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망성동 163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1동 한양아파트 11동 1107호

성 명 : 류 시 민

생년월일 : 1959년 7월 28일

죄 명 :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요 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 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성령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제 5 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 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하고 현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 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묻은 권력입니다. 현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라면 단 한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 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전경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울린 일은 중국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황정하·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폭력 자체가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위의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형구의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초생사건 때처럼) 이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겸 사회대학생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로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후 일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분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생법’ 위반으로 형사소추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법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반적인 편견이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온 고문을 흉내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손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꾸어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 - 학원내에 경찰을 수백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확원사찰을 계속 해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 - 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으로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 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루어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 1 항 중 “······임신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신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군 등 여러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신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신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 2 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형구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형구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 3 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용범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 4 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 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고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 학생 복교 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 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 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 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 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 학생 겸 구속 학생이 되었슬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폭력 과격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재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성명 류 시 민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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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 기해세

옛적퍼온글 2011. 12. 31. 09:13
< 어릴 적 정비석의 [손자병법]을 보다 이 시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춘추전국시대 배경의 소설에 당시가 나온다는 게 참 거시기;;;하지만 나에겐 고마운 일이다.
시 아래 해설은 인터넷 서핑 중 이 시를 찾아오면서 함께 긁어 온 것이다. 어디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남>




宅國江山入戰圖
生民何計樂樵蘇
憑君莫話封侯事
一將功成萬骨枯

기름진 강산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백성은 무엇으로 살림을 꾸려가랴
천자나 왕을 위해서라 말하지 말라
장수 하나 공을 세우는데 만 명이 죽어간다네

좀더 정확한 해설은
>나라가 전쟁에 빠져드니
>백성이 어찌 나무를 하고 풀 뜯는 것을 즐기랴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후를 봉하는 일을 말하지 말라
>한 장수가 공을 이루면 만 명의 뼈가 마른다

조송의 시 〈기해세(己亥歲)〉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기해는 황소의 난이 일어났던 기해년을 말한다. 황소가 난을 일으키고 양쯔강을 건너 북상했으나, 관군에 밀려 강동으로 달아났다. 이때 관군이 계속 추격을 하였으면, 난을 평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관군을 지휘하던 장군은, "소위 위정자들이란, 나라가 위급하면 병사를 사랑하고 상 주기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태평한 세월이 돌아오면, 병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죄까지 지운다. 그러므로 전쟁이 끝나지 않도록 적을 살려 두어야만 한다"고 하며 완전 섬멸을 피하였다. 이에 힘입어 황소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이듬해에는 장안을 함락시켰다. 3년 뒤 황소는 관군에 패해 자살을 하며, 당나라도 이 난으로 붕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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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1999년 6월호

홍세화의 파리통신 : 피자헛과 포스트모더니즘

파업과 시민정신

1999년 4월. 서울의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분루를 삼키며 농성장을 떠나는 서울 지하철 노동자들의 뒷모습은 3년 5개월 전에 전면 파업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고 환하게 웃던 프랑스의 지하철과 철도 노동자들의 밝은 모습과 서글픈 대조를 이루었다.

나는 여기서 두 나라 노동자들의 파업 양상을 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번 서울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에 관해 한 가지 사실을 짚으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즉, 이번 서울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은 '지하철 노동자들이 서울 시민의 발을 볼모로 했던 게 아니라, 거꾸로 지하철 노동자들이 서울 시민의 볼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지하철 노동자들이 서울 시민의 발을 볼모로 파업을 벌이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이 주장에는 제법 그럴듯한 '시민의 발'이라는 표현과 또 '볼모'라는 자못 자극적인 말까지 들어 있어서 대중 선동의 효과를 십분 발휘하였다. 일반 시민들은 이 주장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이 주장은 여론을 '파업 반대' 쪽으로 몰아가는 데에 큰 몫을 톡톡히 했다. 그러면 독자는 나와 함께 이 주장을 '해체'해 보기로 하자.

이 주장, 즉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하고 있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파업으로 불편을 겪게된 시민들의 비난의 아우성 소리가 파업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대신에 시와 정부 당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볼모라는 말이 성립된다. 시민들은 당연히 단체협약마저 일방적으로 파기한 서울시를 비난해야 마땅했고 또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하는 대신에 정리해고라는 신자유주의의 정책을 기조로 하고있는 정부 쪽에 비판의 화살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실제는 그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불평, 불만에 찬 시민들의 눈초리는 오직 파업 노동자들에게 되돌아가 꽂혔고 오직 그들에게만 비난을 쏟아 부었다. 그게 무슨 볼모인가? 인질자에게 직접 으르렁대고 폭력까지 가하는 볼모(피인질자)를 본 적 있는 사람 손들어 보시라. 그런 볼모는 이미 볼모가 아닌 것이다. 또한 인질자도 이미 인질자가 아닌 것이다. 제조업 분야처럼 노사 사이에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 부문의 파업과 이번 파업을 비교해보면 실제로 볼모가 되었던 측은 시민들이 아니라 파업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중간에 시민이 없었더라면 파업 노동자들은 도리어 더 자유로웠을 테니까 말이다.

시민의 발을 볼모로 했던 예는 파리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 때 그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은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스스로 파업 노동자들과 같은 노동자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사회정의의 실현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파업 노동자들과 연대하였다.

서울 지하철 노동자의 파업이 부분 파업이었던 것과 달리 완전 파업이었고-지하철, 시내버스, 기차가 단 한 대도 움직이지 않았다- 또 3주씩이나 계속되어 불편함의 정도도 몹시 심했지만 프랑스의 텔레비전 화면에서 "불편하지요. 하지만 나는 파업 노동자들을 100% 지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미소짓는 중년 여성을 볼 수 있었다. 파업 노동자들이 가두 시위를 벌일 때에는 연도의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즉,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스스로 볼모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대신에 노동자들의 복지 연금을 삭감하려했던 정부를 비난했다. 60%를 넘는 시민들이 파업을 지지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정부는 끝내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문제되었던 사안이 복지 연금 삭감이었던 반면에 서울 지하철 노동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정리해고 등의 사안이었음에도 3주간이나 전면 파업을 벌였던 프랑스의 노동자들과 달리 부분파업을 벌였을 뿐이다. 그랬는데 프랑스의 파업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성공했음에 반해 서울의 지하철 노동자들은 정부, 언론으로부터 매도당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들로부터 등돌림을 당했고 결국 파업은 실패했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의 시민들은 서로 연대하는 시민정신이라는 성숙된 근대 이념을 갖고 있음에 반해 한국의 시민들은 아직 그렇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한국의 포스트주의

독자들은 내가 이 글의 제목인 '피자헛과 포스트모더니즘'과 어쩌면 아주 동떨어진 한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노동자 파업 얘기를 서두에 꺼낸 것을 보고 좀 어리둥절했을 수도 있겠다. 나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연대할 줄 아는 '근대적 시민정신'을 하나의 예로 제시하면서 한국에서 지금도 끈질기게 불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행 바람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긴 포스트주의자들에겐 위의 파업의 예가 별로 적확한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근대적 시민정신'이나 '합리성의 확보'마저 '권력의 억압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해체'의 대상일 뿐이겠기 때문이다.

미리 고백하건대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내용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한국 땅에서 오랫동안 불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은 나를 주눅들게도 했다. 그런데,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내 나름대로 헤아려보니 10년 전쯤에는 알뛰세 바람이 한 동안 한국 땅을 휩쓸었다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체되었는데, 그러다가 4년 전쯤인가에는 아주 잠깐 동안 라깡 붐이 회오리바람처럼 일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이 한국 문화계를 강타하더니 IMF의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라깡 붐 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척 멍청했다. 프랑스하곤 아무 관련 없이 한국 땅에서 라깡 붐이 일었을 때 어리석은 나는 그 속내를 모르고 혼자 끙끙댔다. 그 붐의 성쇄가 미국에서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진 '심리분석'과 운명을 같이 했다는 것을 이제는 좀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뒤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체할 것이 아직 아무 것도 없어서인지 꽤 장수(?)를 하고 있다.

