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4.8.싸이홈피, 우리모두에 올렸던 글>

한때 꽤나 똑똑한, 정말 똑똑한 친구들과 1주일이 멀다 하고 만나던 때가 있었다.
아무리 낮취봐도, 정말이지 나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거형 표현은... 내 표현능력의 한계로 인한 것일 뿐이다. 지금도 그 중 일부와는 친교라고 부를 만한 것을 지속하고 있으며, 그들 혹은 그들 중 누군가와 제대로 사이가 틀어졌다든가 뭐 그런 종류의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무슨 행운이었는지 그들과 함께 얼마 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그 행운의 양이 다 된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으나 현재 시점에서, 스스로 돌아보기에는 그러하다.)

만나다 보니 나는 대단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사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단지 그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 역시 그들처럼 똑똑한 축에 든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그 점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아닌 척하고 다녔다면 벌받을 짓이고,
아마 당시에는 스스로도 그런 줄을, 적어도 의식으로는 몰랐던 모양이다.(이게 내가 당시의 나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변명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정도 되는 사람들과 제법 어울리고 있으니 나도 썩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은밀하면서도 강렬한 목소리에 취해 있었던 듯.

물론 우둔한 이가 똑똑한 이와 어울리지 말란 법도 없으며, 기타등등 내가 겉으로, 지금 이야기한 감정과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키거나 한 것도 아니다.(과연? ;;;;;;)
그냥 우둔한 사람답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깨닫는 바가 쌓여 왔고
물통에 찬 물이 넘치듯이(내 눈높이가 물통의 윗부분과 같은 높이 쯤에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쌓이다 못해 넘치기 시작한 깨달음을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좀 비관적일 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그 무리 속에 매끄럽게(좋은 의미에서) 합류했다기보다는...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받아들여 주었다는 점에선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심정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나를' 이어서가 아니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어떤 사연으로 서로를 알게 되었건 간에
나는 그들이 좋다. 가능한 한 오래 친교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이제까지처럼 썩 나쁘진 않았던 줄타기(전에는 줄타기한다는 의식이 없었다.)를 그럭저럭 계속해 나가는 것도 방법이겠고,
아니면 모자란 똑똑함을 공부로 메우(?)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 뭔 얘기들 하는지 정도는 알아들어야 할 거 아닌가.



이왕이면 공부하는 쪽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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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6 우리모두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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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 때 추리소설과 과학소설(SF)을 죽어라고...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 추리소설로 말할 것 같으면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 반 다인, 엘러리 퀸 등의 소위 본격 추리소설 류도 읽어 보았고 더 쉴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 등의 하드보일드 작품들도 약간씩 보았다.
중고생 이후로는 좀 뜸해진 편이지만 올해 들어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 장편 시리즈'가 완역되어 나온 것을 발견하고 한 권씩 읽어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미국 작가 폴 오스터나, 혹은 그 이전부터 붐(?)을 탄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사람들이 챈들러 작품들을 아주 좋아한다는데...
그 양반들이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몰랐어도 나 역시 중고생 때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을 읽고 그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 앞의 두 작가 양반이나 그외 챈들러 옹호자들, 내가 빌려온 챈들러 책들을 같이 본 누나가 하는 말 중에 공통된 것이 "이토록 문장이 멋질 수가!"이다. 뭐 챈들러의 미덕은 그것만이 아니긴 하지만(미국 사회의 부도덕한 단면을 문자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서술한다든가 하는 점 등등).

원체 추리든 과학소설이든 번역시장이 좁다 보니 번역되어 나오는 작품들 자체가 그 분야의 고전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그 고전의 출판이란 것이 한 작품을 여러 출판사에서 내 놓는, 어찌 보면 다양해서 좋고 달리 보면 다른 원작을 새롭게 번역하지 않아서 아쉬운 그런 상황을 동반하는 경우도 상당하지만...그리고 번역의 수준 갖고도 드물지 않게 말들이 있지만, 내가 번역 수준까지 따질 내공은 아닌지라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면서 읽곤 했다.

