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1108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경제학은 참으로 재미있다. 근데, '좌파'가 경제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좀 피곤한 일이 되기 쉽다.
왜냐하면, 좌파는 우파의 경제학도 '이해'해야 할뿐만 아니라 우파의 경제학을 '넘어서는' 좀더 거시적이면서도 그것이 탁상공론이거나 관념적이지 않게끔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판.적. 경제학>을 습득하는 과정은 어느 정도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만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경제학에 대한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는 약간 도식적이긴 하지만 다음의 범주들에 대한 개략적 학습이 요구된다.


1. 경제사
2. 또는 경제사상사 (역사적 맥락 파악 수준에서.)
3. 주류 경제학의 기초 이론 (거시경제학+미시경제학)
4.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기초 이론
5. 현대자본주의론 (자유주의 ->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 신자유주의로 변화하는 과정)
6. 최근 경제흐름에 대한 동향 파악 (세부적인 현안보다 1∼3년 단위의 동향)
7. '세부적인' 현안에 대한 별도의 연구 (가령, 재벌문제, 한국경제위기 원인, 부동산 대책 등
의 세부적인 현안들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함. )

그리고 경제학의 학습방법으로 가장 권장하고 싶은 것은 <재미론>의 관점에서 접근하라는 것이다. 즉, 재미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것을 먼저 공부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스스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새롭고 낯선 개념과 용어들이 등장할 때 질려버리게 될 것이다. 해서, 학습방법론에 관해 권유하면 다음과 같다.

1. <재미론>의 관점에서 '주제' 선정을 하고 학습에 들어갈 것.
2. 세세한 개념의 암기보다는 <기본적인 논리구조>와 '맥락'을 파악하는 것에 주안점을 둘 것 (심지어 경제학자들도 세부적인 것을 암기하고 있지는 않음. 그런 것은 나중에 다시 책을 참고하면 됨. )
3. 가급적, 50~60% 정도는 이미 알고 있고, 40%~50% 정도가 '새로운' 내용으로 된 교재를 선택할 것
4. 한가지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지향하기 보다 <수박 겉핥기>방법을 사용할 것. (수박겉핥기처럼 계속 대충 대충 여러번 보다 보면, 나중에는 개념의 '용법'이 익숙해지고 기본적인 논리구조가 보이게 됨.
중요한 것은 '용법'이고, 암기가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임. )



[참고]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
주류경제학 교과서의 기본은 거시경제학(巨視經濟學)과 미시경제학(微時經濟學)으로 나뉨.
거시경제학은 '국민경제'를 단위로 분석하는 것임. 가령, 실업률, 국민수지, 재정, 경제성장 등의 범주가 여기에 해당됨.
반면, 미시경제학은 '개별 경제행위 주체'를 분석단위로 하는 것임. 중고등학교때 배웠던 가계(소비자), 기업(생산자), 정부라는 3주체가 여기에 해당함. 그래서 여기서 주로 배우는 것은 효용곡선(소비자), 생산함수(생산자), 수요-공급 곡선, 비용-효용 극대화와 관련된 이론 및 개념틀이다.
이런 개념틀을 접하면 그것을 일일이 암기할 필요는 없고, 기본적인 <사고방식>과 <논리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념틀이란 어차피 논리구조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앞으로 권하게 될 책중에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교재는 '우선적'으로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점이나 내용도 몹시 알차고, 분량도 얇은 편이고, 그리고 가격도 일반 책 가격의 1/2∼1/3 수준이기 때문이다. 구입은 아무곳에서나 할 수 없고 교보문고에서 '불법유통'(?)되고 있는 것을 사거나, 거기에 없는 책은 대학로 방송대 본관 뒤에 있는 <동화서점>이라는 곳에 가면 살 수 있다. )


0. 학습전에 맛배기용 학습
『경제학개론』,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변형윤 외

* 위 책은 초보중의 초보를 위한 책, 경제사상사, 거시, 미시, 현대자본주의사까지를 아우르는 책임, 분량도 초보용으로 250페이지정도밖에 안되고 내용도 초보를 위한 내용임. 근데 내용은 아주 알참.


1. 경제사상사 (초급)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푸른나무, 유시민
『경제학사』,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변형윤 외
『경제사상사』,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권광식 외


1-1. 경제사상사 기타 (내용은 엉성하지만 봐서 나쁠 것은 없는 책들)
『경제학200년』, 새로운사람들, 김경훈
『죽은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김영사, 토드 부크홀츠


2. 경제사 (현대자본주의 이전까지)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책벌레, 리오휴버먼 {<- 봉건제부터 1929년정도까지}
『경제사개설』,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윤영자 외 {<- 고대부터 현대자본주의까지}
『경제사 기초지식』, 중원문화, 김호균 엮음 {<- 봉건말기부터 자본주의 초기까지}
『경제사와 자본론』, 한울, 松尾太郞(송미태랑) 지음, 최규성 외 번역 {<- 고대부터 자본
주의 초기까지, 그러나 내용이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입각해서 몹시 알참, 그래서 강추(!!) }
『소유와 생산양식의 역사이론』, 비봉출판사, 芝原拓自(지원탁자) 지음, {<- 고대부터 자본주의 초기까지, 역사유물론의 기본 해석 첨가}



3. 주류 경제학의 기초 이론 (초급)
『스티글리츠의 경제학』, 한울, 조셉. E. 스티글리츠, (<== 미시, 거시가 통합된 책)
『스티글리츠의 거시경제학』, 한울, 조셉. E. 스티글리츠
『스티글리츠의 미시경제학』, 한울, 조셉. E. 스티글리츠

『맨큐의 경제학』, 교보문고, 그레고리 맨큐
『맨큐의 거시경제학』교보문고, 그레고리 맨큐
『맨큐의 미시경제학』, 교보문고, 그레고리 맨큐

* 스티글리츠는 '당대 최고의 공력'을 가진 경제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사람임. 우파라고 하기에는 너무 따뜻한 가슴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공력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좌/우의 합리적 핵심을 내면화하며 사유하는 경지에 오른 사람임. 또한, 이해수준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설명을 '아주 쉽게'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 합리적 핵심만 술술~ 알아먹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 그래서 강추(!!)함.

맨큐의 경제학은 불과 2~3년전에 미국경제학 교과서를 평정했다는 책임. 맨큐는 뉴케인즈언으로 분류되는 사람임. 맨큐의 경제학은 영어 원서 독해 능력이 있다면,
원서로 보는 것이 더 편할 것임. 원서로 보면 쉽게 이해가는 문장도 번역으로 보면 좀더 어렵게 되었다는 평.



4.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기초 이론 (초급)

『경제와 사회』,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김수행, 김기원 공저
『시장과 자본주의』,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김수행, 김기원 공저


4-1.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중급 ??)

『한국사회와 자본론강의』중원, 황태연
『신정치경제학 개론』, 이론과실천, 김호균
『경제원론』, 풀빛, 平田靑明(평전청명) 지음, 강석규 옮김


*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쟁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와의 관계, 그리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와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다. 위에서 소개한 황태연, 김호균, 평전청명의 책은 맑스의 소유권 이론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는 책들이다. 김수행씨의 『정치경제학 원론』(한길사)는 그래서 일부러 뱄다. 내용도 초보가 보기에는 몹시 어려울 뿐만 아니라 관점도 그다지 올바르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5. 현대자본주의론 (신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초급 ?)

『현대자본주의론』,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김기원, 양우진 공저
『세계없는 세계화』, 시유시, 피터고원 지음, 홍수원 옮김
『투기자본과 미국의 패권』, 연구사, 이찬근 {<- 미국의 금융패권을 흥미진진하게 잘 정리, 그래서 강추(!!) }
『경제변동론』,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김수행, 김기원 공저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 문화과학사, 강상구 저(민주노동당 연대사업담당) {<- 아마도 좌파학생운동권의 기본 교재로 쓰일 것으로 짐작됨. }



* 현대자본주의의 작동메커니즘은 단지 경제학적 현상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심화된 이해는 사민주의체제에 대한 성립과 위기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자유주의-사민주의(사회주의)-신자유주의를 둘러싼 이론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그
리고 또한 각 나라별로 특징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 그리고 참고로, 1929년 이후의 자본주의에 대한 정리된 '통사'는 몹시 드물다. 경제사로도 별로 없고, 역사로도 별로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은 자신이 직접 발로 이 책 저 책, 그리고 이 논문, 저 논문을 찾아야 하며 스스로 개념적 체계를 세우고, 자기 머리로 정리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6. 현대자본주의론 (중급 ?? )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두산동아, 필립 암스트롱 외, 김수행 역 {<- 초강추 (!!), 이윤압박설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인데 나라별로 풍부한 사례와 데이터가 제시되고 있음. }

『미국식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적 대안』, 당대, 전창환, 조영철 외, {<- 초강추(!!), 가장 깊이 있는 내공을 가진 글을 쓰는 분들임. 경제학의 분파중 제도주의 좌파에 해당하는 국내 소장파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제도경제연구회'의 연구저작중 하나}
『미국 자본주의 해부』, 풀빛, 김진방, 성낙선 외 (<- 역시 제도경제연구회 분들의 책)

『유럽자본주의 해부』, 풀빛, 김진방, 이상호 외 (<- 상동)

『위기 그리고 대전환』, 풀빛, 김균 외 (<- '제도경제연구회'의 한국경제 분석과 제언)
『한국경제 재생의 길은 있는가?』, 풀빛, 이병천 외, (<- 상동)


『위기와 조절』, 창작과비평사, 정명기 (<- 조절이론 관련 논문 모음집)
『대안없는 자본주의』, 한울, 요하힘 히르쉬, 정명기 옮김 (<- 조절이론 논문 모음집)

『현대자본주의의 미래와 조절이론』, 문원출판, 전창환 (<- 얇은 책이지만 본질을 꿰뚫는 아주 알찬 내용 )

『자본주의 조절이론』, 한길사, 미셀 아글리에타 (<- 아글리에타의 박사논문이며 동시에 '조절이론'의 시작을 알리는 책, 전후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책임. )

『자본의 세계화』, 한울, 프랑수와 세네
『금융의 세계화』, 한울, 프랑수와 세네


7. 에세이 (주류 경제학 기초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있는 사람에게는 무난.)