그 동안에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리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시즘' 등, '포스트'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들어간 글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고 책들도 꽤 많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영문학자까지 나서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구조주의'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으니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지금 한국에서 지식 깨나 있다는 사람 중에 문화 깨나 말하고 담론 깨나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니 '탈주'니 '전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나는 어느 영문학자의 '포스트……과 포스트……'라는 책제목을 대하고 꽤 당혹했는데 지금 와선 나름대로 짐작되는 구석이 없지 않다. 즉, 국내에서 가장 선구적으로 '포스트'를 수입한 사람들이 바로 일부 영문학, 영미철학 전공자들이었고 그 뒤를 일부 예술비평가(건축, 비디오아트, 영화, 연극 등)들이 뒤따랐던 것 같다. 그러다가 90년대 동구권의 몰락, 한국 학생운동의 위기와 때를 같이해서 일부 '진보'이론가들까지 합세하여 대량으로 포스트를 수입하면서 대열풍이 불게 되었고 서점가에 포스트 관련 책들이 판을 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 불어대니 이를 막기 위한 맞바람도 불어주어야 했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문학과 사회]에는 금년 봄호에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련된 글이 실려 있다. 심지어 [역사비평] 최근호(99년 봄호)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학의 종말인가?" 라는 실로 놀라운 제목의(역사학의 종말!) 논문도 실려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헤아릴 수 있게 해준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한국 땅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에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포스트주의도 한 몫 거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로 기이한 사실은 포스트 바람들의 진원지가 프랑스 땅이라는데 정작 프랑스에서는 그 바람을 도무지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뛰쎄와 라깡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접어두고라도,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푸코와 들뢰즈와 데리다를 말하고 있는데 푸코와 들뢰즈와 데리다의 나라인 프랑스 땅에서 나는 '뽀스뜨 모데르니슴(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아무리 철학적 담론하곤 거리가 멀다 손쳐도 분위기까지 모르고 지나칠 정도는 아니다. 더욱이 프랑스라는 땅은 토론을 좋아하고 논쟁을 좋아하기로는 한국 땅에 비할 바가 아닌 곳이다. 한국에서 포스트 담론이 그 정도라면 진원지인 프랑스 땅에서는 포스트의 대지진이 일어났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내 귀에는 '뽀스뜨 모데른느(포스트 모던)'나 '뽀스뜨 모데르니슴' 이라는 말조차 아주 생소한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프랑스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본토에서 공부하겠다고 청운의 꿈을 품고 프랑스에 날아왔던 어느 한국 유학생은 그 청운의 꿈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변변한 교과서도 없고 이를 다루는 강좌도 찾을 수 없었으며 전공하는 교수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유학생은 결국 전공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2년 전에 최종욱 교수가 월간 [사회평론 길]지를 통해 한국의 '포스트주의'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을 때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유학생도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를 일이다.

최종욱 교수는 포스트주의를 "포스트 모더니티,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히스토리, 그리고 포스트 마르크시즘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 추종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특히 그 내용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으면서도 마치 전문가연 하며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새로운 상품으로서 프랑스제 '사상'을 유행시킨 일부 한국 지식인들을 지칭하기 위해 '포스트주의자'란 개념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내가 위에서 포스트주의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종욱 교수의 말에 충분히 수긍을 했으면서도 나에게는 부족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해외에서 뭐가 하나 '떴다'하면 금방 한국에 직수입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프랑스 땅에 '뜨지도' 않은 것까지 국내에 수입하여 '띄운다'는 것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푸코와 들뢰즈가 있었고 데리다가 있지만 '포스트'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 예컨대 데리다는 '포스트'라는 말조차 사용하기 싫어한다. 이에 얽힌 하나의 삽화를 보자. 90년대 초 파리의 어느 강의실에서 볼 수 있었던 광경이다.

데리다의 강의는 보통 200∼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강당에서 이루어지는데 외부 청강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외부 학생의 대다수는 비행기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미국의 나이든 '학생'들이어서 이를 의식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데리다는 학기초마다 다음과 같은 말을 강의 서두에 꼭 붙이곤 했다. "내가 이번 학기에 강의할 내용은 나의 책에 이미 발표된 내용이므로 외부 청강생들은 굳이 내 강의를 들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매 학기마다 이 문제의 미국 '학생'들과 데리다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질문과 답변이 있다.

미국 '학생'의 질문- "당신의 이론이……, 포스트 어쩌구와 관련해서……?"
데리다의 답변- "나는 당신의 포스트 어쩌구와는 전혀 관계 없습니다."

데리다의 '해체(d construction)'라는 말은 포스트주의자들의 단골 용어이다. 한국의 일부 포스트주의자들도 해체를 무척 좋아하여 주체적 자아를 해체시키고, 맑스를 해체시키고, 노사관계를 해체시키고, 지배-피지배관계를 해체시키고, 역사를 해체시키고, 여성해방도 '섹스의 해방'으로 해체시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가 되었는데 정작 자크 데리다 본인은 파리의 강의실에서 "나는 포스트와 아무 상관없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지식인의 호소'에 서명하기도 했다. 포스트주의자들이 '해체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 데리다는 엉뚱하게도 구좌파와 행동을 같이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데리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음 글은 그가 97년 12월에 폴란드로부터 편지 형식으로 쓴 것 중에서 뽑은 것이다.

……(폴란드에서) 그리고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피해자들의 담론만이 성행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으로 수많은 지식인들이 마구 떠들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을 전체주의의 자유주의적인 정반대 명제로서 시장, 돈, 마약, 그리고 그 무엇이든지로 마구 뒤섞고 있다. 그야말로 무엇이든지 이다. (La Contre-All e, Collection Voyager Avec……1999. 233쪽)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 한국 땅에서만 부는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포스트주의자들은 수긍하고 싶지 않겠지만 데리다는 오늘날의 세계 현실을 '열 가지 재앙'으로 표현하고 있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포스트 인터내셔널'일까? 데리다가 꼽는 '열 가지 재앙'이란 실업, 피난처 없는 시민들의 대량적 배제, 무자비한 경제전쟁, 이 전쟁의 모순을 제어할 수 없는 무능력(보호주의와 국경 개방 사이의 모순), 대외 채무의 악화, 무기 매매, 핵무기의 확산, 종족간의 전쟁, 마피아와 마약조직 등 유령국가의 전횡, 법 앞에서 국가간 불평등(국제법이 몇 나라에 의해 크게 지배당함) 등이다(위의 책, 98쪽).

그의 현실세계 인식은 포스트주의자들이 케케묵은 구좌파라고 비판하며 해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세계 인식과 너무나 닮은 것이 아닌가. 라깡 붐 때까지만 해도 멍청했던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한국의 포스트주의자들의 '해체'와 데리다의 '해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닐까? 또 이런 간극이 생긴 까닭은 한국에서 읽는 데리다가 프랑스제 데리다가 아니라 미국제 데리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아직 살아있는 데리다가 그렇다면 푸코와 들뢰즈는 더욱 미국제 푸코와 미국제 들뢰즈가 아니겠는가? 등…….


피자헛은 미국제인가, 이탈리아제인가?

이제 쉬운 화제로 돌려 피자헛 얘기를 하자. 파리 시내 오페라좌 옆으로 '이탈리아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대로(le Boulevard des Italiens)가 뚫려 있다. '오페라'라면 역시 롯시니, 베르디, 풋치니 등의 이탈리아사람들이 유명하기 때문에 오페라 옆길의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길에도 피자헛 가게가 생겨 성업 중에 있다. 나도 두어 번 이용한 적이 있는데 그 집에 들어가길 꺼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이탈리아사람들이다. 미식가라면 이탈리아 사람들도 프랑스 사람들에 비해 별로 뒤떨어지지 않아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피자에 대한 자부심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그들은 피자헛 피자를 단연코 먹지 않는다.

한 번 권해 볼라치면, "마마미아!(맙소사!) 그것은 피자가 아니야!"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팔을 휘젓는 제스처까지 쓸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대로 이외에도 파리 시내에는 미국제 패스트푸드인 피자헛 가게가 여러 곳에 생겨났고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이민온 사람들이 경영하는 이탈리아제 피자 가게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탈리아인들의 미국제 피자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을 잘 알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은 피자헛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차마 '이탈리아 음식'을 먹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국인에게 자장면을 권하면서 당신네 나라 음식이라고 말해보라. 그 중국인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장면이란 음식은 중국에 먼 인척관계를 두고 있는 한국제 음식이다. 이곳 파리에서 자장면을 맛보려면 중국식당이 아니라 우리 한국식당에 가야되고 돈까스, 오므라이스 같은 '경양식'을 먹으려면 일본 분식집에 가야 된다.