그런데 그 얼마 안 되는 고전이라고 해도 또 내가 그 모두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라, 특히 책을 살 작정을 한 상태에서는 으레 고민이 되기 마련이다. 서평이니 책 소개니 해도 어차피 미사여구가 흘러넘치는 것(심하게 말하면 평이라기보단 광고) 이상이 아닌지라
결국 반쯤은 도박을 하는 기분으로 일단 책을 고르게 되며, 그러고 나면 만족하는 경우도 있고 남들은 고전이라 해도 개인적으론 만족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런 내 복잡다단, 지리멸렬(?)한 추리소설 편력에서 아직까지는 실망을 느껴 본 적이 별로 없는 작가가 몇 있다. 앞서 말한 챈들러가 그러하고, 첩보소설 작가로 유명한 존 르 카레가 또 그러하다. 그런데 존 르 카레는... 아직 두 권밖에 읽지 않았다;;;

겨우 두 권 읽고서 실망하지 않았네 뭐네 말하긴 뭐 하지만 그 사람의 작품은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할 지, 싸아한 페이소스(?)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점이 매력이랄지... 하여튼 그런 점과 더불어
그 두 권 다 굉장히 망설이면서 책을 샀으며 동시에 읽고 나서 책을 고른 걸 후회하지 않았다는 점(오히려 반대로 읽기를, 사 보기를 잘 했다고 느꼈을 정도) 때문에 적은 권 수에도 불구하고, 존 르 카레는 내가 감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

내가 읽은 르 카레의 책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러시아 하우스]이다. 앞의 것은 모 출판사의 추리문고 시리즈로, 뒤의 것은 단행본으로 나와 있는 것을 사 보았다. 뒷 작품의 스토리를 매개로 오래 전에 쟁토방에 글을 올린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추억이 된, 몇 번의 송강옥 나들이 때 잡넘 님이 존 르 카레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잡넘 님 말로는 존 르 카레는 서구의 다른 첩보소설 작가들에 비해서도 한층 뛰어나다는 평인데, 일단 '오락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유명작가들의 유명작품을 단 몇 편이나마 본 나로서도 공감이 가는 평이었다.

그런데 잡넘 님이 원서로 보았다는(번역본이 없어 나는 못 본;;;), 그리고 최고로 치는 르 카레의 작품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팅커, 테일러, 솔저 & 스파이]이다. 내용소개는 생략하고... 잡넘 님의 그 말씀을 듣고 이러저리 알아보았는데 모 출판사의 추리문고 시리즈에서 '출간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한숨을 쉬면서 일단 관심을 접은 적이 있다.

그러던 오늘(2005년 7월 26일) 다른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근처에 있긴 한데 '동네 서점'이라기엔 꽤 큰 곳) 책을 산 후 나가려도 몸을 돌리던 중... 신간 코너에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만 것이다.
물론 잡넘 님이 첩보소설의 ㅊ자만 나와서 흥분하면 침 튀기던... 바로 그 책이다. 제목을 본 그 순간의 짜릿함이라니.('출간 예정'이라던 그 문고판으로 나온 건 아니었다;;;)

문제는 가벼울 대로 가벼워진 나의 지갑과... 사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선약'을 해 둔 다른 몇 권의 책들.
늘 그런 편이긴 하지만 이 여름은 굉장히 고픈 계절이 될 것이다.


스파이 스릴러 작가 존 르카레의 대표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상 열린책들)도 최근 정식 판권 계약을 거쳐 번역돼 나왔다. 열린책들은 르카레의 작품 19편을 모두 번역 출간할 계획이다. (2005년 7월 23일자, 한국일보 김범수 기자의 기사 중에서. 현재 일간지의 서평은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두 곳인 듯하다. 우드득.)