『경제학의 향연』, 부키, 풀 크루그먼 (<- 1970년대∼1990년대 통화주의자(신자유주의자)와 케인즈주의자 사이의 논쟁을 서술한 책)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부키, 풀 크루그먼 (<- 상동, 크루그먼은 뉴 케인즈언으로 분류됨. )

『세계화와 그 불만』, (<- 스티글리츠의 IMF 비판 책, 스티글리츠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책)



* 아래 책은 경제학 책이라기보다는 사회학 또는 역사학 책에 가까운 책들, 그러나 현대자본주의론 이해에 필요한 내용들

『세계화와 복지국가』, 나남출판, 송호근 외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나남출판, 안병영 외
『복지국가의 이해』, 고려대학교출판부, 고세훈,
『혼돈의 기원』, 이후, 로버트 브레너 (<-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불황의 원인을 맑스주의 경재학의 관점에서 심도있게 분석한 책)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 한길사,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까치, 에릭 홉스봄 (<- 에릭 홉스봄의 역사씨리즈, 자본주의 초기부터 현대까지)



* 1929년 대공황 관련 연구 책

『대공황 전후 유럽경제』 동서문화사, 양동휴 외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양동휴 편저
『대공황의 세계』, 부키, 킨들버거


* 사회민주주의 관련 책들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당대, 송병헌 (<-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주요 이론적 전개를 잘 요약. 맑스, 로자, 레닌, 베른슈타인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 )
『한국사회민주주의 선언』, 사회와 연대, 한국사회민주주의연구회 지음 (<- 사회민주주의의 나라별 역사적 사례를 잘 정리 )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주의 계획경제』, 아카넷, 한넬로레 하멜, 김호균 역, (<- 동독 계획경제와 서독 사회적 시장경제를 이론적.실증적으로 비교한 책, 몹시 재미있음. )
『사회민주주의 연구 1』, 새물결, 까갈리츠끼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 이병천 외 엮음 (<-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사를 다룸)
『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 한울, 피터 게이, 김용권 옮김 (<- 독일 사민당 수정주의 이론가였던 베른슈타인의 전기, 혹은 평전)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백산서당, 아담 쉐보르스키 (<- 흔히 '쉐보르스키 딜레마'라고 불리는 사민주의의 딜레마(?)를 분석하고 있음. 쉐보르스키는 흔히 분석적 맑시즘으로 분류됨. )
『민주주의와 계급정치』, 백산서당, 김수진 역, (<- 유럽 계급정치와 민주주의의 변화 추적. 190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
『사회민주주의와 경제민주주의』, 인간사랑, 주성수 (<- 노동자정당의 파워, 노동조합조직률 등이 사민주의와 경제민주주의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각종 통계자료로 제시)




* 《제도주의 경제학》이라는 흐름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다음의 교재를 참고.
제도주의 경제학은 우파적 흐름과 좌파적 흐름이 있는데, 20세기 후반 가장 강력한 '사회과학 혁명'(?)으로 불리며 급속하게 세를 확산하고 있는 중임. (참고로, 경제학적으로 나는 맑스주의에서 제도주의자로 '전향'했음. 물론, 나는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이 제도주의 흐름이라고 보고 있지만... )

『신제도이론』, 민음사, 송현호 {<- 특히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함 !! 구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대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서 제본하면 됨.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임.}
『경제행위와 제도』, 스레인 에거트슨, 장현준 역,
『제도, 제도변화, 경제적 성과』, 더글러스 노스, 이병기 역

그밖에 위에서 추천했던 '제도경제연구회' 분들의 책을 봐도 되고, 약간 흐름이 다르긴 하지만 스티글리츠의 『시장으로 가는 길』(고급용?)이라는 책도 도움이 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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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aichiren
,
20030812 진보누리


96년이다... 인근 학교에서 한 학생이 시위 도중 죽은 것에 대한 항의로 대학가가 들끓던 3월이었다.
이어지는 분신... 자살... 마침 그 해에 학부제가 시행되어 과학생회 기반이 무너졌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91년 강경대 타살 정국으로 회귀할 뻔 했다...
당시 우리과는 한총련 헤게모니 하에 있었고
가입한 학회 역시 87년에 NL운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곳이었다.
오죽했겠는가? 유시민의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로 입가심하고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로 시각 수정을 거치고 집회에서 노래, 구호 외우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참가한 한총련 출범식...
지금 생각하면 "한총련 진군가"와 "청년의 기상" 두 노래로 날밤 까며
4만 여명이 연출하는 라이터 불꽃의 물결이 나치 집회마냥 여겨지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미성년인 어린애에게 혼연일체가 된 청년학생들의 스펙터클이
얼마나 장관이었을런지는 상상에 맡긴다. 말해 뭐해.. 뻑가지...

그 때 한총련에 대한 나의 첫번째 의혹도 같이 생겼다.
"근데 북한이 아니라 그 정권을 어떻게 믿나요?"
선배의 말씀, "왜 못 믿어?"
그 선배도 당시 달랑 2학년... 지금은 그냥 평범한 졸업생이다.

12월 노동법 날치기... 이어진 한보 사태 등등
연대 사태로 한총련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97년 상당히 뜨거웠다. 얼마나 뜨거웠냐면 학교 앞에 하루 건너 불바다 였다.
학생들만 뜨거웠겠는가.
청바지, 청카바, 운동화에 쇠파이프 두개를 이어 아예 쌍절곤을 만들어 휘두르는 '백골단' 아저씨 들...
스릴 만점이 따로 없다.
그 앞에서 목숨 걸고 대치해야 하는 짓거리가 뭐 그리 신났던지
3월 첫 폭투(폭력 투쟁) 직후 "앞으로 이런 투쟁이 매일 벌어질거야~~"라며
싱글대던 타과 선배를 보며 속으로 "이런 된장... 좋기도 하겠다..."

경찰도 심하긴 했다. 당시만 해도 집회는 곧 모종의 각오를 수반하는 것...
지하철을 넘나들며 집결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그냥 하염없이 가다가
삑~~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일제히 뛰쳐 나와 경찰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거나
골목 골목 짱박혀 행인인 양 하다가 깃발이 도로로 나서면 일제히 뛰쳐나가
구호 1분 외친 후 목숨 걸고 토끼던 때였다...
(당시엔 안전을 위해 선배 하나가 후배 하나를 에스코트하게 했는데 내가 맡은 후배가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어 끌고 업고 하며 신촌 로타리에서 홍대까지 뺑이쳤던 기억도 난다...)

고구려 관련 사료를 들고 다니다가 북한 지도라고 끌려가 닭장차에서 기합받은 놈도 있고
불법 불심 검문이 횡행하여 전경들이 ㅋㄷ거리는 가운데 핸드백 안 생리대 까지 수색 받던 때다...
시국 또한 오죽했을까.. 영삼이 지지율 바닥... 온갖 비리가 다 드러나더니
심지어 여당 대선 후보가 대통령 허수아비를 패대기치는 퍼포먼스를 벌여야 했을 정도로
정권이 막 나가던 때였고 그것도 정권이라고 "경제 전선 이상없음" 옹호하던 조선일보만
믿다가 결국 암에푸 직격탄 맞던 그런 때였다.

한총련에 대한 2, 3번 째 회의는 거의 동시에 터졌다.
북한 인민들이 속절없이 굶어죽어가던 때...
기독교 학생회도 동포 돕기에 나서는 판에 우리가 안 나서랴...
선배들이 다 군대간 터라 동기와 나 2학년 둘이 나서서 일일호프=적자 를 의미하던 과 전통을 깨고 간만의 흑자를 올려 뿌듯해하던 그 때 한총련 중앙에서 날라온 문건...

"겨우 수십만 죽었는데 수백만 죽었다고 과장하여 북한 기아 위기를 과장하여
혐북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한겨레는 각성하라."

이런 씨발넘들... 수십만 밖에 안 죽었으니 김정일의 위대한 영도력을 찬양이라도 할 일이다..

그리고 이어진 이석 씨 치사사건... 사실 프락치가 많았던 건 사실이랜다.
"안 맞으면 돈 못 받아요~~"하며 때려 달라고 하던 애들이 꽤 있었단다.
김영삼 일당이 오죽하랴... 그렇다고 그걸 잡아다 패 죽였다....
상대가 프락치가 아니라 이완용이라도 그렇게 사적인 린치로 죽여서는 안된다.

그 섬뜩함...

덕분에 어느 선배와 싸웠다.
"한총련도 애도하고 있지 않느야. 언론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현상과 본질을 가리자."
개겼지, 뭐...
"한총련 중앙이 '프락치 심은 정권의 책임이고 한총련은 잘했다'라고 성명 냈어도 그런 이야기 했겠소~"

이러니 물러선다. 조직 논리가 이래서 무서운 거다.
(당시 당사자 및 책임자들은 모두 사법 처리를 받았다.

그 문제로 현재의 한총련도 폭력 집단이라고 할 일은 아니다.
실제 그 이후로 화염병, 쇠파이프 쓰고 사람 죽인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당시 한총련 하던 애들은 지금 졸업했다.
폭력 행위와는 상관없는 요즘 애들가지고 폭력 집단이라고 해봐야 씨도 안 먹힌다.)

그 때부터 입대 전까지 주구장창 방황하고 입대하고 다시 제대....
죽어라 책 보고, 이런 저런 알바도 해보고, 이런저런 사람들도 만나보고.....
그리고 복학~~
이런 환장하게 기쁠... 과 분위기가 뒤집혔다.
NL일색이던 학회에서 PD 좌파 계열 부총학생회장이 나오고
이듬해에는 NL계열 총학생회장도 나오고~
그 판국에도 과에선 10 여년 만에 좌파계 여성주의 학생회가 서고~

애들도 틀리다. 역시 인터넷 세대다.
우리 때야 관변 논리는 기본적으로 안 믿고 선배들 말이 진리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예전엔 "적들의 심장에 피의 불벼락을 내리"고 "붉은 기 휘날리며 씨를 말려 버리자"는 노래를 불렀는데 요새는 이쁘고 상식적인 노래를 주로 부른다.
기껏해야 초딩도 아는 뻐킹 유에스에이가 과격한 축에 속한다.
어느 선배가 은밀히 건넨 수령님의 영웅적 무용담을 담은 "항일 무투사"같은 황당한 책도 없다.
하기사, 시대가 어떤 시댄데~
이른바 아지 뜨는 법도 모른다. 그래도 이쁘기만 하다.
그딴거 배워봐야 선동질에 꾸역꾸역 집단 감동먹고 집단 꼴통 되기 바쁘지....