60, 70년대에 '황야의 무법자' 혹은 '돌아온 쟝고' 같은 이탈리아제 서부영화가 붐을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에 사람들이 미국 영화로 깜박 속기도 했던 것은 그 이탈리아 영화들이 심지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같은 미국 배우까지 주인공으로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들은 존 웨인이나 게리 쿠퍼, 록 허드슨 등이 등장하는 정통 할리우드 서부영화와 비교해 보면 다른 점을 발견해낼 수 있다. 일례로 마카로니 웨스턴에서는 '총알받이' 역할로 북미인디언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주로 멕시코인들이 나온다. 배경도 주로 멕시코이거나 멕시코 접경이다. 이탈리아에서 인디언 엑스트라를 구하기가 몹시 어려운 반면에 멕시코인 엑스트라는 쉽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국민인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이 숯검정만 약간 바르고 수염 깎지 않고 판초모자만 쓰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국적불명'으로 분류되는 상품들에 대해서 국적을 붙여주기로 하자. 피자헛 피자는 이탈리아식의 미국 제품, 자장면은 중국식의 국산품, 경양식은 일제이며 마카로니 웨스턴은 이탈리아식 서부영화가 아니라 미국식 이탈리아제 영화이다. ( '미국식'이란 말도 좀 이상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메리카를 배경으로 꾸민 이탈리아식 이탈리아 영화이다.)

크리스티앙디오르, 입셍로랑, 루이뷔똥, 샤넬 등의 상표가 새겨진 프랑스 제품들은 전세계 부자들(특히 미국, 일본 그리고 한국 부자들)이 즐겨 찾는 사치품이다. 프랑스 제품이 아니더라도 프랑스라는 나라가 주는 귀족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프랑스말로 이름지어진 화장품, 향수들도 즐비하다. 한국의 어느 화장품 제조회사는 'MADE IN FRANCE'라는 딱지 하나를 붙이기 위해 일부러 프랑스에 '제조공장'을 세우고 한국에서 가져온 원료로 '프랑스제'를 만들어 한국에 역수출하고 있다.

프랑스 상표가 일부 부유층의 사치품으로 애용되고 프랑스식 이름이 일부 여성들의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듯이 프랑스 향기를 술술 풍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이 일부 '진보'지식인들의 지식 사치품(미국에서는 이를 'french radical chic' 이라고 한단다)으로 애용되고 있는 듯한데, 이 국적불명의 지식상품인 '포스트모더니즘'의 국적도 찾아주기로 하자.

나는 푸코, 들뢰즈,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의 글이 어떤 연유로 미국의 수입상들에 의해 대서양을 건너가 딜러들의 손을 거쳐 미국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염색, 재단되어 '포스트 머시기'로 포장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속내 까진 알 수 없고 알지 못한다. 다만 이곳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미국의 60년대 반전 세대의 일부가 미국의 영문과를 비롯한 인문대로 흘러 들어와 은둔하면서(이들을 미국에서는 '캠퍼스 래디컬'이라고 칭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이것저것 들여와 '포스트'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80, 90년대에 미국의 문화저널리즘과 연계되면서 급속한 붐이 되어 전세계적인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유행 바람은 건축계에도 뻗쳐 예컨대, 파리 제8건축대학 교수이며 건축가인 칠레 출신 씨리아니도 미국의 포스트 제조바람의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포스트모던 건축가가 되었다. 문제는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제작된 '포스트'가 전세계적인 배급망을 통해 배포됨으로써 다른 나라들에 미치는 지적 황폐함이다. 우리의 고유 음식인 김치의 예를 들어보자. 만일 미국의 어느 수입상이 김치를 수입해 가면서 미국인의 구미에 맞게 마늘과 고춧가루는 슬쩍 빼고 케첩과 머스터드를 듬뿍 집어넣은 김치를 만들어서 기막힌 상술과 엄청난 자본력으로 미국에서 히트를 치고 전세계적으로 대유행을 일으켰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 김치의 이름을 "홍가네 김치( Hong's KIMCHI)"라고 하자.

이 미국제 '홍가네 김치'가 한국에 역수입되어 토종 김치들을 몰아내고 우리들의 입맛을 미국식으로 획일화한다고 상상해 보자. 황당하고 끔찍하지 않은가? 하기야 어떤 사람들은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하는 사람들, 영화 수입쿼터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세계화의 조류'에 편승하여 오히려 초등학교 급식부터 미국제 김치를 먹여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미국적인 식성으로 길들여야 한다고 주장할는지도 모르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프랑스에 역수입되었을 때의 일부 지각 있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반응은 '홍가네 김치'가 한국에 역수입되었을 상황을 상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과 다른 것은 프랑스의 높은 문화적 관세장벽 때문인지 프랑스에서는 '포스트' 유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학가의 서점에서 '포스트...'란 제목의 책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석진 곳에서 발견되는 몇 권의 책들은 미국에서 역수입된 것이거나 미국의 틈새 시장을 겨냥한 일부 발빠른 프랑스 저자들의 것이다.


부르디외의 충고

이제 부르디외의 말로 이 투박한 글의 결말을 맺기로 하자. 부르디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창궐을 경계하면서 이를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포스트'라는 말뿐만 아니라 '탈 현대성', '탈 근대성'등의 말이 제목에 들어있는 책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경고한다. 요즈음에 와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신선도가 떨어졌는지 조금은 시들해진 것 같은데, 부르디외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파생 상품인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는 영국제 '잡종'이 「루틀리지(Routledge)」출판사의 기발한 판촉 전략에 힘입어 또 프랑스 향기를 날리며 전세계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푸코는 죽어서 말을 못하지만 부르디외는 살아서 자신의 글이 영·미의 '문화연구가'들에 의해 가공, 절단되어 말랑말랑하고 엉뚱한 주제에 관한 심심풀이 땅콩용으로 애용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몇 마디 소리를 질러보지만 앵글로색슨들은 물론 아랑곳하지 않는다.

겨울철, 수은주가 떨어지는 밤이 오면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은 대형 강의실의 책상을 치우고 매트리스와 따끈한 음료로 시내의 무숙자들을 맞이한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을 배출하는 파리고등사범학교는 실업자들의 점거·농성장이 되기도 하는데 이곳의 교수와 학생들이 실업자운동을 고무하기 때문이다. 또한 들뢰즈, 가타리, 플란챠스, 네그리가 강의했던 파리 8대학은 쌩드니의 공단지역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데 가난한 지역 주민들에게 대학 도서실을 개방하고 있다. 이와 같은 파리의 대학들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러 프랑스행을 꿈꾸는 한국의 예비 유학생에게 부르
디외는 다음과 같은 미국의 한 대학을 권해줄 것이다.

"부유한 은퇴 장년 층의 해수욕 휴양지를 끼고 있으며 공장의 굴뚝은 그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는 울창한 언덕 숲 속에 그림같이 포진한, 인터넷으로 연결된 각 단과대학의 군도로 이루어진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분교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의 메카 중의 한 곳인데, 이런 곳에 처박혀서 자본주의는 '그들의 씨니피에로부터 탈구된 씨니피앙의 흐름'속에 융해되며, 세상은 '사이보그' 및 '사이버 조직'으로 구성되며, 결국 우리는 '정보의 지배'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노동과 착취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의사소통사회의 패러다이스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일 아니겠이는가?"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부르디외 「파스칼적 명상」(M ditations pascaliennes, seuil, Paris, 1998, 52쪽).

이런 미국의 대학들을 견학하기 위해 한국의 여행업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환상 여행'이라는 여행 상품을 개발하면 어떨까?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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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3일 우리모두/ 동호회 / 여성방>


여름만 되면 TV에서 납량특집극처럼 이런저런 소재와 함께 빙의(귀신들린사람)인 사람들도 종종보여준다. 일단 빙의는 과학적으로 설명안되는 부분도 있고 심리적인 부분도 있는것 같다. 과학적으로 설명안되는 몇%와 거의 대부분은 심리적요인이라던데..
재미있는건 여성빙의 환자중 자신이 과거에 낙태한 태아의 혼이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
혹은 현재장성한 자신 아들의 몸속에 죽은 태아의 혼이 들어와 있는경우도 있었고.

둘다 어렸을때다. 임신몇주라는데 수술비 없다고 좀 꿔달란다 그리고 같이 병원에 가잔다.
그자식한테도 책임있으니 병원비 대신 내달라고 해보지 그랬니 했더니 우울해서 만난거지 좋아해서 만난거 아니니 됬단다. 그리고 앞으로 볼일도 없단다 쩝..
수술은 정말 몇분정도..? 나머지 몇시간은 오직 마취에서 회복하는 시간이였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간호사가 환자옆에서 토하면 이물질좀 받아주고 옆에 있으라고 해 회복실에 들어가보니 친구가 한번토한뒤 녹초가 되어 눈을감고 있다.
그옆에서 땀을 닦아주며 워크맨을 킨뒤 음악을 듣고 있는데
어떤 젊은여자가 저쯤 누워있다. 한참후에 보니 웬젊은남자가 회복실에 얼굴이 벌개져서 나와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애인을 부축해 데려가려 한다. 여잔 옷을 입으며 계속 운다.