좀 다른 얘기.
첩보소설의 전성기라고 하면 아직까지는 누가 뭐래도 20세기 중후반기를 들 수 있다. 첩보소설이란 장르가 아무래도 냉전이라는 시대상황에 힘입어 관심을 끌었다고 봐야 할 테니까.
그렇다면 냉전이 극에 달한 지역에 속하는 이곳 우리나라에선?
나름대로 기억할 만한 작품들(이를테면, 영화 [흑수선]의 원작이 된 김성종의 [최후의 증인]이라든가)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내 견문이 좁아서인지, 첩보 장르가 활성화되었다는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다.(정말 나만 그런 거 아냐?;;;)

반드시 활성화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애초에 시대적인 문제에 대하여, 서구 각 국가에 비해 발언할 기회랄까 권리랄까 그런 것이 심하게 억압받아 온 우리네 경험이 약간은 현 상황을 이루는 한 원인인 것은 아닐런지...

그리고 또다른 얘기.
이런저런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지만, 어쨌건 서구, 특히 미국에서 하드보일드 장르는 '자본주의 미국'의 추악하다면 추악한 이면(자본주의의 '화려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을 파헤쳤다는 '사회적 공헌'을 한 바 있다.
적합한 예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더 쉴 해미트 같은 사람은 정치색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매카시즘 시절 그의 작품이 공공 도서관에서 '퇴출'되기도 했고, 매카시 위원회에 소환당하여 매카시에게 심문을 받기도 했다. (나름대로 유쾌한 에피소드 하나, 매카시 왈 "이런 작품(해미트 본인의 작품)을 도서관에 두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해미트 답하기를 "나같으면 도서관이란 걸 인정하지 않겠소.")

하여간에, 미국에서 하드보일드 장르는 대략 30년대, 자본주의가 극에 이른 후 대공황이라는 이름의 파산을 겪었던 시절을 전후하여 활짝 꽃을 피웠다고 한다. 하드보일드 장르가 주목을 받은 후에,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후엔 첩보소설이 주목을 받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제 한국은, 피폐했던 식민지 시대와, 열전(한국전쟁)-냉전의 시기를 거쳐서, 그야말로 자본주의가 활짝 꽃을 피우는 시대가 되었다. 이상호 기자가 우리시대 자신의 책무(다시 말해 기자의 책무)를 "자본의 심장에 도덕성의 창을 꽂는"(이런 살떨리는 표현까지 써 가면서) 일로 규정한 것은 괜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이전에는 권위적이고 부패했던 권력이 정직한 기자(어디 기자 뿐이겠는가)의 눈을 가장 우선 두어야 할 곳이었다면, 이제는 그 눈 둘 곳이 자본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추리소설 내부 장르 간의 주목도에 있어서 그 추이는, 한국에서는 미국의 경우완 달리, 첩보소설에서 하드보일드 소설로 옮겨가지는 않을까 하는 객쩍은 예상을 해 본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의 추리 장르가 대중의 주목을 받는 동시에 장르 문학에 도전하고자 하는 재능 있고 야심찬 작가들이 등장해야 가능한 일이겠고, 아직 채 정리되지 못한 지난 시절을 냉철하게 반영한 대작 첩보소설 몇 편쯤은 이제라도 나왔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기대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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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1 우리모두 먹방 / 진보누리 누리까페



대구광역시 서구청 맞은편에는 신평리 아파트로 들어가는, 남쪽으로 뻗은 길이 있다.
 서구청 쪽에서 볼 때를 기준으로 그 길 왼쪽에는 또 하나의, 신평리 아파트 들어가는 길과 평행하게 난 길이 있다.
이 길의 대부분은 신평리시장이다.
신평리 아파트는 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져 동들이 늘어서 있고,
그 중 한쪽(서구청 기준으로 왼쪽) 동들에 시장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국민학교 시절을 잠깐을 제외하고 신평리 아파트에서 살았고, 신평리시장은 어머니를 따라 장보러 가는 시장이었다. 가끔 '마음먹고' 대구백화점이나 동아백화점, 동아쇼핑에 쇼핑하러 가는 날은 제외하고 말이다.
길게 뻗은 그 길 중간 즈음에 아파트 쪽으로 난 문이 있다. 다른 샛길도 있지만 대개는 이 문을 지나 시장에 들어섰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아다니면서 어머니와 함께 장본 것들을들고 다녔다.
길 양쪽에 가게며 좌판이 즐비했고, 웬지 바닥은... 늘 축축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축축해서 기분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축축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곳곳에 어머니가 가는 단골 가게들이 있었다. 그리고 활기찬 이미지 - 시끄럽다는 생각은, 이상할 정도로 지금에 와서도 들지 않는다. 활기찬 곳. 상인들이(아저씨 아줌마들이) 웃으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좁은 길을 리어카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옆으로 비켜서서 가게나 좌판에 쫙 달라붙어야 하는 곳. 참 다들 신기하게도 잘도 비켜서던 기억.