그렇다고 한총련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아직도 주사파 꼴통들이 자신들의 북한 추종을 민족주의적 수사로 위장하여
암약하는 꼬락서니가 남아있다.

그래도 불패의 전대협 신화가 자랑하듯 "말잘듣는 놈 후려" 지들끼리 모여 의장으로 내정하고
전체 회의에서 만장일치 박수로 선출이 아닌 추대를 해버리는 북한식 풍습은 고쳐졌지만....

현재 한총련 내의 갈등이 어쩌구 하는데 아마 걔들 이럴거다.
"한총련 내의 사소한 의견 차이를 과장한 한총련 분열 책동이며 어쩌구~~"
막상 지들이 몰리면 "민족 반역자"니 "무원칙"이니 "부르주아 이념에 투항했"느니 거품 무는 것들이 운동권 짬밥만 믿고 아직도 군림하고 있다.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비이성적 비난이 아니라 비판을 하라. 애정없는 비판은 비난이다~~"

어절씨구....
그 논리대로라면 저희들도 부시에 대한 애정이 있어 비판을 하거나 애정없는 '비이성적' 비난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게다.
애정없어도 비판은 할 수 있는 거다.

97년에는 더 엽기적인 "매맞는 아내" 버젼도 있었다.
한총련= 매맞는 아내... 그래도 우리 안식구인데 우리마저 때리면 어떻하냐~~ 징징....

미친 것... 누가 쥐어 패자고 했는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해야지
우리 마눌... 한총련~~ 마니 아프지? 호~ 호~~ 삽질들 하고 있다...
쟤들이 이렇게 촌스럽다.

(촌스럽지만 알아먹기 쉬워 통하는 면도 있다.예컨데 PD 좌파 언어는 화려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주의 대학혁명~~" "혁명의 시편을 노래하라" "파괴된 것에 대한 파괴, 거부된 것에 대한 거부" 어쩌구~ 이런 수사보다는
"함흥가서 냉면먹고 평양색시에게 장가가자~~"는 유치한 구호가 더 잘먹히는 법이다.)

한총련 일부세력의 과도한 발언권으로 그 바닥이 아직 이 모양이지만
현 학생운동권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생들을 그것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이거야 말로 쥐새끼 잡으려고 63빌딩 태우는 짓이다.
한총련에 우호적인 애들 중 저런 꼴통 주사파가 얼마나 될까?
걔들은 대부분이 북한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이루겠다고 나서는 애들이다.
얘들에게 "주사파 또라이들, 뒈져라!!" 해보라. 아마 대부분이 이럴게다.
"난 김정일이 싫은데 나더러 주사파라고 하는군... 역시 수구들의 주사파 운운하는
공세는 순 개구라야~~투쟁~~!!"

박홍의 주사파 발언이 왜 마녀 사냥이었겠는가? 주사파가 없는데 있다고 해서가 아니다.
그 안의 극소수 주사파들을 전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시민운동 심지어 정부와 정당에까지 확대시켜
온 나라가 김일성 민족이 된 양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상식적 보수주의자들마저 "극우 꼴통, 조갑제 기쁨조"라고 몰아쳐 보라.
그들이 "아~~ 반성하겠사와요~~" 눈물같은 닭똥을 떨구며 회개할까?
오히려 자기들 옹호하는 극우 꼴통 품으로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빌어먹을 사태가 벌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다수의 민족민주주의적 NL 청년들을 전부 주사파로 몰아붙여
애들은 애들데로 누명을 씌우고 주사파는 주사파대로 그 안에 묻혀 헛소리를 삐약거리며
탄압받는 아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 운명체로 만들어버렸다.

얘들은 주사 꼴통으로부터 분리하여 상식적 범주로 끌어들일 대상이지
"이 주사파 개 빨갱이 새끼들!!!" 이라고 윽박질러 주사파가 암약하는 아지트로
몰아넣을 애들이 아니다.

21세기에 주사파가 발흥하는 것....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력을 배제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과 같은 탄압으로 몰아낼 수 있는게 아니다.
전두환 시절에 잡아다가 발가벗시고 물고문을 해도 오히려 번창했던 애들이다.
오히려 "고문 피해자". "국보법의 희생자"로 대중을 설렁설렁 속여 넘겨 혁명 투사 행세하던 애들이다.

차라리 한총련을 합법화시키고 주사파들에게 덧 씌워진 '수난 예수'의 아우라를 걷어내라.
그리고 백분 토론에 정식으로 초대해라.
"국보법으로 절대 안 걸리니까 김정일 만세든 뭐든 맘대로 말하세요.
그래, 김정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새내기용 노래책에 별 볼일 없는 보천보 전투를 찬양하는 노래를 왜 넣었나요?
북한 핵무장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여기서 헛소리하며 말 돌리면 "비겁한 새끼들"이 되는 거고
구라까면 "비겁"한 것도 모자라 북측 장군님의 진노를 사게 되고 (얘들 이거에 대한 공포심있다.)
솔직히 대답하면 우하하하 우습다~~ 꼴통으로 청사에 길이 남게 되는 거다.

나도 그랬지만 한국 입시 교육이 시대추세에 사맞디 아니할쎄
대학교 1학년의 의식 수준이란게 아직 그런 걸 잘 분간하기 힘들다.
이걸 분간하게 해주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 해대는 꼬라지를 보자.

정부는 당장 몰리니까 한총련을 조져 수세국면 타개하겠다고 엄살...
야당은 이 때문에 장관을 해임하자는 비정상적 오버질....
총리는 미군 관계자 불러 "죄송하다"고 밥까지 대접하며 애교...
이러니 한총련 애들이 수긍을 하겠는가?
주사파라면 치가 떨리는 나조차도 한총련을 옹호하게 만드는 이 오버의 극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미군을 팼나? 왜 장관을 자르고 애들을 수십명 감방에 쳐넣고 밥을 사먹여가면 아부를 해야하나?
아~~ 미국이 힘이 세서? 현실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보기에 영판 좋지가 않다.
이완용이라고 일본이 마냥 좋아서 그런게 아니다.
현실, 현실 하다보니 러시아보단 일본에게 먹히자고 그 오버질을 한거다.

작년 총리가 여중생 부모를 불러 위로했단 이야기, 미군 고압선에 팔다리 잘린
전동록씨 빈소에 화환 하나라도 보냈다는 이야기를 못 들어봤다.
기지에 학생들이 난입해 장갑차를 몇 분 점거하는 천인 공노할 사태에
밥을 사먹이고 장관을 자르자고 난리치는 이 짓거리의 반에 반만 했어도
작년처럼 촛불시위가 크게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미군의 일방적 수사를 멀건히 구경만하다가 일이 커지니 허둥대고
언론이랍시고 제 나라 국민이야 죽건 말건 수개월간 쌩까다가 역시 일커지니까
그제서야 "할만큼 했다~ 조용해라 (미군은 몰라도 니 새끼들은 할만큼 안했다. 닥쳐라) "
윽박지르고 자빠졌고.......

이 따위 행태에 이런 식의 대응으로 한총련을 정상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한총련은 백날 천날 주사파 입김을 못 벗어난다.
잡아다 총살을 시켜봐라. 걔들이 반성하나.

이 나라는 왜 한총련에 반대하는 나같은 사람마저
한총련을 옹호할 수 밖에 없는 엿같은 상황을 만드는 것일까?
하기사 지금까지 해 온 짓거리가 늘 그랬었다.
잘 하는 짓이다.
계속 그래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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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논평을 첨부합니다..


[민주노동당 논평] 한총련은 합법화되어야 한다.


정부가 지난 7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의 경기도 포천 주한미군 사격훈련장 진입 시위에 대해 강경대응 방침을 밝히며 한총련의 합법화를 재검토키로 한 것은 또 한번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또한 한나라당과 우리 사회 일각의 보수강경세력들이 사안의 본질은 헤아리지 않고 연일 한총련을 불법·폭력 집단으로 매도하며 정부의 강경대응을 부추기는 것은 또 다른 색깔공세에 다름 아니다.

이번 시위에 나선 학생들이 선제공격을 위해 신설된 '스트라이커 부대'가 첫 훈련지로 한국을 선택한 것은 한반도가 그 첫 투입장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며, 따라서 명백한 전쟁훈련이기 때문에 '전쟁을 막기 위해 미군훈련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또한 아무리 사격훈련장에서 이루어진 시위라 하더라도 맨몸에 평화적으로 진행된 것을 과격과 폭력으로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완전히 흐리는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발생한 주한미군 범죄는 한국 재판에서 단 한 건도 처벌받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 범죄에 대해 지금껏 단 한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범죄도 아닌 시위에 대해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 정부에게 엄정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오만함과 적반하장의 극치이며, 명백한 '내정간섭'이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신속하게 미국 정부에게 사과하는 것은 미국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굴욕외교'로 강력히 규탄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게 한반도 전쟁위협 중단을 촉구하고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특단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신속하게 한총련 합법화를 추진하여 '시위'와 '탄압'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아울러 한총련은 국민앞에 밝힌 대로, 한총련 시위에 대한 국민여론에 귀 기울여 감안할 것이 있다면 적극 감안하고, 항상 국민의 성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투쟁을 전개해 나가길 바란다.<끝>

민주노동당 대변인 이 상 현


[사회당 논평] 정부는 한반도 평화 투쟁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
- 미군훈련장 기습시위를 빙자한 정부의 한총련 탄압에 부쳐 -

정부는 지난 7일 한총련 소속 학생이 벌인 미국의 신속기동여단, 즉 '스트라이커' 부대의 훈련장에서의 시위 빌미삼아 시위 참가자 전원을 구속한데 이어 9일 오전에는 이에 항의하여 연행된 학생들을 태운 호송 버스 앞에 드러누워 농성을 벌인 학생 전원을 연행하는 등 이번 사태에 대해 초강경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미국의 신속기동여단, 일명 '스트라이커' 부대는 신속하게 분쟁지역에 투입, 임무를 수행할 목적으로 창설된 실전용 전투부대이다. 이 전투부대가 창설되자 마자 '첫' 해외훈련지로 삼은 것이 바로 우리나라이다. 이는 바로 언제든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미국의 의지를 드러내는 명백한 전쟁위협이며, 따라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실질적 도발행위이다.

