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829 우리모두 동호회 영화방(영화동아리 끼노 인 그랑까페)


와호장룡

- 감독 : 이안
- 주연 : 주윤발, 양자경, 장지이, 장진

나는 무협장르를 잘 모른다. 영화든 소설이든, 내게 무협은 어느날 갑자기 물밀 듯 밀려온 홍콩산 싸구려 다작들 중 하나였거나, 허풍 심한 마초들의 자기과시 욕구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다 우연히 보게 된 무협영화들은 손에서 장풍을 뿜어내고, 목숨을 걸만큼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칼이나 낡은 책을 뺏기 위해 어처구니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별로 대단치도 않아 보이는 무림의 고수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상대에게 자기 무술을 뽐내며 자신들의 골빈 마초근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협들은 또 어떤가. 그닥 흔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나마 등장하는 여협들은 언제나 남자고수들보다 한 수 아래인 주제에 그들에게 도전하며 내 무예를 한번 봐줘, 하고 애처로운 사랑을 구걸하거나 굳이굳이 남자 고수를 이긴 대단한 협객으로 인정받기를 구걸한다. 그들은 손에서 장풍을 뿜어내고 미세한 자객의 움직임을 파악해낼 재주는 갖고 있을지언정 주책맞게 복수의 대상한테 정신이 홀리거나 하여 파멸하는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었다. 대부분 일가의, 스승의, 자신이 속한 무예파의 복수를 한답시고 떠돌아다니며 주막에서 폼이나 잡는 남녀 협객들에게 내가 본 것은 그저 상대를 누르고 나의 잘남을 과시하려는 천박한 파괴욕과 허영 뿐이었다. 그나마도 현란한 폭발음과 칼끝에서, 혹은 바늘 끝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바람에 단역들을 쓰러뜨리는 장면들은 눈요기는 될지 몰라도 '아무튼 떼놈들의 허풍이란!' 하며 코웃음을 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와호장룡>을 보러 간 것은 그것의 장르 때문이 아닌 이안감독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었다. 최근에 지각개봉한 <라이드 위드 데빌Ride With The Devil>(이 영화는 미국에서는 이미 작년에 개봉된 바 있다.)을 제외하고는 <쿵후선생>부터 그의 모든 영화를 다 봐온 나로서는, 이상한 영어제목으로 알려진(세상에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이라니!) 영화를 이안감독이 차기작으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던 2년 전부터 꽤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협장르의 영화에 전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감독이 이안이라면, 뭔가 다르리란 신뢰감 하나만 갖고 기대를 해 왔던 것이다.
백인 아해들은 이 영화를 보며 Wonderful!!을 연발하면서 내년 아카데미상의 강력한 후보작이라고 떠들고 감격해할지 몰라도, 워낙에 황당하고 현란한 과장으로 뒤범벅된 무협영화를 많이 접해 본 한국관객들에겐 이 영화가 좀 심심하다. 꼭 그것 뿐은 아니더라도, 씨네21에서 지적했듯 플롯이 의도적으로 느슨해진 이 영화는 좀 심심하다. 그런데, 그 심심한 이야기와 심심한 화면 뒤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자연, 그 속에 어우러진 (비주얼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인간사에 짙게 배인) 여백과 깊이는 이상하게 마음에 파고든다.

