 하지만 날짜 잡아놔서 그냥 하는 사람들도 제가 많이 봅니다.

오늘 이 자리의 두 사람이 여기 청년정토회에서 만나서 부처님법문 듣고

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래도 저분하고 살면서 저분이 나하고 살면서

그래도 좀 덕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줘야 않느냐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보를 잘못 가져놓고 자꾸 사주팔자를 보려고 합니다.

궁합본다고 바뀌는 게 아닙니다.

바깥 궁합 속 궁합 다보고 삼 년을 동거하고 살아봐도

이 심보가 안바뀌면 사흘 살고 못삽니다.

그러니 이 하객들은 다 실패한 사람들이니까

괜히 둘이 잘살면 심보를 부립니다.

남편에게 '왜 괜히 바보같이 마누라에게 쥐어 사나,

이렇게 할 것 뭐 있나'하고,

아내에게는 '니가 왜 그렇게 남편에게 죽어 사나,

니가 얼굴이 못났나 왜 그렇게 죽어 사노'

이렇게 옆에서 살살 부추기며, 결혼할 땐 박수치지만

내일부터는 싸움을 붙입니다.

이런 말은 절대 들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괜히 심술을 놓는 것이다.

남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남편에게 덕되는 일 좀 해야 되겠다.

남이 뭐라 그러든, 어머니가 뭐라 그러든 아버지가

뭐라 그러든, 누가 뭐라 그러든

나는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딱 굳혀야 합니다.

괜히 애까지 낳아놓고 나중에 이혼한다고 소란피우지 말고

지금 생각을 딱 굳혀야지, 그렇게 하시겠어요?

덕 봐야돼요? 손해 봐야돼요?

'손해보는 것이 이익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분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성 좀 해야합니다.

이렇게 두 분의 마음이 딱 합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아내의 오장육부가 편안해집니다.

이 오장육부가 편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임신해서 애기를 갖게 될 때 .

편안한데는 편안한 게 인연을 맺어오고,

초조불안하면 초조 불안한게 딱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잉태라고 합니다.

태교가 아니고, 잉태할 때 여자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잉태를 하면 선신을 잉태를 하고,

심보가 안 좋을 때 잉태를 하면 악신을 잉태합니다.

처음에 씨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결혼해 가지고 덕보려고 했는데 손해를 보니까,

심사가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같이 자다보니 애가 생깁니다.

기도하고 정성 다해서 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둘이 좋아 가지고 더부덕덥덥 하다보니까 애기가 생겨버립니다.

그러니 이게 처음부터 태교가 잘못됩니다.

이렇게 잉태해 가지고는 성인 낳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밥 먹고 짜증내고 신경질 내면

나중에 위를 해부해보면 소화가 안되고 그냥 있습니다.

이 자궁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오장육부하고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짜증을 내면 오장육부가 긴장이 되어있습니다.

안에 있는 애기가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선천적으로 신장질환이 생기든지

아이가 불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엄마가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고 원기가 늘 따뜻하게 돌고,

애기가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나중에 태어나도 선척적으로

도인처럼 편안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애를 가진 이는 편안해야합니다.

편안하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편안한 것은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바로 남편의 영향을 받습니다.

남편이 애는 좋은 애를 낳고 싶으면서 아내를 걱정시키면

좋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애를 가졌다고 하면 집에 일찍 들어오고

나쁜 것은 안 보여주고 늘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거들어 줘야합니다.

시어머니들도 손자는 좋은 것을 보고 싶은데

며느리를 볶으면 손자가 나쁜 애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편안하도록 해줘야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편안한 것이 제일 좋고,

주위에서도 이렇게 해줘야합니다.

이렇게 정신이 중요하고 두 번째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합니다.

육식을 조금하고 채식을 많이 하고,

술 담배를 멀리하고 이렇게 해야 애기에게 좋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애기를 낳은 후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둘이서 서로 싸운다면 안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 배우고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말 배우고

일본에서는 일본말 배우고 원숭이 무리에서 자라면

원숭이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아이의 심성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기가 조그만하다고 애기를 옆에 두고 둘이서 짜증내고 다투면

사진 찍듯이 그대로 아기 심성이 결정이 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주정하고 그러면 아이가 나는 크면

절대로 그렇게 안 할거야 하지만 크면 술주정합니다.

다투는 집에서 태어나면 자기는 크면 절대로 다투지 않겠다고

하지만 크면 다투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모방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기를 낳으려면 직장을 다니지 말아요.