우리당은 이런한 미국의 명백한 전쟁위협에 맞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 한총련 학생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전한다. 아울러 초강경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는 정부와 강경탄압을 부추기고 있는 보수 우익 언론에게 대체 어느나라 정부이고 언론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당은 이번 사태를 한총련 합법화와 연결시키려는 비민주적 작태에 대해서도 규탄한다. 한총련 합법화는 조건부 거래를 통해서가 아니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확립 차원에서 조건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탄압을 일삼은 법적 근거가 되고 있는 반민주 악법인 국가보안법 또한 철폐되어야 한다.

우리당은 정전협정 체결 50주년을 맞아 지난 50년 동안 항시적인 전쟁위기에 시달려온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힘차게 투쟁해 왔다. 전쟁은 가진자들과 지배자들, 제국주의자들의 배만 불릴 뿐, 노동자-민중에게는 죽음을 가져다줄 뿐이다. 우리당은 이런 전쟁을 한반도에서 일으키려 하는 모든 세력에 반대하며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앞장서 투쟁할 것이다.

2003년 8월 11일
사회당

Posted by taichiren
,
<20031216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오늘날 우리는 행동이나 사고의 합당한 기준을 놓고 고민한다. 개인적인 윤리 문제 부터 사회생활의 행동규범까지 그리고 나아가서 정치 경제적 차원에서 사회의 공동관리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행동기준은 여러가지로 많은 도전을 주는 주제가 아닐수 없다. 개개인의 생물학적 사회적 개성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현대사회는 사상, 이념, 지식이 학술적으로 전문화되고 분화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존재 환경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행동규범의 근거로써 인간 개인의 표준적 정체성을 크게 두가지 면에서 찾는다. 그것은 바로 평균인과 상식이다.

평균인은 무엇인가? 평균인은 (homme moyen) 통계적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정치 사회 경제에서 수리적 인간측정의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영어로는 Average Person 이라고도 한다.

평균인의 개념을 알려면 먼저 평균의 개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평균을 쉽게 Average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평균에는 세가지 개념이 있다. Average, Medium, Mean 이 바로 그 개념들이다. 그런데 평균인은 정규분포 즉 Normal Distribution에 따른 Mean에 의해 구해진 평균수치의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average person 보다는 mean person 이 옳은 영어 표현일 것이다. 19세기 초 벨기에의 천문 통계학자였던 케틀레가 선배 천문학자 가우스의 정규분포 곡선 즉 종형분포도의 표준편차를 토대로 인간의 신체 사이즈를 나이와 인종 성별의 평균으로 구분해 비만지수를 창시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종형분포도는 오늘날 수능시험이 끝난뒤 신문에 나오는 통계 곡선으로 가운데 평균 부분을 중심으로 볼록하게 모자 혹은 종 모양을 그리는 곡선을 말한다. 또 옛날에만 해도 동네 목욕탕에 가면 흔히 보는 체중계 저울에 몸무게와 체중의 상관관계가 비교표로 나와 있는데 이것도 케틀레의 평균인 지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케틀레의 비만 지수는 개인의 건강 측정에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케틀레는 통계학자였지만 자신이 창시한 평균인의 개념을 사회학에 응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19세기 자연법 사조의 영향을 받은 케틀레는 평균개체야 말로 그 군체의 진선미를 대표하는 최고의 표상으로 생각했다. 케틀레의 이 낭만적인 사고는 20세기 들어와서 좀더 복잡하고 세분된 개념으로 확장되어 권력이 좀더 영악하게 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주요수단이 되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물건하나를 만들어 팔때 예를 들어 타깃 소비자 계층이 20대라면 기업은 20대 평균 치수에 따라 물건의 사이즈를 정하고 20대 소비자 계층의 구매력과 머릿수를 계산해 수익을 예상하거나 생산 시설투자를 결정한다. 상품을 생산할때 사용되는 테일러 모델이나 생산공정 관리도 평균인에 입각한 노동자의 생산능력을 전제로 한다. 나아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거나 구 소련이 생필품이나 빵을 배급할때도 평균인의 소비량이 배급량을 결정하는 통계 지수가 될만큼 평균인은 현대사회에서 체제를 초월한 기본개념이다.

그러나 평균인은 물리적 개념이지 관념적 개념은 아니다.

케틀레는 평균인이 최고의 진선미를 증보하는 자연의 정화라고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인류보다 훨씬 먼저 지구상에 서식하다 멸종했던 모든 생물 개체군의 평균도 전부 자연의 정화이고 진선미였을 것이다. 사실 케틀레는 평균인의 개념을 통해 인간의 물리적 사회법칙을 찾아보려고 했고 상당부분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다. 분명 평균은 현상에 의한 인과나 개연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균 개념의 가장큰 단점이자 장점은 이것이 순수 통계적 관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데 있다. 통계의 장점이 운동 경향성의 측정을 통한 미래 예측에 있다면 단점은 인간과 사회의 유기적 운동 즉 아메바 같이 호흡하며 확장 변환하는 인간의식과 사회의 불확정성을 선형의 기하로 밖에 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들쭉 날쑥한 데이터의 중간점을 연결해 직선처리하는 것. 그것이 통계적 평균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통계처리가 가공될수록 단순화되고 직선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우기 큰 문제는 사회 정치 의식으로 치환했을 때 평균인적 사고는 개체적으로 피동적인 자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이다. 즉 평균인은 분명 경제현상과 관련해서는 의미있는 수치를 제공하지만 사회의 가치규범을 추구하는 정치적 시각에서 보자면 능동적 주체가 아닌 수동적 군체의 한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인은 누구일까?

상식인은 간단이 말하면 의식을 가진 평균인이다. 영미권에서는 상식인을 OPRP 라고 하는데 <합리적 신중함을 가진 보통사람- Ordinary Person with Reasonable Prudence>의 준말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가치 중립어인 보통사람이 아니라 <이성적 신중함>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Reasonable Prudence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이성적 혹은 합리적 신중함- RP 는 상당이 범위가 넓은 개념이다. 이는 개인의 도덕에서 부터 법적인 행동기준은 물론 사회와 정치적 의식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에서 Reasonable Jurisprudence의 개념을 처음 체계화한 사람은 헤겔로 신학자이자 법학자기도 했던 그는 개인의 동기와 의식 그리고 행동등은 모두 우주의식이 자기를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핵심본체는 이성(Reason)이라고 설파했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자면 지독한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지만 그는 법은 객체화된 우주의식이며 이 의식은 국가의 사법활동을 통해 이성/합리성(Reason)과 보편성을 구현한다고 믿었다. 대륙계 법리 전통이 영미권의 개인주의와 결합해 정착한 것이 바로 Reasonable Prudence의 개념이다.

상식은 사회정치적 의식을 말한다.
혹자는 상식을 논하면 Common Sense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부터 300년전 토머스 페인이 처음 사용한 Common Sense라는 책은 상식에 대한 어떤 명확한 철학적 관념적 정의도 주지 않는다. 물론 수단이 목적을 합리화할수 없다는 잠언이 나오긴 하지만 페인이 독창적으로 말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왜 영국 왕실의 신대륙 지배가 잘못된 것이고 왜 왕정제도가 낙후된 것이며 왜 미국이 독립해야 하는가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페인은 미국이 독립하는 것이 바로 상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즉 페인의 <상식>은 300년전 뉴잉글랜드 지식인들이 공감했던 특정 사회 정치적 규범이었던 것이다.

경제가 평균인의 개념을 중시하는 반면, 운용하는 반면 법과 정치는 상식인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법적인 문제로 변호사를 찾게되면 관련법에 관한 질문을 하지만 변호사는 오히려 내방자에게 팩트를 물어볼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법이 사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따라 법을 적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부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법적으로 양편 주장에 전부 일정부분 장점이 없는 경우가 드믈다. 그럴경우 설득력이 관건인데 그 설득의 과정이 바로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법조문을 구체적이고 복잡한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이며 이를 <법정심리- 즉 Jurisprudence>라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이 법정심리의 능력마저 시장원리에 좌우되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는 모순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심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상식이다. < 길거리에 떨어진 새끼줄을 집에 가져온것 뿐인데 알고보니 옆집 황소가 딸려 왔더라>는 말을 보통사람은 믿을수 있을까?

정치의 경우 유권자의 상식에 호소해 선거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기본이다. 87년 대선을 전후해 노태우 시절 <보통사람>이라는 말이 남발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열겠다는 신군부의 말장난 이었지만 저 18세기 낭만주의 성속투쟁의 유물인 이른바 < 범인들이여! 그대에게 축복이 있도다> 는 Blessed Mediocre ( 범인 축복론)을 깔고 당시 기득권 질서에서 철저이 소외되던 다수를 겨냥했던 나름대로 치밀히 계산된 프로파간다였다. 물론 신군부는 <보통사람>과 거리가 먼 계층이었고 당연이 <보통사람>을 외쳤지만 유권자를 <능동적인 상식인>이 아닌 <수동적인 평균인> 프로파일로 상정한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상식을 외면하는 정치모순은 신군부가 역사적으로 심판받은 지금도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 같다. < 정치 하려다 보니 필요해서 받았다>. <우리는 좀 덜 받았다...1/10 아니면 물러난다..> 는 식의 부패 합리화나 <경쟁당은 특정지역만 위한 정치를 하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는 식의 지역 패권주의론은 모두 유권자의 상식에 호소하는 형식이면서도 정작 그 메시지는 정치적 패배의식을 조장하고 이에 편승해 유권자의 상식을 정파이익에 짜깁기하는 퇴행적 조작이 아닌가? 상식에 호소하면서도 상식을 배반하는 정치의 변명이 아닐수 없다.