초절정 고수이지만, 이제 강호에 대한 미련을 버린 리무바이의 그 득도한 듯한 풍모와 칼놀림새, 그리고 공중을 '날아가는' 복면의 협객을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가' 추적하는 여협 수련의 몸짓에 배인, 삶의 희노애락을 겪어본 나이든 자의 지혜로움은, '무예'를 통해 삶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수도자의 경건함이 배어 있다.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세상에 저 혼자 잘난 줄 아는 철없는 아해를 상대할 때 리무바이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은 상대를 깔보고 비웃는 냉소가 아니다. 그에게는 굳이 상대를 죽임으로서 자신의 우월감을 입증하려는 자기과시욕적인 마초근성이 없다. 스승의 복수를 한다고는 하나, 그에게는 복수하려는 자의 파괴적이고도 맹목적인 증오심이 보이지 않는다. 여협 수련에게 있어서 무예는 사랑하는 이와 연결된 끈이고, 사랑하는 이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녀는 철없이 날뛰는 아해를 오히려 지켜주고, 그 아해가 스스로 그 잘못을 돌이키고 수습할 기회를 준다.
수련과 용은 완전히 남남으로서 자매애를 나누지만, 이것은 씨네21에서 지적한 대로 이상적인 아버지(리무바이)와 어머니(수련), 그리고 막 사춘기를 맞은 혈기방장한 딸(용)로 구성된 유사가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딸은 아버지에게 계속적으로 도전하고 아버지를 이기기 원하며, 그럼으로써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자신을 보살펴주고, 자신이 기댈 수 있으나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얻는 과정에 놓인 방해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사춘기의 뜨거운 사랑을 경험하지만,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 그것은 철없는 불장난에 속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딸을 보는 어머니로서의 수련은,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며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일렉트라 콤플렉스를 겪는 딸을 바라보며 당혹감을 느낄 뿐이다. 그녀는 용에게 특별한 적대감이나 증오를 품지 않는다. 오히려, 도전해 오는 딸을 지켜주려다가 철없는 딸에게 칼을 맞을 뿐이다. 용과 수련의 두 번의 결투씬은, 처음 복면을 한 용과 수련의 결투씬의 경우 최초로 어머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는 딸을 보며 문득 딸이 성숙한 여자로 컸음을 깨닫게 되면서도 계속 야단을 쳐야 하는 어머니의 당혹감과 딸의 자기과시로 해석할 수 있다면, 자매지연을 끊으며 벌이는 결투는 딸과 어머니의 본격적인 대립이라 할 수 있겠다. 어머니는 노련하고 여유로운 테크닉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제 막 피어오르는 꽃인 딸의 매혹적인 자태나 힘, 날렵함은 따라잡지 못한다. 수련이 보다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을 띄는 반면, 용이 보다 신세대적인 여성의 모습을 띄는 것은 근래의 여성의 위치변화와 그리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제 어머니의 시대가 가고 한창 나이의 여성으로서 엄마를 능가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된 딸이 속으로 느끼는 당혹감은, 오히려 파란 여우와의 대화를 통해 표출된다.


이들에게 칼, 혹은 무예란 무엇일까. 이들을 연결해 주는 것, 이들을 비로소 2세대로 구성된 '가정'의 형태로 묶어주는 데에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것은 '청명검'이다. 더러운 피를 묻힌 적이 없다는 이 청명검은 아버지에게는 마침내는 버려야 할 세상의 번뇌 그 자체이자, 끊어버려야 할 속세의 연이다. 딸에게 그 보검은 끊임없이 아버지의 관심을 다시 속세로 끌어들이는 매개체가 된다. 어머니는 남편의 뜻을 이해하고, 남편이 세상에 던져진 하나의 존재로서 본질로 향하는 발걸음을 돕지만, 딸은 끊임없이 속세의 '관계'를 요구하고, 어머니와 대립한다. 용이 (장난으로 훔쳐본 거라 말하면서도) 그토록 청명검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청명검을 매개로, 그들은 '무예'를 겨룸으로써 서로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눈다. 또 한편으로 무예는, 자기 자신이 속세에서 영혼의 본질로 나아가기 위한 수련의 과정이다. 아버지에게는 득도와 해탈을 향한, 스스로와의 싸움이자 정진의 과정인 이 무예의 본질을 딸에게 가르치려 하지만, 딸에게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관계를 얽게 되는 매개체가 바로 이 무예이다. 따라서 '수제자로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말은, 너와 부녀 간의 관계를 맺겠다는 선언이라기 보다는, 네가 네 자신의 길을 가도록 돕겠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독립에 대한 권유이다.
아버지는 죽음 직전에서야 자신의 번뇌의 본질을 깨닫는다. '성(聖)'과 '속(俗)에 대한 풀리지 않는 번뇌의 끈이랄까.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가진 존재이며, 그는 두 세계를 조화시키지 못했음을, 그렇기에 자신이 향했던 해탈의 경지는 결국 '반쪽' 밖에 될 수 없음을 고백한다. 아버지는 성을 위해 속을 버렸고, 결국 자신은 평생을 허비했다고 고백한다. 딸에게 성은 존재하지 않는 경지이며, 끊임없이 속의 최고 경지를 열망하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속의 허망함을 깨닫고 추락한다. 둘 다, 선택한 길은 달랐으나 방향점은 같았다. 성을 통해 속을 초월하는 것, 그리고 그 성조차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길이었다면, 속의 최고경지에 올라섬으로서 성을 초월하는 것, 그리하여 속을 버리는 것이 딸의 길이다. 딸이 주막에서 덩치들과 무예를 겨루며 자신을 '신선'과 같은 존재로 소개하는 대목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결여된 득도 혹은 해탈은 본인은 물론 다른 이에게도 역시 상처와 회한을 남긴다. 그리고 성과 속의 변증법적 결합은 두 경우 다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용의 추락을, 생물학적 목숨의 죽음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살았다 죽었다라기 보다는 사실 제 3의 선택이라고 해야 가장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그렇기에 용의 추락을 마침내 자유를 향한 득도의 경지로 해석하는 일부의 견해에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여기서 파란 여우의 존재를 한번 보자. 그녀는 아버지(리무바이)의 정신적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리무바이의 육체적(세속적) 어머니가 될 뻔한 사람이다. 그녀는 용을 선택해 자신의 딸로서 대하지만, 딸이 자신에게 반항함을 알았을 때 그 사랑은 100% 분노로 전환된다. 육체의 어머니 혹은 세속의 어머니는 정신적 어머니(수련)와 달리, 반항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상한 친모에서, 자식이 반항을 시작하면서 사악한 계모로 둔갑한다. (주: "옛이야기의 매력"의 저자 브루노 베텔하임의 정신분석학적 분석에 의하면, 옛이야기에서 사악한 계모의 존재는, No!를 말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노출시키기 시작하는 자식에게 엄격해지는, 그래서 자식에게는 '야속하게' 다가오는 어머니를 또다른 인격체 형상화시킨 대상이라 한다.) 그러나 독립된 개체로서 서지 못하는 딸은 육체적 어머니와의 연을 끊지 못하고 오히려 파란 여우에게 종속되어 끌려다니다가 결국 죽음의 위기까지 겪는다. 결국 용에게 어머니의 이미지는 둘로 분열된 인격체이다. 한쪽은 사악한 의도를 감춘 채 겉으로만 자상하다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고 마는, 딸에게 야속하고 결국 딸의 길을 막는 세속적 어머니 파란 여우와, 엄격함과 진정한 모성을 함께 감추고 있는, 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는 극복의 대상인(딸에게 있어 어머니는 언제나 극복의 대상이다.) 정신적 어머니 수련.