웬젊은아즘마 한명이 익숙한 걸음으로 회복실로 들어온다. 간호사 앙칼진목소리로 "아즘마 여기말고 수술실로 와야져!" 한다. 워크맨으로 음악한곡 채 다 들었을까? 진짜 순식간에 수술마치고 마취에 취해있는 아즘마 간호사들 회복실 침상으로 기냥 굴려버린다(진짜 패대기를 치더군-.-)
신음소리가 참..그러더니 비척비척 일어나 온사방에 쿵쿵 부딪치며 회복실 화장실로가 뻗어버린다.
침상으로 끌어내면 비명을 지르며 앓는소리를 하고 간호사들가면 다시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가 조용하고 순간적으로 난 무슨 착란증세인줄 알았다.
그냥 난 가만히 보고있었다.친구도 눈게슴치레 뜨고 그 아즘마 본다.
간호사 나타나더니 "아우 이아즘마는 한두번 수술한것도 아님서 왜 맨날 이래!증말 귀차나 죽겠네!"
혼자 왓나 싶었는데
간호사가 불렀는지 남편인지 남편비스무리 한 시커먼 남자하나가 들어온다. 어 쥔공이 너구나 하는눈빛으로 눈똥그랗게 뜨고 관찰하는 내 눈길을 슬슬피하며..
그제저야 간호사들 말로는 낙태경험이 많은듯한 그 아즘마도 훌쩍훌쩍 울며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언제 수술했는지 한 40대로 보이는 아즘마 하나 또 회복실 침상에 패대기를 치고간다 조폭간호사들이-.-
그때쯤 친구는 마취에서 완전히 회복해 우린 그 음침한 산부인과를 빠져나왔다.

"야 우리 뭐 몸보신 할만한거 먹으러 가자. 애 하나 낳는것처럼 몸 축난다더라"
언젠가 <노랑머리>보았더니 이재은이 낙태수술하고 나오니 병원앞에서 친구뇬이 이런대사를 치던데
그영화 보고 헉 저거 내가 옛날에 했던 대사쟈너-.-;
우린 길을 걸으며
"..아까 그 아즘마 진짜 우끼지 않았니?"
"..응 우끼더라"

어떤여자가 자신은 임신하고 나서 비로서 오르가즘이 무언가를 알았다고 하는 고백을 듣고 참..
그전엔 임신공포로 남편과의 섹스에 제대로 몰입할수가 없었단다.
내주위에 웬만한 친구들 한번쯤 낙태경험이 있는거 보고 참 어쩜 저리 무지할수가 싶기도 하고(들어보면 성지식에 무지한경우가 많다)보통 설마..가 사람잡은 케이스이고.
여자건 남자건 낙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거다. 설마 임신하겠써..? 근데 여자는 상황이 닥치면 쉽지않다는걸 자기몸으로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는것이고 남자는? 근가보다 하지뭐..

왜 십대미혼모들이 많은지 알만하다. 의료보험이 안되니 수술비가 비싼데
그거 구하려고 차일피일 미루다(그럴수록 수술은 더 위험해지니 비싸지고)
시기를 놓쳐 아이를 결국 낳고 마는것.
사실 낙태의 횟수는 이십대나 삼십대여성이니 더 많지.
어디서 들으니 세계적으로 울나라 해외입양시스템이 가장완벽하다나?
주문하는아이를(?) 오차없이 완벽하게 제공해준단다-.-

완벽한 피임제품은 아직없다. 모두 오차를 가지고 있고 부작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모든게 다 여성몸에 가해지는 부작용이고 낙태또한 그런것 아닌가?
아아참!
예전에 룸싸롱엘 나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애말로는
그쪽아가씨들 낙태가 허다하단다.
"나도 한번 애 떼본적 있는데..그거 사람으로써 할짓이 정말못되..그 이후로 조심하곤 있지만..손님이 피임기구 없이 요구할땐 증말난감해..자긴 콘돔하면 감이 없다나? 신발~시키!"

남자들의 성이 이처럼 단순해 내가 옛날부터 남자들 보길 단순한 동물로 우습게 봤더랬지만
이젠 파트너의 몸의 구조도 이해해가며 살자꾸나.
그녀들은 당신들처럼 몸이 단순하지 않다네~
첫생리를 시작한 14살부터 지금까지 매달 임신할 준비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히 수행하는 내몸의 변화를 보면 아 정말..
니들이 임신의 공포를 아러~!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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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6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0422 우리모두 /햇살 가득한 카페, 졸라맨 님

인간관계 관련 글중 90% 이상이 상당히 추상적으로 쓰여졌는데, 좀 화가 나네요.

사랑하라, 양보하라... 이런게 쉽다면 다 성인되게? ㅡㅡ;


실질적인 기술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기쁜 일은 몰라도 슬픈 일은 죽어도 가라.

사람을 만나다 보면 약속이 겹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약속이야 어느 약속이 중요하지 않겠냐마는 정말 불가피하게 선택을 할 상황이면
반드시 슬픈 일을 우선으로 가십시요. 사람이란게 힘들때 마음이 약해지고 예민해집니다.
쉽게말해 결혼식에 찾아온 사람은 손님중 한명으로 보이지만
장례식이나 삼일장에 찾아온 사람은 가족과 맞먹는 강한 유대감을 느낍니다.
그렇게 인식되고 나면 나중에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일사천리가 되죠.
또 하나 덧붙이자면 사람 특성상 노는 걸 좋아하지 같이 울어주고 위로해주는 걸 좋아할 사람 없습니다. 당연히 하객들 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悲事에는 한명 한명이 귀한 손님이 되는 것입니다.

2. 인사는 받는 사람이 인식하고 답례를 할 때 인사다.

지하철이나 버스, 인사 참 많이 하죠. 그렇지만 일찍이 이 조건에 인사를 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인사가 아니라는 뜻이죠. 버스기사님들도 분명 처음에는 인사하면서 근무하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100이면 100 무시, 또는 목례죠. 분명 말씀드리지만 목례는 인사가 아닙니다. 절대로 받는 사람이 인사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불쌍한 직업이 저는 톨게이트 직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몇천번씩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무시받고 말이죠. 참 상투적일지도 모르지만 인사는 대인관계의 기본입니다. 상사나 선배, 후배들을 대할때 항상 상대가 인사라고 느끼도록 인사하세요. 대인관계 반드시 달라집니다.

3. 약속은 제대로 잡는다.

"우리 언제 시간나면 만나요."
우리가 늘상 주고받는 말이죠. 이 말처럼 상투적이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말이 없죠.
만남은 대인관계의 출발이죠. 누구나 상대방의 본심을 알기 힘들기 때문에 만날 약속을 먼저 제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상대가 말을 건넨다면 바로 대쉬하세요(작업이랑 다릅니다.) 상대가 "언제 시간나면 만나자"라는 말을 하는 순간 정확한 약속을 잡아야 합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대화가 유도되도록 준비를 하는것은 기본입니다.
"솔직히 저도 또한번 뵙고 싶은데, 이럴게 아니라 지금 구체적으로 정해보는게 어떨까요. 제가 최근에 ~~한테 ~~가 그렇게 좋다고 들었는데~~~"
만나자는 말을 했다면 어느정도 나에 대해서 나쁘게는 생각 안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특히 쌍방을 호칭하는 언어(우리,둘이서,대학동기로서,직장친구로서,등등)는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놓쳐서는 안되요. 명심!

다만 조심할게 있는데 처음 대면시 상대가 이런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시간이 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이럴 경우 유형은 보통사람과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 두가지입니다.이 사람의 내면을 읽어드린다면

보통사람 : 솔직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또 만나고 싶지는 않다. 별볼일 없는 것 같다.
철저한 사람 : 또 만나고 싶기는 한데, 앞으로 며칠동안은 시간이 도저히 안나니까 시간이 생기면 반드시 연락해야겠다.

4. 틈만 나면 끊임없이 남의 장점을 부각시켜라.

여기서 남이란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 제 3자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직접적 칭찬을 하는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고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랑담을 늘어놓으세요. 물론 자연스럽게. 그리고 만남을 주선합니다. 모임도 확대시키고 말이죠. 예를 들어 A랑 따로만나고 B랑 따로만났다면 A와B를 소개시켜 다음부터는 AB를 같이 만나는 거죠. 그것이 누적되다보면 자신이 알고 있는 인맥간에 서로 연결이 되어서 상당히 인간관계가 견고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중개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게됩니다. (변호사랑 검사가 신나게 싸워도 결정은 판사가 내리죠.) 더 나아가서 자신도 그 경로를 거쳐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게 생기게 됩니다.

5. 많이 듣고 말을 아끼되 말할 때는 주로 물어봐라.