당연히 시장이니까, 먹을 것이 많았다. 주로 사는 것도 음식들이었고.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왼쪽으로(즉 서구청 쪽으로) 돌아서면 핫도그 집이 있다.
왼쪽으로는 가게며 좌판이 많지 않았다. 태반은 문에서 오른쪽 그러니까 남쪽에 가게며 좌판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장도 주로는 그쪽에서 보곤 했다.

핫도그 집
집이라기보단 가게다. - 리어카에 튀김기름이 펄펄 끓고 있고 거기서 갓 나온 핫도그에다 설탕과 케첩을 뿌려 먹는 것이다. 시장 가면 어머니께 제일 자주 사 달라며 달라붙었던 군것질거리이다. 지금은 길다란 핫도그가 더 많지만 당시 그곳 핫도그는 동그란 쪽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쑥떡
문 오른쪽의 어딘가에 좌판이 있었다. 양푼에 쑥떡이 콩고물 묻혀 가득 담겨 있었다.
아주머니가 쑥떡을 썰어 비닐에 담아 넘겨 주면, 무게가 가벼운 탓에 대개는 내가 들곤 했다. 얼른 집에 가서 쑥떡을 먹어야지...... 가끔은 설탕을 묻혀 먹기도 했다.
신평리사장의 추억 때문인지 지금도 떡 중에선 쑥떡에 가장 눈길이 가고 맛도 좋다고 느낀다.

칼국수
검고 주름진 얼굴의, 여위고 몸집이 작고 키도 작은 아주머니가 밀가루를 반죽하고 방망이 굴려 반죽을 납작하게 만들고 그 담엔 기계가 무색한 정확도로 썰어서 납작하고 폭이 약간 있는 국수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집에 오면, 멸치 국물을 끓이고 간장에 파 썰어 넣은 양념을 준비하는 등 어머니의 수고를 더해 일품 칼국수가 되는 것이다. 아......!
그런데, 돌이켜보면 늘 나는 그분이 피곤에 절어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왜일까.

빵집
다른 빵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내가 가는 빵집은 늘 한 군데였다.
어두운 점포 안에 빵이 언제나 한가득. 나는 신기하게 둘러보곤 했다.
옥수수 식빵을 많이 먹었다. 건포도가 박힌 옥수수 식빵은 '굿'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고로케다. 지금도 '크로켓'이란 말이 입에 잘 안 붙는다. 고로케다.
이 빵집에서 파는 고로케는 속도 알차고 맛이 무척이나 좋았다. 핫도그보다 고로케가 더 좋아졌다. 정말 '열심히' 먹었다고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고로케보다는 덜 자주 먹은 냉동고로케도 있었다! 쇼핑가서 사와서는,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구워서(튀겨서?) 먹었다.
지금 서울에서 살면서 도무지 맘에 안 드는 것이 이 고로케다. 여러 빵집서 먹어 봤는데, 맛은 둘째치고 기름기가 너무 많다. 내 혀가 잘못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단코, 그 빵집의 고로케는 요즘 먹는 것들처럼 기름기가 많지 않았다. 어쩌면 빵집 주인 아줌마는 제빵업계의 숨은 실력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인은 자신을 숨긴다'더니.
아, 냉동고로케도 어릴 때 먹은 그놈이 정말 맛있었다. 완두콩 같은 것이 큼직하게 들어 있는 두꺼운 놈이다. 그놈과 비교하면 요즘의 냉동고로케라는 '얍실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꿩대신 닭이라고 그거라도 먹고는 있지만 매번 먹을 때마다 슬퍼질 정도로 옛날 그놈이 생각난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슬퍼진다.
(회사가 도투락인가 그랬을 것이다. 어느 날 망했고, 더이상 그 걸작 냉동고로케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근조.)
할란 엘리슨이라는 좋은 SF작가가 쓴 <다섯 살바기 제프티>
(정말이지 슬픔이 돋아나는, 기억에 남는 단편이다. 한국에는 고려원 <세계 SF 걸작선>에 수록되어 있다.)
에도 지나갓 옛것이 더 좋았다는 얘기를 주인공이 하고 있다.
 냉동고로케에 관한 한, <다섯 살바기 제프티>에서 읽은 그 얘기는 정확하다.