아니면 3년은 직장을 그만두어요.

아니면 애기를 업고 직장에 나가든지.

이렇게 해서 아이를 우선적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를 우선적으로 하려면 아이를 낳고 안 그러려면 안 낳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가 복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인생을 망치는 고생덩어리가 됩니다.

애 때문에 평생 고생하고 살게됩니다.

3년까지만 하면 과외 안 시켜도 괜찮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안 하려면 낳지를 말고 낳으려면 반드시 이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좋고 자식도 좋고 세상도 좋습니다.

잘못 애 낳아서 키워놓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첫째 명심하십시오. 가정에서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 제가 신도 분들 많이 만나보면,

애 때문에 시골 살면서 남편 떼어놓고 애 데리고 서울로

이사가는 사람, 애 데리고 미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절대 안됩니다.

두 부부는 애기 세 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적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합니다.

애기는 늘 이차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대학에 떨어지든지 뭘 하든지 신경쓰지 마십시오.

누가 제일 중요하냐, 아내요 남편이 첫째입니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면 무조건 따라가십시요.

돈도 필요없습니다.

학교 몇 번 옮겨도 됩니다.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남편은 아내를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살면

아이들은 전학을 열 번 가도 아무 문제없이 잘삽니다.

그런데 애를 중심으로 놓고 오냐오냐하면서

자꾸 부부가 헤어지고 갈라지면

애는 아무리 잘해줘도 망칩니다.

여기도 그렇게 사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정신차리십시오.

제 얘기를 선물로 받아 가십시오.

이렇게 해야 가정이 중심이 서고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이렇게 먼저 내가 좋고 가정이 화목한 것을 하면서

내가 사는 세상에도 기여해야합니다.

우리만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늘 내 자식만 귀엽게 생각말고

이웃집 아이도 귀엽게 생각하고

내 부모만 좋게 생각하지 말고 이웃집 노인도

좋게 생각하고 이런 마음을 내면

내가 성인이 되고 자식이 좋은 것을 본받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식에게 정성을 쏟으면

반드시 자식이 어긋나고 불효합니다.

그런데 늘 자식보다는 부모를,

첫째가 남편이고 아내고 두 번째는 부모가 돼야

자식이 교육이 똑바로 됩니다.

애를 매를 들고 가르칠 필요없이

내가 늘 부모를 먼저 생각하면 자식이 저절로 됩니다.

그러니까 애를 키우다 나중에 저게 누굴 닮아 그러나 하면 안됩니다.

누굴 닮겠습니까.

둘을 닮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나쁜 인연을 지어서 나쁜 과보를 받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반드시 인연을 잘 지어서 처음에 조금만 노력하면

나중에 평생 편안하게 살수 있습니다.

두 부부는 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해야합니다.

자식을 낳으려면 잉태 할 때와 뱃속에 있을 때,

세 살 때까지가 중요하니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부부가 화합해야합니다.

주로 결혼해서 틈이 생길 때, 애가 생기고

저 남자와 못살겠다 할 때, 애기를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저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가 중학교까지 잘 다니다가 고등학교 가더니 그렇다,

친구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그러니 이미 자녀가 그렇게 되었거든

지금 엎드려서 참회를 하여야 고쳐집니다.

지금 이 부부는 안 낳았으니까 반드시 그렇게 낳아야 합니다.

세 번째 남편을 아내를 서로 우선시 하고 자식을 우선시 하지 않습니다.

첫째가 남편이나 아내를 우선시하고 둘째가 부모를 우선시해야지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부모를 우선시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일단 아내와 남편을 우선시 할 것,

두 번 째 부모를 우선시 할 것,

세 번 째 자식을 우선시 할 것,

이렇게 우선순위를 두어야 집안이 편안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사회의 여러 가지도 함께 기여를 하셔야합니다.

이러면 돈이 없어도 재미가 있고, 비가 새는 집에 살아도 재미가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즐겁자고 사는 거지 괴롭자고 사는 것이 아니니까,

두 부부는 이것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밖에 가서 사업을 해도 사업이 잘되고, 뭐든지 잘됩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개인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생각 고집해서 살면

결혼 안 하느니보다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좋은 이 마음이 죽을 때까지 내생에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따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살지 않아도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승보살의 길입니다.

제가 부주 대신 이렇게 말로 부주를 하니까

두 분이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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