상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 이유는 사회가 변하기 때문이다. 상식이 사회를 변하게 만들기도 하니 양자는 상호 역동적 관계다. 정치건 사회건 법이건 도덕이건 모든 분야에서 상식 즉 보통사람의 합리적 신중함을 담보로한 가치판단 기준은 역사적으로 변해왔으며 지금 이순간도 변하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한국에서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면서 독재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지금은 더이상 그 누구도 독재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여자는 얌전해야 하고 무조건 남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이른바 여필종부의 사상도 사라진 것들의 일부가 된 느낌이다. 온라인에서 만나는 젊은 사람들의 언어와 의식은 장유유서나 가족주의의 인습을 상당부분 극복했다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상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주의나 계급문제 (쉽게말해 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상식이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희망은 이문제와 관련한 새로운 상식은 분명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주의로 소모적 논쟁을 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 기성 정치권은 개혁의 담지자로써 의지와 능력의 한계를 보였으며 오히려 다음시대의 정치아젠다인 빈부문제는 계급정당의 본격적 활동을 통해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 소비에트식 국가 독점 자본주의는 평등에 초점을 마추다 인격 존중의 가치와 조화하는데 실패했지만 미국식 금융 독점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잃고 점차 야만과 폭력에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 노동자의 연이은 분신이나 비정규직, 서민 생활고, 극단적인 빈부격차의 심화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로 풀어가야할 진정한 정치적 아젠다라는 것 등이 모두 우리 시대가 고려해야할 상식이다. 그리고 진보적 인간은 그같은 시대의 정치적 상식을 타인보다 조금 먼저 감지하거나 체득한 사람들이 아닐까?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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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7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1. 여왕의 재판

마르크스가 사망한 뒤 1년뒤, 그리고 파비안 협회가 결성된 1884년,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세명의 어부가 극악 범죄로 기소되어 왕실 재판대에 서게 된다. 살인에 인육 마저 나눠먹은 엽기적인 사건 이었다. 희생자의 이름은 리차드 파커, 남자, 사망 당시 15세를 조금 넘긴 소년으로 피살당시 마지막 직책은 고기잡이배의 선실사환 이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죄로 어린 나이에 자기 밥벌이를 해야 했던 이 불쌍한 소년을 죽이고 그 고기 까지 먹은 혐의로 기소된 <극악범>들은 누구였나?

사건기록은 두명이 공모해 한명이 죽이고 세명이 고기를 나누어 먹은 것으로 되어 있다. 살인 공모를 주도하고 사실상 피해자를 살해한 주범은 이름은 토마스 두들리, 살인공모에 주도하고 고기를 먹은 공범은 에드윈 스테픈스 그리고 살인음모는 거부했지만 인육을 나눠먹은 목격자 부룩스. 세사람 다 장년으로 직업은 어부, 피살자와 같은 어선에서 일했던 선원 들이었다.

이름하여 <레지나 v. 두들리> 케이스, 바로 <여왕과 어부>의 재판사건이다. <레지나 Regina>는 <거룩한 여왕>을 뜻하는 말로 이들을 기소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당대 최고의 통치권자이던 빅토리아 여왕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사건이 왕실 재판에 오게된 이유는 원래 강력 범죄는 왕실에서 재판하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법의 발전은 중세부터 사회적 평화를 저해하는 사건이나 이슈에 대한 권력의 심판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그이유는 <왕관>에 < 영토와 백성들의 평화를 보장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형법은 검사가 용의자나 범인의 유죄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일하는데 여기서 검사는 사회나 국가 권력을 위임받아 대표하게 된다. 즉 형법 재판에서 피고의 상대는 피해자가 아니며 국가나 사회전체가 피해자를 기소한다.

당시 보통 살인죄의 경우 지방관이나 귀족, 성직자들이 재판을 하기도 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재판의 경우 피해자가 직접 왕실 재판으로 심리해줄 것을 청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왕실에서 여는 Royal Court 일명 King's Bench의 재판은 국가에 포고령이 내려져 심리절차나 내용이 개방됨으로써 사람들의 여론이 공정한 지렛대 역할을 했으며 최고의 명 재판관들이 왕을 대신해서 벤치에 앉게되기 때문이다. 즉 왕실 재판은 지방의 인맥이나 권력이 개입되는 지방 재판보다 훨씬 편견이나 이해 관계에 자유로운 평결을 내렸으며 귀족이 연루된 사건에서 평민들에게 <상대적으로 공정한> 절차를 보장했던 것이다.


2. 어부의 비극

날씨 좋은 리버풀을 출항할때 만 해도 피해자와 범인들은 자신들 앞에 다가올 잔인한 운명의 시련을 전혀 알지 못했다. 소년 파커는 분명 선장의 호령속에서도 콧노래를 부르며 잔심부름을 했을 것이고 범인 두들리와 스테픈스도 그 모습에 미소지으며 힘차게 돛을 올렸으리라. 그러나 배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 무렵 이들은 엄청난 폭풍을 만난다. 배가 파선되면서 선원 대부분은 몰살, 바다에 수장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피해자 파커, 가해자 두들리, 스테픈스, 그리고 목격자인 부룩스였다. 대략 희망봉에서 1600마일 떨어진 해상위에서 4인은 표류하는데 운좋게 탑승한 구명 구명보트에 먹을 것이라고는 오직 몇개의 마른 무우뿌리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 이들은 또 다시 절망에 빠진다.

표류 4일째 부터 이들은 바다거북을 잡아 날로 먹으면서 버티게 되는데 그나마 너무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식수였다. 그릇도 물도 없는 상황에서 마실 물이라고는 오직 바닷물이지만 조갈을 부추기는 바닷물은 마시는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이들 어부들은 잘 알고 있었다.

표류 17일째 두들리가 스테픈스와 부룩스를 불렀다. '....이대로 있으면 모두 굶어 죽는다....기다리는 가족이 있는데 바다에서 죽을수는 없다..... 우리중 하나가 죽어 그 피와 고기를 먹을수 있다면....갈증과 허기를 조금더 버틸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제일 죽을 가능성이 큰 사람이 바로 저 소년 파커다..... 봐라. 이미 기진해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어차피 내버려 둬도 그는 죽는다. 차라리 그를 죽이고 우리가 산다면...' 이상은 두들리 본인의 자백과 목격자들의 진술로 확인된 법정기록이다. 다른 두사람 - 스티픈스와 부룩스-은 두들리의 이같은 말에 놀라며 본능적으로 구명보트 저쪽에 누워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가련한 소년 파커는 이미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 져서 말할 기운도 움질일 기운도 없었으며 잠자는 듯한 상태에서 가끔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 스티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들리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만일 필요하다면 두들리를 도와 소년을 죽이겠다고 까지 했다. 반면에 부룩스는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 아무리 굶어죽어도 사람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을 바에야 차라리 이대로 죽는편이 낫다고. 아직은 버틸힘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구조를 기다려 보자고..두들리는 두사람에게 생각해 보라고 말한 것으로 이날 대화는 끝난다.

표류 20일째... 먹을 것. 마실물. 아무것도 없이 3일이 또 지나갔다. 구조선은 나타나지 않고 섬하나 안보이는 망망한 바다만이 계속되는 상태였다. 허기에 지친 부룩스가 잠든 것을 확인한 두들리가 조용이 스티픈스를 깨웠다. '...지금 결행하자. 부룩스가 일어나기 전에....' 두들리의 말에 동의했던 스티픈스 였지만 막상 사람을 죽이기는 어려웠고 그역시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스테픈스가 일어나는 동안 두들리는 혼자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 파커는 이미 탈진이 극에 달해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두들리가 이름을 부르며 깨웠지만 눈조차 뜨지 못했다. 마침내 두들리는 하늘에 '....신이여 나를 용서하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올린뒤 울면서 소년의 멱을 땃다. 이미 탈진한 피해자는 비명도, 반항도 없었다고 했다.

표류 24일째..세사람은 살아남았다. 두들리가 가져온 <고기와 물>이 스테픈스는 물론 부룩스도 살렸던 것이다. 소년의 살해를 거부했던 부룩스 였지만 피해자가 죽자 아무말없이 그 고기를 먹었다. 한 인간의 육신을 식량삼아서 3명의 다른인간이 버틸수 있던 기간은 4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고 허기와 갈증을 해소할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굶주림과 바다.

표류 29일째.. 영국의 한 상선이 아프리카 바다에서 표류하던 작은 구명 보트를 발견한다. 구명보트안에는 세명의 탈진한 인간들이 널부러져 가는 숨결로 호흡하고 있었고 소년으로 추정되는 한 사람의 엄청나게 훼손된 시신도 함께 있었다. 이들을 발견하고 구조한 배의 선원들은 만일 하루만 늦었어도 이들은 필시 모두 죽었을 것 이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세사람은 영국으로 송환되었고 런던 도착 즉시 감옥에 수감, 살인혐의로 기소되었다. 사람고기를 먹은 부분은 필요성이 인정되 기소되지 않았지만 살인 부분은 기소되어 주범 두들리와 공범 스테픈스라는 두 사람의 어부는 여왕의 법정에(Queen's Bench) 서게 되었던 것이다.


3. 소송의 경과

우선 당시의 법부터 소개하자면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인 사람은 살인죄가 (Murder )적용되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관례였다.

의도적이라 함은 부주의나 실수로 인한 과실치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형사적 의미의 처벌이 가능한 마음의 상태를 (Mens Rea) 말하는 것이다. 사건의 내용상 분명 사람을 죽이고저 하는 의도가 있었다. 왕실재판의 원심을 주재한 허들스턴 경은 <배고픔 때문에 타인의 생명을 뺏는 것은 변명이 안된다. 정당방위의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은 자기가 살기위해 타인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판결했다. ( Hunger is no excuse for taking the life of another person. Except in self-defense cases, one person cannot kill another to save himself.)

그러나 피고인 두들리의 변호인은 피고의 행위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정당방위 였으며 상황에 의해 정당화 될수 있는 행위 였다고 주장했다. 피해자인 소년 역시 피고가 죽이지 않았어도 정황상 구조선이 그들을 발견했을 당시 피고들 보다 먼저 죽어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판결에 참가한 배심원들 사이에서 이문제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면서 배심원단은 <이경우를 살인으로 볼수 있는가?> 에 대해 특별 판정 (Special Verdict)을 발부했다. 이는 사건의 특수정황을 인정하며 이문제만을 특별 이슈로 다시 법원에서 재심할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들리와 스티픈스 두사람은 원로 판관인 코울릿지 경이 주재하는 왕실 특별심에서 이문제를 다시 심판을 받게 된다.