특히 처음 대면하는 사람한테는 절대 말 많이 하면 안됩니다. 대화의 주도권은 항상 상대에게 넘기세요. 자기 주장,이의제기, 농담, 욕섞어서 대화하는 방법은 친해진 다음에 먹히는 대화법입니다.(이것도 사람마다 다른 건 아시죠?)
많이 물어보세요. 대화에서 기본은 상대가 입을 열게 만들어야 합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해선 안됩니다. 가볍게 말할 수 있는 말들은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나요? 여기 찾으시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는지?'등이 있겠죠. 혹시 나중에 시간나면 쓸까 생각중이긴 합니다만 간단한 맨트는 여러분이 더 잘 하시겠죠?
질문의 기본 마인드는 상대를 배려하면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여야 합니다.
위의 질문에서 상대의 교통이용 취향(나중에 약속잡을 때 중요), 길찾는 능력(이것두), 어조, 사람을 만나는 마음가짐등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수없이 많이 나오죠.
그리고 사람이란게 반드시 자기의 관심분야로 대화를 하게 마련입니다. 상대가 관심있어하는
분야로 조심스럽게 대화를 전개해 나가세요. 그러기 위해서 평소에 다방면에 걸쳐 잡독해두는 것은 필수겠죠?

솔직히 말해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스포츠,연예,연애,친구에 대해 말하길 좋아합니다.
혹시 상대가 전문직 종사자라면 그 분야에 대해 사전 연구해 두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게 거창한게 아니라 최근 잡지나(꽃꽂이,애완견,요리등..) 학술지(의학,과학,수학등..)등을 통해 화제거리가 뭔지 알고, 물어볼 수 있는 입장만 되도 충분합니다.

여기서 맺을께요.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간관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썼습니다.
좋은 사람 많이 사귀세요~
감사합니다.

LsTAcE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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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16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서양의 민족국가는 주로 근대의 산물이며, 국가의 이념은 근대적 갈등의 산물인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였다. 흔히 말하는 [좌우의 이념갈등]이란 과도하게 단순화된 표현이며,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정치적 민주화와 전체화, 자본의 사유화와 사회화 사이의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의 합리적 조절과 교정 과정이다. 그래서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균형과 절충은 각기 그 역사적 궤적이 다르다.

좌우의 이념갈등, 혹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 등의 도식적인 선전문은 일종의 전략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단순화되고 극단화된 모형은 선명한 메시지를 통해 대중동원이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빛의 천사들과 악룡들은 아마겟돈의 전투를 벌인다. 권력투쟁은 현대세계에서도 종말론적 신화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집단자살교도의 광신적 종교가 아닌 한, 권력을 잡은 뒤에 집권층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하며, 사회적 피해와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필수적인 전진을 하기 위해 택해야할 합리적인 방안들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그 한 두 개의 대안을 놓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 소위 정쟁이다. 대개는 조금 빨리, 혹은 조금 늦게 [2% 더와 덜]을 놓고 최후의 결사항전을 하는 준비하는 비장한 드라마가 모든시대 모든 나라의 정치현상이다.

선거철마다 제의적으로 순환되는 종말론적 투쟁은 전통적 신앙이 붕괴된 근대 무신론 사회의 집단 정신병이 영웅정치의 신화로 투사된 모습이다. 따라서 근대 언론의 권력비판은 신화적 대중동원에 대한 탈신화론적 감시와 비판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영웅신화적 최면과 세뇌에 의한 대중동원은 필연적으로 극우와 극좌의 전체주의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영웅의 신화를 현실화하려 하며, 영웅의 혈로에서 대중은 짓밟히는 개미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권력의 신화를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웅 신화를 창출하고 보급한다. 이들은 예언자 전승이 아니라 왕정신학자의 전승을 물려받았다. 이들은 권력을 감시하고 민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창출하고 민중을 동원하는 기능을 본업으로 한다. 사회가 민주화, 자치화되어 가는 전환기에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언론이 새로운 권력창출의 거점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언론의 제자리찾기]를 촉구하는 시민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언론을 비판/감시하는 시민운동조차도 권력창출의 새로운 거점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새로운 비판운동이 등장할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러한 갈등의 핵분열은 악순환이며, 아래로부터 통합되는 민주화가 아니라 오히려 분열되고 절단된 전체주의의 다양화다. 통합되지 않는 전체주의적 분파들은 사회를 해체시킨다. 가정에서 가족관계가 분열되고 절단되면 가정이 해체되는 것과 같다. 지성과 양심에 근거한 최소의 필수적인 공감대는 사회적으로 보존되고 건전하게 육성되어야 한다. 사회윤리란 기본적으로 각자의 인간미의 문제이다.

그러나 악순환에 대한 해법은 오히려 단순하다. 정치권의 권력투쟁에서 종말론적 선악투쟁의 신화를 벗기면 된다. 언론이 탈신화론적인 권력감시와 권력비판을 하면 된다. 언론을 비판하는 시민운동이 불필요하게 되면 된다. 민주주의 헌법정신에 따라 정치권은 사회적 갈등을 민주적으로 통합하면 되고, 언론은 권력의 오남용을 감시하고 탈신화화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서 정치와 언론이 각기 제자리를 찾으면 된다. 그렇게 되면 시민들은 제각기 관심과 흥미의 공동체에서 사회를 위한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민주주의 대중문화운동이다.

빛의 천사와 악마의 자식들이 대단원의 격전을 벌이는 아마겟돈의 전투는 신화에 불과하다. 신화가 민중의 열정을 동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의식적 열망에 대해 원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점괘와 같은 것이다. 한편 정책결정은 전혀 다른 수준의 것이다. [조금 빨리, 혹은 조금 늦게, 2% 더 혹은 2% 덜]을 놓고 정책토론할 때 분개심과 적대감을 동원해서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비정상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초연해야 한다. 언론비판운동에서 필요한 것은 영웅신화의 집단적 열기로부터 면역된 초연한 평정심이다. 민주주의 대중문화를 창출하는 시민운동의 첫단추는 전염성 영웅신화로부터 초탈한 평정한 마음들의 연대다.

초연한 태도는 오히려 보편적인 인간미를 배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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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7 우리모두

지난 4년간 국민적 수준에서 인터넷 토론이 활성화되었다. 민주화의 오랜 염원이었던 '의사표현의 자유'가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한 사회쟁점의 다각적 접근에도 발전이 있었다. 민주적인 대화토론의 바람직한 수준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대다수가 언론을 교시적으로 수용하던 때를 돌이켜보면 실로 주체적인 사고와 표현의 환골탈태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도가 한 척 자라나면 마는 삼 장이 늘어난다는 말이 있다.

공동체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는 국민통합의 문제는 1)공동의 체험을 지향하는 체험의 민감성, 즉 약자에 대한 역지사지의 공감대와 문제해결의 현장에서 당면하는 난관들에 대한 공동의 민감성을 전제하며, 2)복잡한 사태의 요소들을 질서있게 파악하는 지성적 통찰과 신선한 문제해결방식을 조망하는 지성적 창의력, 3)이용가능한 자원과 기술의 한계 안에서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를 우선시하여 문제해결의 가닥을 잡는 판단의 균형감각과 차분한 인내심, 4)민주적인 설득과 결정을 통해 공동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행동력을 전제한다.

공감대와 민감성, 통찰력과 창의성, 판단력과 가치순위, 설득력과 행동력이 두루 원만한 균형을 이루어야만 최선의 사회적 통합이 달성된다는 원리는 그 어느 공동체에도 예외가 없다. 더구나 민주사회는 이러한 인간적 능력들이 어느 한 영웅적 지도자에게만 은총(카리스마)적으로 구비되어 있어서, 그 지도자의 결정을 자동적으로 추종하는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사회적 통합과정 안에 자기의 공감대와 민감성, 자기의 통찰력과 창의성, 자기의 판단력과 가치관, 자기의 설득력과 행동력을 투입해야만 한다는 점에 있어 고도의 인내심과 관용력, 열린 마음과 선의를 요청한다.

간단히 말해서, 민주사회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선의의 경쟁의 문제이다. 이제 경쟁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현상에는 두 가지 매우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 이른바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승리주의'와 승자는 없이 공익이 승리하는 '사안별 경쟁'이다.

승리주의는 처음부터 자기편의 승리를 지향하며 이용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승리주의에서 최선의 귀결은 경제적으로 '독점'이라고 부르고 정치적으로 '독재'라고 부르는 권력독점 현실의 창출이다. 승리주의의 추진자들은 영웅적 독재자, 이데올로기, 탈법적 기득권, 교조적 계급투쟁, 자동적 지역감정, 집단적 이기주의 등 모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집단이다. 이들은 사회적인 수준에서 종교적 선민의식을 천명하며 그러한 선험적 귀족주의에 합당한 물리적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 세습하려고 노력한다. 승리주의의 분파들이 충돌할 때 세력경쟁이 발생하고, 세력은 세력을 압도하여 탄압한다.