이안 감독의 영화에서 아버지, 어머니, 자식의 직계 2대의 '온전한(?)' 가족이 등장한 적은 없다. <쿵후선생>부터 (<라이드 위드 데빌>은 안봤으니 제외하고) <와호장룡>까지, 자식들은 버려져 혼자 사는 조부에게 맡겨지거나(쿵후선생), 실질적으로 세대 간, 성적취향 간, 사는 공간 간 단절이 되어 있거나(결혼피로연), 오랫동안 어머니 없이 산 아버지는 이미 부권을 상실했거나(음식남녀), 부모의 빈 자리를 큰 언니가 메꿔야 하거나(센스, 센서빌리티), 부모는 부모이되 이미 부모가 아닌(아이스 스톰) 상황이다. 하긴, 현대에서 온전한 가정이 등장하는 영화의 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마는. 그래도, 그나마 이전의 가족들은 혈연으로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었지만, <와호장룡>에서의 가족은 혈연관계가 무시된 유사가족이다. 그럼에도, 이안의 작품들에서 <와호장룡>의 유사가정은 그나마 가장 가정답다. 물론 그나마도 아버지의 회한의 죽음, 딸의 허무한 추락으로 귀결되긴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나무 가지 위에서의 결투씬일 것이다.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온화한 미소를 띄운 채 가볍게 균형을 잡고 여유만만하게 싸움에 응하는 리무바이의 모습이 너무나 눈부시다. 어린애가 기술부터 연마하면 삐뚤어지기 십상이라고 농을 치긴 하지만, 용의 날카롭고 강하고 힘찬 무술의 멋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 뿐 아니라, 또다른 리무바이 대 용의 결투씬은 물론, 사실은 수련 대 용, 용 대 호가 서로 쫓고 쫓기며 결투(용과 호의 체이스를 과연 '결투'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를 벌이는 모든 (무협)씬들이 아름답다. 결국 용이나 리무바이나, 우리가 범접할 수 있는 평범한 경지의 사람들은 아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지고 가야 하는 수련과 호에게서, 수도의 길을 가되 극단의 길을 가지는 못한 자와, 속에 모든 것을 걸었으되 결국 상실만을 맛보아야 하는 우리네 평범한 인간들의 인생이 조금 보일까.

notice :
1. 여기서 딸, 아버지, 어머니 등의 가족관계적 호칭은 혈연관계와는 무관하다.
2. 육체적 어머니란 호칭 역시 혈연관계와 무관한, 세속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관계를 뜻한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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