독자라면 이같은 사건을 어떻게 판결하겠는가? 만일 배심이 무죄를 선고하면 재판장은 피고를 방면하게 된다. 만일 배심이 유죄를 선언하면 재판장은 사건 유형에 따라 형을 선고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살인의 경우 유죄라면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

이 사건을 오래전 읽은 뒤로 나는 가끔씩 지인들에게 판단을 물어보기도 한다. 대충 통계를 보자면 12명을 배심으로 한다고 했을 경우 5명은 무죄를 7명은 유죄를 선고하는 것 같다. 이런 유형의 사건일 경우 오늘날 미국 평균 배심원단의 무죄: 유죄의 가치 스펙트럼이 40: 60 이니 대충 평균 배심원단의 의식이 생활속에서 반영되고 있다고 본다. 다만 미국에서는 진보적인 사람들일 수록 이런 유형의 사건에 대해 무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궁금해할지도 모를 독자를 위해 120년전에 치뤄졌던 이 사건의 재판 최종 결과는 이글 맨 나중에 소개하도록 한다.


4. Retrobutivism v. Utilitarianism ( 응보주의 v. 용도주의-ie 공리주의)

긴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가치관의 문제다. 추상적 도덕기준에서 시작해 구체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가치관이란 굉장이 개념이 포괄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다만 형법적 관점에서 보자면 크게 두가지 관점이 항상 충돌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오랜 역사와 전통 법리를 이루는 이루는 기본 개념은 사실 <응보주의> 이다. 신탁이나 계시에서 시작된 신의 정언명령에서 ( you must do.. ie: 십계명) 시작된 응보주의는 잘못을 하면 그에 대한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물론 제-정이 분리되고 국-교가 분리된 오늘날 응보주의는 도덕에 기반해 윤리의 토대위에 법리를 세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극단적 응보주의자들이 사회적으로 범죄 억제 효과가 별로 없다 하더라도 범죄자들에 대해서는 처벌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때 신학도였고 법학도였던 칼 마르크스가 혁명론에서 부르좌의 Bloody Legislation에 (유혈 입법) 치를 떨며 부르좌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할때 계급적 심판의 도구로 채용했던 개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신의 정언명령 대신 유물론적 변증법을 도덕기준으로 삼은 것이 다른점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스승이었던 헤겔은 법은 사회적 보편의지의 자기발전의 형태라고 규정한 사람으로 사실상 사회도덕에 입각한 처벌론 성향을 보였으며 응보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응보주의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사형집행에서 나타난다. 의도적 살인범의 경우 남의 생명을 빼앗는 자는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이 당연하며 피해자와 사회를 대신해서 법이 동등한 응보를 주어야 하므로 사형집행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설사 억제 효과가 별로 없다 해도 살인자에 대한 심판으로써 사형은 그 자체가 최선의 공평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논리다. 응보주의의 라이벌 공리주의의 가장 큰 관점이 < 억제효과>를 기준한 가치인데 비해 응보주의는 <공평한 심판>을 최우선 가치로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범죄행위와 범죄 처벌행위의 사회적 불쾌지수를 비교해 처벌을 조정한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는 사회의 행복을 해치는 요소지만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도 사회적 불쾌 요소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도둑의 처벌로 인해 다른 유사한 범죄들을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범죄 처벌 행위가 유사범죄 재발에 별 도움이 안된다면 그 처벌의 성격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인 것이다.

공리주의라는 말을 하면 존 스튜어트 밀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존은 말년에는 공리주의에서 멀어져 사회주의에 기울어졌다. 또 그의 사상은 아버지 제임스 밀에서 온 것이고 제임스 밀은 제레미 벤담의 측근이었으니 영국의 변호사 제레미 벤담이야 말로 공리주의의 시조이며 법적 개념의 공리주의를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연관시켜 사회-경제사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노동계급 독재도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점에서 공리주의 요소가 숨겨져 있으며 마르크스 자신도 제임스 밀의 스카치 댄디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긍정적 평가를 숨기지 않았다.

용도주의 혹은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살인범에 대한 사형은 통계적으로 살인 억제와 상관이 없으며 사회에 대한 살인의 불쾌지수를 (-100) 이라고 했을 경우 범인을 죽임으로써 또다른 불쾌지수 (-100) 이 추가되 결국 불쾌지수가 배가되는 (-200) 모순이 있다. 반면에 살인자를 가만 놔두면 본인의 재범(-100) 이나 타인의 모방범죄 (-100 * X )로 사회는 동일한 불쾌 지수의 무한증가를 체험하게 된다. 대신 살인자를 감옥에 가두면 사회의 불쾌지수는 (-30)으로 토탈 불쾌지수는 (-130)이 되니 살인자를 가만 놔두거나 사형시키기 보다는 감옥에 보내는 편이 가장 나은 것이다. 유용론 주류가 사형집행에 반대하는 이유이다.

이상의 두 관점을 위의 어부의 살인케이스에 비춰보면 재판부가 응보주의에 가까울수록 어부는 유죄를 받을 가능성이 크고 공리주의에 가까울수록 어부는 무죄에 가깝게 되는 경향을 볼수 있다.


5. 피상의 심판을 넘어서

세상의 일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 타인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아니 인간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존재다.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인간에게는 위악적인 면과 위선적인 면이 있으며 가학적인 면과 피학적인 면이 공존한다. 노출증이 있는가 하면 관음증도 있다. 결국 세상일의 판단에 대한 고민은 인간 스스로의 자기 판단에 대한 고민과도 같다. 사회, 정치적 판단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나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같은 인간의 본질적 자기 고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궁금해 하는 독자를 위해 어부의 살인사건 재판 결과를 끝맺어야 겠다. 특별심에서 왕실재판부는 원심의 판결을 재확인, 두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피고 토마스 두들리, 리차드 파커 살인사건 주범으로써 유죄가 인정되므로 사형.......'
'...............피고 에드윈 스테픈스, 리차드 파커 살인사건의 공범으로써 유죄가 인정되므로 사형.........'

특별심 재판부는 응보론의 원조인 브랙턴 경의 (Lord Brackton) <도둑은 도둑론>과 공리론의 원조 격인 헤일경의(Sir Hale) <필요성에 의한 살인 정당론>을 설명하고 <베이컨> 경의 <실용적 귀납론>을 차용해 장광설을 늘어놓았지만 결과적으로 두사람의 어부를 교수대로 보내는데 필요한 마지막 서명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끝났지만 의문은 남는다.
그같은 상황에서 두들리가 파커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은 것은 정말 원심의 판결대로 <악마> 같은 일이었는가? 그가 악마였다면 왜 소년을 살해하기 직전 울면서 신에게 기도했을까? 그는 왜 스테픈스를 강권해 소년을 죽이는 일에 동참시키지 않고 스스로 주범이 되었던 걸까? 스테픈스는 왜 두들리의 살인에 동의했으면서도 마지막 살인의 순간에 움직이지 않았는가? 두들리의 살인에 처음부터 완강히 반대했던 부룩스는 왜 살인의 열매였던 소년의 고기를 먹었나? 죽어가면서 십대의 피해자 파커는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가?

이런 정황들을 좀더 세밀히 판단해 본다면 법정 심리학의 응보주의나 공리주의 논쟁도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진리에 비하면 수박 겉핡기식 말장난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누군가를 심판하고 무언가를 평가할때 우리는 드러나지 않는 진실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위의 <여왕 v. 어부>의 판례에는 꼭 덧붙여야할 유명한 에필로그가 있다. 피고들은 유죄가 확정됐지만 그들의 사형은 결코 집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치권자였던 빅토리아 여왕이 군주의 사면권을 활용해 재판후 그들을 감형, 사면했던 것이다. 공범 에드윈 스테픈스 특별사면. 즉시 석방. 주범 토머스 두들리 감형 및 특별사면으로 징역 6개월 형. 여왕의 법정은 유죄를 평결했지만 여왕은 그들을 사면했고 이 사건은 훗날 살인범의 정황과 동기에 따라 형량이 바뀌는 선례가 된다.

120년전 유럽의 한 판례를 덮으며 한가지 아쉬운 것은 오늘날 우리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이나 사물에 대해 피상적 심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아쉬움이 어디 법정 심리 뿐이랴! 생활의 하루하루, 매순간의 결정이 실제적 판단으로 점철되는 우리의 인생과 사회속에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싫어하게도 된다. 또 무언가에 심취했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를 멀리하는가 하면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부터 떠나게 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을 깊이 알지 못하는 우리는 타인의 이같은 행위에 대해 피상적 판단에 머물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피상의 심판. 그것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아는자 끼리 인정하는 위선의 묵계일수도 있고 스스로 부족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우매한 교만일수도 있다. 그러나 위선은 위선대로 위악은 위악대로 과실은 과실대로 선의는 선의대로 인정하고 음미한다면 공리주의나 응보주의 같은 언어의 한계나 피상적 심판을 넘어 언젠가 우리는 인간과 세상의 진실을 조금 더 이해 할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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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624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는 애니메이션 그 자체 보다도 수많은 종류의 프라모델로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국내 공중파에서 방영된 건담 시리즈는 '기동전사 건담 0083 극장판' (그나마도 참 많이 편집된..) 단 하나 뿐이다. 케이블 에서는 '기동전사 건담 W' 가 방영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프라모델은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 '진퉁' 반다이의 제품이 있고,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하는 아카데미 과학의 정교한 모작들이 있다. 우리는 그 조그만 플라스틱 모형들을 질리도록 봐왔지만, 정작 그것들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뿐이다. 뭐 그거이.. 그냥 로보트 만화겠구만.. 

과거의 로봇 만화들 (이를테면 마징가 Z 와 같은) 의 구도라는 것은 참으로 명쾌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영웅 로봇이 절대 악인 미케네 제국의 헬 박사와 아수라 남작을 물리치고 인류의 평화를 수호하는 뭐 그런 것. 기동전사 건담은 아마 이러한 구도를 최초로 무너뜨린 로봇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기동전사 건담에 등장하는 적은 절대 악이 아니다. 우주로 진출한 인류가 지구권의 부당한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을 요구하며 지온 공국을 만들어 내고 시작된 1년 전쟁,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적들도 나름대로의 인간적인 고뇌가 있으며 휴머니티를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최소한의 리얼리티의 반영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모습을 우리는 항상 보아왔다. '빨갱이' 란 말이 그랬고 '수구 꼴통' 이라는 말이 그랬다. 