한편 사안별 경쟁은 자기편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구체적인 때와 장소에 따라 사안별로 발생하며, 문제와 연관된 거시구조는 역사의 고유한 문맥 안에서 이제는 공익적 기능을 상실한 구태의연한 제도들에 국한된다. 따라서 사회개혁에도 사안별로 큰 수술이 있고 작은 수술이 있다. 세계체제가 문제라면, 세계체제의 변혁은 내부적으로 민주화된 각 국가들이 자국이기주의를 벗어나 국제적 세력균형의 틀을 깨고 민주적인 자기교정력을 세계적인 수준에서 획득할 때에야 달성된다. 그 중간과정은 유럽/동아시아/중앙아시아/미대륙 수준의 거대 지역단위 민주적인 결합이며, 이러한 지역공동체의 결합은 아직도 모색단계에 있다.

사안별 경쟁은 수시로 가치에 따라 헤쳐 모이는 가치공동체들의 경쟁이다. 19세기 이념정당이란 식민지 제국주의 수준에서 국내통합을 위해 조성된 과점적인 민주화의 소산이다. 이념이란 19세기의 사회수준에서 자유, 평등, 이익 등에서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하여 그 단일 가치를 최상위에 놓고 그에 따라 연역된 한 꾸러미의 정책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그것은 19세기 논리주의의 결실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극우민족주의 등은 밀의 논리학과 헤겔의 논리학을 당시의 사회에 적용한 변증적 연역의 결실이다.

19세기 서구사회에서 왕정독재와 귀족독재를 겨냥한 과점적 민주화는 진보였지만, 오늘날 과점적 세력균형은 민주적인 사안별 경쟁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왕정독재는 귀족과점의 도전을 받았고, 귀족과점은 유산층 신흥자본가의 도전을 받았고, 유산층 신흥자본가의 과점은 무산노동자층의 도전을 받았다. 20세기 내내 이러한 이념정당의 양당제적 과점의 틀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념정당은 이미 구태의연한 제도일 뿐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이념 꾸러미만을 선택해야만 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사안별로 그때마다 독자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중층적인 지역감정의 과점정당이다. 한국의 양당이 중층적인 이유는 지역감정이라는 자동성의 큰 틀 안에 나름대로 이념지향성, 정책지향성, 사안별로 개혁적인 판단들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이념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지역감정을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한다. 우리시대의 지역감정은 지역의 이익이나 지역의 고유문화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구획한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서구이념을 대체하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전통적인 역사관이다.

중국의 존왕양이 중화사상이 존재한다. 일본의 천황중심 신국사상이 존재한다. 한국의 신라중심 사대주의가 존재한다. 서구의 민족은 근대 200년의 산물이지만, 동아시아의 민족은 3000년 이상의 갈등의 산물이다. 그것은 근대적 개념의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 혈통과 문화에 기반한 1300년 이상의 실체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에서 근대 자본주의는 100년 미만의 역사를 지닐 뿐이다.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쥐잡는 고양이에 불과하다. 서구이념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패권주의, 전체주의의 근대적 도구에 불과하다.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주변국을 한족 내의 소수민족으로 보는 중국의 중화패권주의, 국민을 신민으로 보는 일본의 천황제 자본주의, 그리고 한국에 고유한 무속적 연대성에 기반한 지방자치 민주주의 모델들이 등장하고 있다. 각 모델들은 현재 국내적으로는 각자의 전통적인 역사관과 충돌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는 그 일반성과 통합성에 있어 경쟁하고 있다. 이 중에서 아직은 태동단계에 있는 한국의 민주적 모델이 동아시아의 공익을 위한 보편적 모델로서의 잠재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세력과 흡수력으로 따지면 고구려를 지방정권으로 흡수하는 중화패권주의를 감당할 수는 없다. 따라서 차후의 전개상은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민주주의의 사안별 경쟁이란 정당도 없고, 정파도 없다. 광신도도 없고 ~빠도 없다. 국회의원들은 정책 사안별로 지성과 양식에 따라 판단하고 정책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현대의 정치개혁이다. 국회의 다수당을 따지는 사고방식은 의원들이 거수기 투표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의원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신념에 따라 결정한다면 다수당과 소수당의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정당의 지역성 구별도 무의미해진다. 국민의 공익을 위한 헌법기관으로서 국회의원 개개인이 국민 앞에 책임지는 것이 옳다.

사안별 경쟁이란 시민들이 사안별로 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들이 이념에 묶여있을 이유가 없다. 그때마다 공익이 발생하게 하는 것이 시민들의 의무이며 공익의 발생은 사안별 개혁과 그때마다의 독창적인 창의성에 달려있다. 시민들이 이념으로 서로 갈려 욕하고 싸울 이유가 없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담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연역적인 정책 꾸러미로 싸우지 않는다. 언제나 그때마다 제한된 공적자원 안에서 사안별로 2%와 4% 사이의 배분을 놓고 판단력과 설득력을 경쟁할 뿐이다. 서로 감정 상할 이유가 없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의원들은 대부분 지역으로 갈려져 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갈려져 있지 않고, 유사한 이념을 추구하면서도 소속이 다른 의원들도 많다. 이들은 어떤 경로를 밟아갔는가? 서로 싸우고 개인적으로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을 뿐이다. 서로 이념을 내세우지만, 원인은 이념이 아니라 감정싸움이다. 감정에 따라 패가 갈렸을 뿐, 사안별 판단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감정으로 패가 갈리고 세력경쟁을 위해 거수기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국정치는 공전한 지 이미 수십 년이 된다. 그 분열의 단초는 자존심 대결이었다.

시민들은 공익을 위한 사안별 경쟁을 하도록 정치권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 어느 한 패거리를 지지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다. 정당 안에도 사안별 경쟁을 하는 정치인이 있고, 거수기 노릇을 하는 정치인이 있다. 거수기 의원들은 지도자의 하수인이다. 지도자에게 무게가 쏠리면 그는 독재적 성향을 갖게 된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헌법기관은 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하도록 국민적 압력을 넣어야 한다. 노동정당이 집권한다 해도 매사에 재벌노조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사안별로 판단하게 되면 문제해결의 객관적 한계가 강요하는 타협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개혁은 기존틀의 변혁이며 그 결과 희생과 불평이 따라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정책과 제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개인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시되는 사회현상의 통계적 추세를 개선하는 것에 불과하다. 복지제도에서 재정과 제도에 대한 지나친 과신은 금물이다. 복지제도의 관료화는 인간소외의 또다른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필요한 것은 현장에서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봉사요원들이다. 현장에서의 인간적 봉사와 제도적 해결방법은 차원이 다르다.

시민들이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우리 사회 단계에서는 국내적으로 어느 정당이 집권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국제적으로 제국주의가 횡횡할 때는 안보와 외교면에서 여전히 대권이 중요하기는 하다.) 국내문제에서 정치권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된 재정을 놓고 우선순위에 따라 분배하는 문제이다. 장기적으로 이들은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당이든간에 연역적인 정책꾸러미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정치인들이 사안에 따라 양심적으로 투표하고 공익을 위해 노력한 뒤에 자기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국민 앞에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논리주의, 연역주의, 변증법과 같은 사회이론들은 현안해결에 있어 정치인들의 지적 태만의 원인이 된다. 문제마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접근하도록 압박하라.

정치인들이든, 시민들이든 간에, 사안별로 경험적 자료를 수집하고 기능적인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질서와 무질서의 요인을 통찰하고 문제해결의 창의성을 발휘하고 창의적 해결방식을 사회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날카롭게 논적을 찌르는 비판들은 아무 경쟁력이 없다. 현실적으로 경쟁하는 것은 대안들이다. 대안 없는 비판은 하소연에 불과하다. 그것은 민감성과 공감대의 대상이다. 그러나 문제해결은 대안들의 설득력의 문제이다. 대안이 없는 비판자들은 경험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고, 기능적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질서와 무질서의 요인들을 통찰하고, 문제해결의 창의성을 발휘할만큼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상대를 단순히 조소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고도로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사회이다. 시민들은 모든 사안에 대해 즉시 판단할 수 없다. 정보들을 수집하고 그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고 갈등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우 힘든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자기 힘으로 자료들을 수집해야 한다. 그것이 힘들면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태의 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료수집능력, 분석능력, 판단력과 결단력 등 인격적 잠재성의 총체가 사회적으로 투입될 때에만 민감하고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통합이 가능하다.