참기름집
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진행방향 왼쪽(즉 동쪽)으로 시장을 지나 다른 동네로 이어지는 길이 두어 개 있다. 큰 길 옆에 어두컴컴한 작은 길이 있다. 그 작은 길가엔 자주 가는 가게 둘이 있다. 참기름집과 분식집이다.
참기름집엘 가면, 방아인지 아님 뭐라고 불러야 될 지 모를 기계가 웅웅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누런 불빛이 비치는 그 어두운 곳에선 늘 고소한 냄새가 나고 있다. 갓 만든, 어쩔 수 없이 냄새가 솔솔 새어 나오는 참기름을 모양으로 봐선 - 짐작이 맞다면 상표를 깨끗이 뗀 - 소주병 모양의 옅은 푸른 빛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주는 것이다. 그 거무스름한 참기름의 색조를 보면 침을 꿀꺽 삼키곤 했다. 이 참기름은 이를테면 칼국수 간장 양념 같은 것들에 들어갔겠지.

지금은 이름이 기억 안 나는 분식집
참기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식집이 있었다. 만두며 우동 같은 것을 만들어 파는 점포였다.
근데 이 집을 기억하는 건 그 음식들보단 돈까스 때문이다.
처음부터는 아니었고 내가 그 집을 알게 되고 짧지 않은(그렇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 돈까스를 메뉴에 추가시키 것이다.
아마 그 돈까스가 내가 처음 먹은 돈까스였을 것이다. 분식점 수준의 간단한 경양식을 처음 접했다고나 할까.
아마 우리 가족 네 사람이 모두 우루루 몰려가서는 처음으로 돈까스라는 것을 먹었던 듯하다.
신기했다. 칼을 들고 포크에다......정녕 신기했다.
창칼로 식사를 하는 야만스런 양놈들...이라는 어머니의 우스갯소리는 거진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박혀 있다. 하하하.


아가씨
어머니는 실제 나이보다 젊어/어려 보이셨다. 날씬하기도 하셨고.
간혹 시장에서 어머니 등뒤로 리어카를 몰고 오는 아저씨들이 "아가씨, 좀 비켜 주세요."라며 어머니에게 길 양보를 청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와 나는 낄낄대며 기뻐하고, 우스워하곤 했던 것이다.



신평리 시장은 내 어린 시절 먹거리의 대부분을 사다 먹은 곳이며, 내가 참으로 자주(국민학교 저학년 땐 거의 매일) 가서 어머니의 장보기를 도운 곳이었다.
오후 - 돌아가면 가족들이 모이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기에 딱 맞는 타이밍(당연한 얘기겠지만 어머니의 타이밍은 '신기'였다.)에 언제나 어머니를 따라 갔던 그곳.

신평리시장에서 경험한, 그리고 그 경험을 가지고 상상할 수 있는 먹거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먹거리는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은 심리적으로 낯설다 - 맛이 있고 없고와는 별개로 말이다.
좋든 나쁘든(그러고 보니 나빴던 게 별로 없다.)
먹는 것에 대한 내 대부분의 기억들의 '원형질'은 그곳, 신평리시장에서 만들어졌고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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