기동전사 건담은 그 리얼리티를 로봇물에서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정작 79년에 처음 방영 되었던 기동전사 건담의 최초 시리즈를 보면, 분명 그러한 리얼리티가 곳곳에 드러나긴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참으로 촌스러운 것임에 틀림 없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기동전사 건담 0083은 바로 이러한 역설 위에서 출발한다.

기동전사 건담 0083은 기본적으로 외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동전사 건담에서 소멸 되었던 '지구' 대 '우주' 의 구도가 어째서 기동전사 제타 건담에 이르러 '지구 연방 군사 독재 정권 티탄즈' 대 '반 지구 연방 에우고' 대 '지온의 후예 액시즈' 로 변화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시기적 으로는 1년 전쟁의 종전 3년 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설정 이라는 것이 그랬다는 것이고, 실제로 기동전사 건담 0083이 제작된 시기는 91년 이다. 설정상의 시기는 3년 후지만, 실질적으로 제작된 시기는 원작이 제작된 때로부터 12년 후라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좀 의미심장 하다.

앞서 언급하기를, 기동전사 건담이 나름대로 로봇물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최초 시리즈 자체를 가지고 본다면 촌스러운 것 이었다고 했다. 이게 시리즈를 거듭 하여 기동전사 제타 건담, 기동전사 더블 제타 건담, 기동전사 건담 - 역습의 샤아 - 로 이어지면서 원래의 의의가 미친듯이 확장되어 버렸다. 즉,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 밀리터리물의 형식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때마다 나오는 건담 시리즈에만 적용된게 아니라, 과거에 나왔던 건담 시리즈들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건담의 팬들은 촌스러웠던 79년 건담에도 자기 최면을 걸며 멋대로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즉,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제 기동전사 건담 0083 은 그러한 유사-밀리터리물의 관점에서 기동전사 건담의 초기 시리즈를 다시 재구성 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작화나 메카닉 디자인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어딘가 아둔하고 엉성해 보였던 기동전사 건담 RX-78 은 건담 시작 1호기 GP01 의 날렵하고 번쩍이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기동전사 건담에서 어색하고 제멋대로였던 군인들은 정말 리얼한 군인의 모습으로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건담의 세계에서 모빌 슈트라 불리는 로봇들이 균형을 잡으며 움직이기 위해 몸에 달린 각종 버니어 들을 작동시키는 세부적인 묘사들, 그리고 지상 전용 이었던 GP01 이 우주에 나가서 보여주는 무력한 움직임 들.. 이 모두가 리얼리티적 표현의 산물이었다.

기동전사 건담 0083은 1년전쟁 중 연방의 적이었던 지온 공국의 잔당들이 전술 핵 탑재 모빌슈트인 건담 시작 2호기 GP02A 를 테스트 기지로부터 탈취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통적인 로봇물의 관점에서 '적' 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온 공국의 잔당들은 대부분 신념과 긍지에 불타는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시마 가라하우와 같은 비열한 캐릭터는 예외.) 그들은 연방 군인들을 게으르고 규율이 없는 제멋대로인 녀석들 이라며 저주한다. 연방 군인들은 지온측 병사들을 극도의 이상주의에 빠진 극단적인 혁명론자 쯤으로 치부하며 싸움에 임한다. 그들의 서로에 대한 평가는 반쯤은 옳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규정이 좀 더 처절하게 싸우기 위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지온의 잔당들은 결국 커다란 스페이스 콜로니를 지구의 곡창지대에 떨어뜨리는데 성공하고, 이는 결국 군부 독재의 빌미를 제공한다. 군부 내의 사병 집단인 '티탄즈' 는 '거봐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따위의 구호를 외치며 전 지구적 단결과 군비증강을 주장하며 정권을 잡는다. 기동전사 제타 건담에서 독단적이고 오만한 집단으로 그려졌던 티탄즈.. 기동전사 건담 0083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과 함께 지온 잔당의 콜로니 낙하 작전을 저지하려 최선을 다했던 전함 알비온의 승무원들이 티탄즈의 새 군복을 입고 신이 난 표정으로 거울을 보는 장면에서, 우리는 어떤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요컨대, '적' 은 '절대악' 이 아닌 것이다.

여하튼 이 작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 두 가지. 하나는 로봇물 에서 전쟁물 로서의 리얼리티 추구라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후의 시리즈에서 제기된 리얼리티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이전 시리즈에 적용이 되는 가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초점에 신경을 쓰며 감상하면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생기는 작품.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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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2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오랜만에 TV에서 해 주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이지 않고(아니 실은 좀 움직였습니다.) 봤습니다. EBS에서 그레고리 펙의 추모 특집으로 '앵무새 죽이기'를 방영해줬네요.

하퍼 리의 유일무이한 출세작이자 장편소설인 '앵무새 죽이기'를 책으로 읽은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사백몇십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소설이지만 책 앞 뚜껑을 열면 마지막 장을 넘길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책이죠. 박진감 넘치는 전개 외에도 주제의식, 남부 시골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 어린 소녀를 나래이터로 내세운 특이함 등의 뛰어난 장점들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퓰리처 상도 받았구요. 작년인가요? 출간 40년을 맞이해 미국전역에서 독서캠페인으로 앵무새 죽이기 다시 읽기 운동을 벌이더군요.

영화는 글쎄요...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박진감 넘치는 장면에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박진감 나는 음악^^이나 너무나 반듯한 모습들이 약간 눈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관객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앨런J 파큘라가 제작했다지요. 그리고 EBS영화의 장점 중 하나는 더빙 대신에 캡션을 보여준다는 점인데..그레고리 펙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조용한 밤을 울리더군요. 아파르트헤이트와 별 다를바 없던 미국남부의 인종 차별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본 이 영화는 62년 작품입니다.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의 상징이 엉클 톰스 캐빈 이었던 것 처럼 흑인민권운동과 반전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위대한 '60년대'를 시작한 소설/영화를 '앵무새 죽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레고리 펙..이 사람만큼 기품과 신사다움 이라는 두 단어가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도 힘들겁니다. 우리 외할머니가 그의 열렬한 팬인 이유가 달리있겠습니까?ㅋㅋㅋ
모비딕, 나바론의 요새, 케이프 피어(이 영화에서 로버트 미쳠과의 불꽃튀는 대결에 비하면 리메이크 작에서의 로버트 드 니로와 닉 놀테의 대결은 새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휴일...아 또 오멘도 있군요. 연기변신이 너무 부족했던 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따라서 난 이 배우의 흐트러진 모습을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AFI는 앵무새 죽이기에서 그레고리 펙이 분한 '애티커스 핀치'를 미국 영화 백년 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선정했습니다. 펙에게 오스카를 안겨준 '애티커스 핀치'는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신사다움, 유머, 따뜻함, 자녀에 대한 사랑,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 정의감의 화신입니다. 너무 완벽해서 리얼리티가 떨어져 보인다는 것이 흠인데 펙의 아우라는 그 흠결을 메우고도 남음이 있지요....독립기념일에 직접 전투기에 올라타고 외계인을 공격하는 대통령, 전용기를 납치한 테러리스트를 다 때려잡는 싸움잘하는 대통령, 가족의 소중함을 설파하며 수백명을 파리 잡듯 잡아버리는 LAPD등등 요즘의 유치한 영웅들을 두고 가난한 시골 변호사를 최고의 영웅으로 선정한데서 헐리우드의 저력을 느낄 수 있더군요.

펙은 스크린 안에서 뿐 아니라 스크린 밖에서도 영웅의 면모를 지켜나갔었습니다. 총기협회 회장으로 온갖 오버를 다 떠는 찰턴 헤스턴에 비교하면 그의 모습은 너무나 더 돋보였습니다. 아마 미국 암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고 자신의 아들을 베트남 전에 참전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반전시위에 앞장섰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국민의 도리는 다하지만 국가가 잘못한 일은 반드시 지적해야만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요..이즈음에 민주당에서 펙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밀어야 된다는 운동도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80년대 레이건이 스타워즈 계획이다 뭐다 하는 진짜 영화 같은 군비 확충으로 구 소련을 압박하던 시절 70의 노구를 이끌고 고르비의 초청을 받아 소련을 방문해서 핵 없는 세상과 인류의 생존을 외치며 전략핵무기 감축에 관한 고르비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기도 햇습니다. 사생활에 있어서도 첫 이혼 이후엔 죽는 날까지 48년 동안 한 아내와 해로 했었구요.

스크린 쿼터제에 관한 안팎의 갈굼이 거세어지고 전세계를 획일화 시키는 헐리우드의 해악을 입에 거품 물고 씹어대면서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 입을 헤벌리고 있는 이중적인 내 자신이 좀 우습기도 하고 펙의 모습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백인 영웅에 대한 미국언론의 지나친 호들갑도 분명히 들어 있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가끔 마음을 편히 가지고 이런 영화, 배우에 푹 젖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나를 박애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단순히 내가 믿는 행위에 참여할 뿐이다.' - Gregory Peck (1916.4.5 ~ 200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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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517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


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ㅣ 2004년 8월 ㅣ 12,000원

다일사? 다시 보는 일제사..

어릴적, 교과서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던 학생이라.. 나는 가르쳐 준 역사만 외웠고 그 속 영웅들을 교과서대로 존경했다. 그 외의 역사, 사람들은 내 인식 밖의 것이었다. 아니, 다른 게 있다는 것조차 짐작 못했다.

이 사회 주류를 삐딱하게 봤던 대학생 때, 선배들이 건넨 '다현사' (다시쓰는한국현대사) 제도권 교육의 시각을 정면으로 들이 받는 관점에 내 두뇌는 작은 진동을 경험했었다. 헌데 그 '다현사'에도, 내 선배들이 내게 건 넨 다른 책과 텍스트에도, ‘경성트로이카’와 ‘이재유’, ‘박진홍’ 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일제치하와 해방전후 사에서 사회주의 흐름은 김일성의 무장투쟁 정도 봤고 해방 후 남로당의 멤버였던 박현영, 김삼룡, 이주하 정도 이름만 스쳐 알 뿐이었다.