민주화의 단계에 있어 우리는 지금 희망을 갖고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잠재성에 있어 우리는 서구의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피해나가면서도 민주적인 사회통합을 달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화적 자원들을 갖고 있다. 현대의 시민정치는 정치권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의 심화확대에 달려있다. 아래로부터 자기표현의 구조망을 건설하는 것이 민주사회다. 우리 시대는 민주적인 대중문화를 건설하는 시대다.

다양한 관심과 필요에 따라 동호회 등의 기초공동체를 구축하고 전문적으로 재미있게 활동하는 것이 민주적 대중문화 건설의 요건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적절한 방향으로 진행중인 것으로 보인다. 당파적인 정치논객들보다는 재미로 참여하는 동호회원들이 시민정치의 성숙에 있어 훨씬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 정치개혁의 관점에서 초점을 바꾸어보라. 우리 사회에는 대중문화의 건설에 참여하는 많은 작은 꽃들이 도처에서 움트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사회에 대한 희망을 갖고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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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09우리모두에 올리신 글>

정보가 통제되던 시절에 사람들은 신문기사 안에 숨겨진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 고도의 독심술을 발전시켜야만 했었다. 억압된 정치열기가 기형적으로 분출된 결과 정치담론이 심각하게 왜곡된 경우다. 이렇게 왜곡된 정치독심술에 입각해서 언론은 '3김'이라는 왜곡된 정치상징을 개발해냈다. 이것은 잘못된 기초 위에 환상의 궁전을 지은 퇴행적 업그레이드다. 현실인물과 무관한 상징 조작이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이러한 정치상징을 단순한 흥미위주의 언론상품으로 애용했지만 또다른 일부 언론은 이를 권력투쟁의 게임소프트로 발전시켜서 유권자를 온라인게임의 참여자로 전락시켰다. 정치9단, 정치10단 승단식을 개최하고 음모론 감상법을 제시하며 미래를 맘대로 예측할 뿐 아니라 미래의 향방을 멋대로 좌우하는 언론권력을 획득해냈다.

상징게임이 현실을 지배하는 정치상황에서 한국에 고유한 정치담론이 형성되었다. 이른바 술자리의 '믿거나 말거나' 가십거리 정치토론이다. 민주헌법을 쟁취한 후에도 사람들은 현실문제의 분석과 해결보다는 게임시장의 정치놀이에서 더 큰 재미와 현장감을 느꼈다. 정계에서는 자질보다는 머리수가 중요했다. 우리편의 머리수와 너희편의 머리수가 정해지면 나머지는 권모술수의 단수가 결정한다. 그리고 밀실 음모가들의 단수는 전지전능한 주필이 정해준다. 이런 식으로 웃고 즐기는 가운데 한국 정치계에는 어느덧 잡초만이 무성해졌다.

잡초제거는 일종의 인적 청산이다. 그러나 한국의 못자리에서는 어떤 품종을 심어도 잡초만 재배된다. 경작자들이 바로 상습적으로 잡초를 말아 환각제를 피워 온 골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변화된 상황에서 과거의 게임은 계속될 수 없다. '3김'이라는 정치상징이 퇴장했다. 영웅 뒤만 따라다니던 병졸들만 남았으니 이제는 게임이 안된다. 이제는 병졸들이 아니라 저마다 자기 판단과 신념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현실정치를 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감상법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분석과 문제진단, 그리고 해결사이자 치유자로서의 각자의 신중한 판단력이 요구된다.

문제는 골초들의 금단현상이다. 과잉된 정치의식과 게임중독증은 그대로 남아있다. 현실은 너무나도 복잡한 전문화와 세분화의 거대한 종합이며, 다양한 이권들과 신념들은 깔끔하게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입장 안에서도 두루 중첩되어 있다. 우리편, 네편 갈라서 싸우고 욕하고 돌던지고 술먹는 놀이가 아니라 신중하게 단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문제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은 싫어한다. 정치게임이 좋았던 것은 그것이 무책임하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여에 책임이 부과된다면, 재미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은 40대부터 연구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했다. 당시 그리스의 40대 시민이면 하급자의 고달픈 일상에서부터 관리자의 무거운 책임성까지 두루 체험해본 사람들이다. 현대인은 보다 일찍, 보다 복잡한 문제의 해결에 참여해야 하며 자신의 다양한 체험을 지속적으로 통합해 나가야 한다. 이념이나 성향, 열정이나 욕망에 따라 깃발들고 줄을 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면상황 안에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영역을 파악하고 신중한 판단력과 책임성을 습득하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방향이 뒤틀려 있으면 열심히 전진해서 퇴보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출발점은 현재 당연시되고 있는 정치담론의 허구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별방법은 단순하다. 스스로 자문해보라. "지금 나의 관심이 문제의 규명과 해결에 놓여 있는가, 아니면 내가 편드는 진영의 영웅이나 그 반대영웅의 영웅적 행동과 언변에 놓여있는가?"

골초의 금단현상은 새로운 영웅상징을 요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각자의 판단력과 책임성을 사회적으로 통합하는 협력의 능숙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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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정치는 피 튀기는 권력투쟁인가, 아니면 거대한 통합의 과정인가?

현실주의 정치학자들과 야심가들의 끝없는 훼방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정치는 공동체 통합의 거대한 과정이었고, 또 지금 여기에서도 사실은 그러하다.

공정한 룰에 따른 경쟁과 적자생존의 투쟁은 다르다. 적자생존의 무자비한 투쟁은 문명과 질서가 결핍된 상황 속에서 심적으로 퇴행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다. 모든 문명권과 문화국은 사회적 분쟁이 발생하는 곳에서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힘의 과도한 집중을 견제하여 경쟁의 누적이 장기적으로 사회적 협력과 통합에 공헌하도록 조정한다. 정치는 정의로운 질서를 형성하려는 노력이며, 올바른 질서란 강자의 자의적 질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자발적 협력과 통합에 봉사하도록 기능하는 질서이다.

사태의 자연스러운 경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정치적 통합의 과정을 보다 느리고 보다 비효율적이고 보다 짜증나게 만드는 작동기제들은 무수하다. 일상의 부단한 협력과 사회적 통합의 거대한 작동과정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색안경들의 종류는 여럿이다. 그리고 각각의 색안경들, 이즘들, 주의들, 론들, 감상법들은 나름대로 자극적이고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또 부분적으로는 그럴 듯 하기도 하기 때문에 아직도 만병통치약은 시중에서 잘 팔려 나간다. 성적인 변태와는 별도로 정치적인 변태들도 허다하다. 변태들이 쓰는 신문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다.

정치담론의 문제는 딴 다리를 긁어야 말발이 선다는 데 있다. 정치얘기만 나오면 현실과는 무관하게, 마치 딴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인구에 회자되는 조어들과 관념들, 이미지들과 연상들을 통채로 습득해야만 옆에서 한 마디 거들 수 있다. 무협소설에는 내공과 외공, 경공술과 검장지법에 관한 고도의 학술적 체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이라는 것을 독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에 빠져 비몽사몽지간에 놓이면 적벽대전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정치권을 바라보고 조선일보를 읽다보면 그것이 생시라고 확신하게 된다. 요컨데 민주주의 정치란 중원무림의 대권투쟁을 감상하는 대권삼국지 감상법에 따라 독자들이 느낌과 말로 동조하는 양방향 게임이라는 것이다. 정치가와 시민을 매개하는 언론은 이 양방향 게임의 향방을 조정하는 역사의 지휘자이다.

정치담론에서 현실감각의 상실, 관념과 이미지의 오염은 심각하다. 신념에 가득 찬 고매하고 냉철한 사상가들은 한 꾸러미의 집합명사들을 논리적 체계 안에 가둔다. 그러나 그 집합명사는 자유로운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집합명사 안에 들어있는 등장인물들은 사실상 도처로 이동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는 유클리트 기하학처럼 깔끔한 논리적 추론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설득과 창의적인 분발을 통해 해결된다. 우리는 단지 종합적 추세를 분석 진단하고 개연성이 큰 예측을 얻고 그에 대해 가치판단을 한 뒤에 노력하고 인내하며 통합의 장기적 과정에 참여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인간적 과정을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주의자들은 책에서 얻은 판을 펼쳐놓고 그 안에서 이야기한다. 애독자들은 언론에서 읽은 기자들의 인상비평에 따라 판을 펼쳐놓고 그 안에서 이야기한다. 일단 판이 펼쳐지면, 그 판에 들어맞지 않는 사실증거들은 철저히 무시된다. 마침내 사실은 제쳐놓고 판들이 나와서 자기네끼리 싸움을 한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정치담론이라고 부른다.

19세기 좌우의 학술적인 장르문학들, 20세기 삼국지의 대중적인 장르문학들이 시민사회의 대중문화를 장악할 때 애독자들의 감상소감 나누기를 우리는 정치담론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정치담론의 한 가지 중요한 효과는 그것이 우리의 정서와 심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그 영향력이 현실의 정치과정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밉고 화나는 경우도 많은 법이다.

원래는 판을 짜놓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안에서 현실로부터 판을 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반칙이 아니라,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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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7월19일 우리모두 사이트에 올리신 글>

세상에 누가 들어도 당연한 말처럼 어려운 말도 없다. 건전한 상식과 바른 양식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사실 당연한 만큼이나 심오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당연함에 만족하고 넘어가지 그 심오함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심오한 것도, 건전한 상식과 바른 양식만 갖는다면, 지나가는 상념들 속에서 꼭 붙잡아서 인격 속에 간직하고 필요한 양분들을 공급해서 인격적 덕성의 수준으로 체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깨어난 놀라움으로 눈을 빛내며 의미를 찾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의식의 각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것은 그저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도 아퀴나스는 사회의 난제를 다룰 때마다 곧잘 이 말을 되풀이하면서 반성을 시작한다. '산다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의 구분이 그만큼 원리적이고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잘 사는 것'이라는 그 미지의 X를 잘 이해하고, 그저 사는 것으로부터 잘 사는 것에로 가는 경로를 잘 파악하고, 그것이 정말 잘하는 일(좋은 일)이라고 납득이 된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잘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경로에 따라 잘 사는 삶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추동의 흐름을 따라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윤리적 숙고가 전개된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일이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자알 살아보세~" 어린 시절 새벽 아침을 깨우는 동네 확성기에서는 쿵짝쿵짝 쿵짝쿵짝 새마을노래와 함께 이 노래도 항상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새벽종이 울리면 졸린 눈을 비비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기 위해 지긋이 아랫배를 당기며 새벽길을 나선다.

당시엔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꽤 명백했던 것 같다. 일제랑 미제는 국산보다 이쁘고 튼튼해서 좋다. 잘 사는 것이란 일본이나 미국처럼 사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이란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자동차도 사고 부자가 되는 것이다. 이건 아주 당연한 말이다. 결국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는 말의 의미는 인간은 부자가 되서 마음 놓고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것은 어린 시절, 다소 배고프던 시대의 이야기다. '잘'이라는 말이 간직하고 있는 의미심장성은 결코 불고기 3인분에서 멈추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잘'이란 말은 신발끈을 메는 기억과 연상되어 있을 수도 있다. 술레잡기에서 술레한테 잡히지 않고, 다방구에서 친구들을 구출하는 것도 정말로 재밋게 잘 사는 일이다. 잘 사는 것은 두루 잘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국어도 잘하고 산수도 잘하고 사회도 잘해야 한다. 그런데 거짓말을 잘하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을 잘 하는 것이다. 그니깐 그것은 잘하는 것이긴 하지만 잘 사는 것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이란 좋은 일은 두루 잘하고 나쁜 일은 두루 잘 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 살려고 노력하면서, 마치 티끌을 모아 가듯이, 나름대로 학식과 기술이 발전하고, 윤리의식과 사회성이 성숙한다. 그것은 생각 속에 스쳐가는 상념들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몸과 마음이 함께 익힌 습관이 된다. 그것은 각자의 성격과 역량, 가치관과 세계관, 개성과 인격을 조성한다. 나의 온 생애를 통해 누적된 나만의 독특한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결정과 행동은 나의 인격으로 통합되서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누구나 지금까지의 생애와 앞으로의 생애는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분투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말로 '잘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삶을 통해 마주치는대로 가능한 한 무엇이든 나에게 좋은 것을 모아들이고 나에게 나쁜 것을 피하면서 그것들을 수단, 도구, 디딤돌로 삼아 무언가 '잘 사는 것 그리고 보다 더 잘 사는 것'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당시에 나에게 좋은 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도 아니요, 당시에 나에게 나쁜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만도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또 결국에 가서는 그 자체로 좋은 것과 일치되는 노선으로 잘 해가야만 두루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한 좋은 것 모두 다와 가치있는 것 모두 다를 어떤 좋은 질서 안에서 어떤 올바른 선호에 따라 그때마다 음미평가하면서 수용하고 창조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내가 혼자서 그 모든 좋은 것을 다 얻어낼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협력을 통해 서로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면서 좋은 것을 두루 공유한다. 가족들은 나에게 기초적인 인성적 가치들을 제공하고, 전라도의 농부는 나에게 생명가치를 유지할 수단을 제공한다. 경상도에 공장을 지으면 사람들이 흘러 들어가 가전제품이 줄을 지어 나온다. 공단에다 공장들을 여럿 지으면 제품들의 줄들이 열을 지어 흘러 나온다. 트럭은 밤을 새워 달리고, 택시들은 분주히 교차하고, 가득 찬 건물마다 사람들은 활동으로 분주하다.

경제활동이 잘 사는 것의 끝은 아니다. 어느 수준에서든 반복적인 생활수준의 흐름 위에는 문화적 생활이 층을 지어 올라간다. 멋진 상대와 대화를 하며 잠시 시간을 멈추고 개성들에 매혹된다. 야구선수의 홈런은 한 여름밤의 더위를 식혀준다. 좋은 문학작품들은 의미들로 가득 차 있고, 노래와 춤은 원초적인 열정에 리듬을 부여한다. 만화와 영화는 창의성을 자극하고 창의성은 세계를 새로운 가치들로 채운다. 불멸의 작품은 영혼을 일깨우므로 아퀴나스와 같은 이들은 700년이 지나서도 강의를 계속한다.

문화적인 가치들의 향유도 잘 사는 삶의 끝은 아니다. 내면성이 성숙하는 만큼 연대성의 무게도 깊어지며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등장한다. 인격적 가치가 등장하며 그것은 사회 안에서 질서의 선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개성적인 인간들이 서로 다른 가치들을 결집해서 질서의 선에 공헌하는 와중에 상충하는 가치방향들이 충돌하고 분열하고 패권을 다툰다. 인류의 근원적 연대성 안에 인간존중의 가치를 채우려는 분투는 먼저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는 기초를 망각하고 연대성을 무시하는 개인주의로 후퇴하거나 아니면 권력을 잡아 차이들을 획일화하고 강압하려 한다.

인간은 단지 생존하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잘 살려고 한다. 그리고 단지 잘 살려고 할 뿐 아니라 언제나 보다 더 잘 살려고 한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사용가능한 공적 거래계산서인 돈이라는 도구를 끝없이 쌓아 놓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수단이 무한히 필요할 수는 없다. 수단이 무한히 필요한 사람은 결코 '잘 산다'는 목표지점으로 전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잘 사는 삶은 결코 부귀나 영화, 명예나 칭찬, 권력과 숭배의 무한한 축적은 아니다. 잘 사는 삶으로 가는데 필요한 수단들이나 가능한 수단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수단들은 자신을 넘어선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들일 뿐이다. 잘 사는 삶은 수단의 무한성이 아니라 과정의 초월성이다. 내가 이제 신발끈을 잘 매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제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난관을 잘 해결하며 전진해야 한다. 잘 사는 삶은 본성적 갈망이 추구하는 의미심장한 가치들과 의미들을 몸으로 체현하고 어깨로 연대하면서 언제나 보다 더 잘 살려고 영적으로 분투하고 어느 정도 계속 성공하며 전진하는 삶이다.

궁극적으로 '잘'이란 용어가 지칭하는 현실은 바로 우리의 본성적 갈망 안에 깃든 초월적 목적성인 것 같다. 그것은 물질과 생명의 약동을 자체 안에 간직하면서 생물학적 생명이라는 기초적 가치를 유지하고, 그 위에 삶의 반복적 필요들을 해결해주는 경제적 가치들을 획득하고, 그 위에 가정과 친지에서의 친밀성의 가치들, 공동선을 향한 공동체의 연대적 가치들, 정의로운 국가와 평화로운 세계의 질서의 선을 획득하고, 내면성의 다채로운 문화적 가치들을 충족하면서 그 너머의 어떤 궁극적 목표를 향해 수직적으로 상승한다.

아래로부터 위로 상승하는 인간적 삶에서 퇴행이나 도피는 가능하겠지만 단계를 뛰어 넘은 도약은 없을 것이다. 체험과 이해와 판단과 결정과 행동을 통해 몸으로 체현되는 가치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상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예기치 못한 순간에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뜻밖의 선물 안에서만 가치충만을 발견할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그래서 잘 사는 삶이란 또한 매순간 가치충만을 예감하며 고대하는 삶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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