그렇게, <경성트로이카>는 소설이라기보다는 감춰진 ‘사실’을 펼쳐 보여준 역사책이었다.


경성트로이카..

트로이카.. 세 마리의 말이 동등한 힘을 갖고 이끄는 삼두마차라는 뜻이다. 이재유는 모든 활동가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신과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고 따르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조직방식을 ‘트로이카식’이라 설명했었는데, 그것이 추후 조직의 이름이 되었다. (각잡고 살아야했던 그 엄혹한 시기에.. 무슨무슨 동맹이니 협의회가 아닌 트로이카라니.. 그 조직운영·활동원리 만큼이나 참 매력적이다! ^^)

이재유.. 나에겐 낯선 혁명가였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구속과 탈출을 반복했던 그를 잡고 너무 기뻐 기념촬영을 했고, '집요흉악의 조선공산당 마침내 괴멸'이란 제목으로 그 날 호외까지 발행했었다 한다.

경성트로이카 멤버들은 일제 식민지하 경성(서울)에서 총칼이 아닌 노조와 파업이라는 무기로 일제에 저항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대다수 우익 보수주의자들이 친일매국노로 돌아셨을때도 그들은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와 함께 조선의 독립과 그후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노농대중에 뿌리내리는 실천을 했다.

총칼보다 무서운건 그걸 움직이는 사람의 손이고 억압과 굴레를 거부하는 사람의 인식이다. 한 명의 전사가 아닌 노동자, 농민을 주인으로 세워 내는 것.. 무장투쟁의 전사들보다 노동현장에서 실천 활동을 폈던 그들이 더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지금 우리 노동운동이 처한 현실 때문만은 아닐게다.


불굴의 신념.. 그 에너지는 무엇일까?

수도 없이 갇히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지를 부려 탈출을 감행하고 다시 잡혀 와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 희망과 신념의 에너지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작가 안재성은 그것을 이타심에서 찾는 듯했다. "고문과 감방 밖에 얻을게 없는 가혹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이들은 근본적으로 이타적이고 선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라는 이재유의 생각을 빌은 표현과 프레시안에서 주최한 버스 노동자 안건모씨와의 대담에서 전태일이 자기연민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바로 그것 때문에 죽었다"라는 말하는 부분에서도 그러하다.

이타심.. 진정 그럴까? 뭐라 답하기 자신없다.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는 나는 그 길을 가면서, 작은 성과로 더 내딛을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하고 가끔 좌절하기도 한다. 가끔 잠수도 타고 깽판도 부리지만, 그래도 뚜벅뚜벅 길을 걷는데서 오는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거기서 느껴지는 행복감. 그런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아닐까 생각한다.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아마 내 평생 풀어야 할 숙제지 않을까?


이 땅 노동자의 역사.. 그 사작

나는 이 책의 주인공들을 감히 ‘모범’으로 삼지 않는다. 내가 사회적으로 철이 들면서부터 혁명을 꿈꿔 본적이 없는 개량주의자여선지, 이 책을 통해 '활동가의 자세는 이래야 하는구나..불끈!' 하고 감동하진 않았다.

서두에도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나보다 앞선 시대를 살며 일하는 사람을 역사의 주인으로 세우고자 그들을 조직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 그 은폐 되었던 '사실'이 우리 노동자의 역사로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혹한 시대의 고통을 맨몸으로 감싸 안고 죽어 간 이들과의 약속이었다.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총칼조차 없이 조직과 파업이라는 무기만으로 일제와 싸운, 남은 것이라고는 고문과 질병 밖에 없음에도 항상 즐거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동료를 지키기 위해 고문 틀에 올라 피를 한 바가지씩 쏟아내면서도 유치장에서 만나면 서로를 끌어안고 웃어 주던, 불행한 시대의 아름다운 영혼들과의 약속이었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숨기려 했지만, 100년도 안되어 우리는 부당하게 잊혀지고 역사에서 사라진 이들을 현재로 불러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아는 것. 그것은 일하는 사람들.. 노동자의 역사를 인지하고 기억하는 시작이다.

당과 노조의 활동가라면 한국노동운동사 쯤은 공부해야할게다. (나는 이 책을 계기로 공부하고픈 욕구가 생겼다) 소위 말하는 활동가, 우리 말고.. 이땅의 일하는 사람들.. 그 평범한 벗들에게 <경성트로이카>를 가볍게 권했으면 한다. 노동자 역사관 그 시작의 대중적 전파를 위해.


책을 덮고의 아쉬움..

이재유, 박진홍, 이현상, 김삼룡, 이관술, 이순금,이효정 등 그들은 일제시대에 활발했던 국내파 항일 사회주의 운동을 이끈 '뛰어난' 혁명가이자 활동가들이었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현장 중심의 실천 활동을 폈다는데, 그 노동현장의 모습이 내내 궁금했다. 그 뛰어난 혁명가들과 함께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했던 평범한 노동자들의 모습 말이다..

사회적으로 철이 들고부터 주류교육이 역사를 주로 '영웅'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는게 불편했는데, 경성트로이카도 거기서 못 벗어났다는 아쉬움이 느껴지는건 나의 오버인가? 책의 주인공이 불굴의 혁명가들일 수는 있어도 주인공들을 더 뛰어난 혁명가로 평가하게 했던 그들의 활동방식, 그들과 함께 노조와 파업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민중들의 투쟁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구체적으로 그려 놓았으면 소설로서나 노동자의 역사로서의 유의미성이 더 했을거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 어쩌다가.. <연대와실천>에 쓰게된 서평(?)입니다..
요 글로 한분이라도.. <경성트로이카>를 읽고 싶거나 선물하고픈 맘이 들었으면 좋겠네요.. 흑.. ㅡㅡ;;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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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618 우리모두 >

정말 오래간만에 글을 올리네요. '보스코프스키'님께서 칼럼방 구조조정의 사이에서(지금은 아닌가?) 이 칼럼방의 마지막 불씨를 살려 놓으셨군요. 대체 방장은 뭘 하고 있는 건지(술독에 빠져 있나...). 이번 주말에 좀 만나서 구박 좀 해야겠군요.
호주제 폐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해 글을 올려봅니다. 문답(問答) 형식으로 된 글이어서 이해가 쉽고,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자칫 소홀이 넘길 만한 부분에 대한 글입니다. (출처 : 네이버 N메거진)

호주제 폐지를 놓고 국회 및 여성부 등의 실질적인 움직임과 보도가 이어지면서 인터넷에는 호주제 폐지와 관련한 인식 부족으로 인해 오해의 글이 오르며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네티즌들이 자주 범하는 호주제 폐지에 관한 9가지 대표적인 오해를 뽑아 바로 알리고자 한다. 제대로 알고 호주제 폐지와 관련한 건전한 토론이 이뤄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례로 든 오해의 글들은 우먼타임스 독자게시판을 비롯해 여성부, 여성연합, 가정법률상담소,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모임, 호주제 폐지 찬성하는 사람들 카페 등에 게시된 것들이다. <편집자주>

1. 사회적 대혼란이 올 것이다

▶오해 : △ 외국이 국제적 표기 기준인 미터법 중심의 도량형 대신 피트나 쿼터, 갤론 등을 쓰는 것은 미터법으로 바뀌었을 때 들어가는 비용 등 대혼란을 우려해서다. 

△ 이름, 친척 관계 등에서 대혼란이 일어날 호주제 폐지를 구태여 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나.

▶진실 : 변화 과정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간의 비용지출도 필요하다. 그러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겠다는 우리나라가 법에서부터 양성평등을 위배하는 것은 문제다. 그 때문에 유엔인권위원회가 폐지를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해도 관습에 영향을 받는 가족제도가 혼란스러울 만큼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재혼가정의 자녀 등 소수에게만 당장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혼란을 느낄 만큼의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2. 성(姓)에 대한 혼란이 올 것이다

▶오해 : △ 자기 맘대로 아버지 성(姓)을 따르다가 어머니 성을 따르다가 하다간 누가 친척이고, 누가 남인지 모르겠군요.

△ 만약 초등학교 때 김태영이란 이름의 학생이 중학교 때 부모가 이혼해서 중학교 앨범에는 이태영이 되었다가 다시 고등학교 때 부모가 이혼해서 다시 박태영이 된다면 이 사람의 진짜 이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진실 :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해서 친권을 가진 이혼여성의 자녀나 재혼가정의 이전 결혼에 의해 태어난 자녀의 성이 무조건 강제적으로 어머니나 새 아버지 성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성을 변경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즉, 그럴 필요가 있을 때만 희망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또 부모의 협의에 의하여 자녀의 성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일방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가능한 한 지켜주려고 하는 선진국가들이 일반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법적 수준에 맞춰나가는 것이다. 이미 이런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들에서 친척 인지의 문제나 성이 자주 바뀌어서 사회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다. 

3. 가족에 대한 전통적인 의미가 파괴될 것이다

▶오해 : △ 이것은 멀지 않은,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는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에도 휘몰아칠 혼란의 예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 아니면 둘밖에 없는 자식들의 새로운 출발에서 겪게 될 ‘성(姓)’ 선택의 논란의 시작입니다. 불화의 씨앗을 안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가정이 과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진실 : 현행 민법상의 가족이란 함께 사는 친족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호주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 관념적인 가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민법상의 가족은 현실생활의 가족과는 무관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민법이 규정하고 있는 ‘호주와 가족’ 부분이 삭제된다는 것은 현실생활공동체인 가족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현행 민법에서 호주와 관련된 조항이 삭제되더라도, 이를 제외한 민법의 제4편 친족편 중 총칙, 혼인, 이혼, 부모와 자, 후견, 친족회, 부양 부분에서 총체적으로 가족 관련 규정들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문제가 발생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가족의 행복은 정부의 복지정책, 가족간의 사랑과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호주제에서 비롯될 리는 없는 것이다.

4. 호주제가 폐지되면 이혼율만 증가할 것이다

▶오해 : △ 이혼할 때 편리하고자 호주제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 이혼율이 세계 3위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견고하게 다져야 할 이유가 아닌가 

▶진실 : 전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호주제가 존재하지 않으나 가족과 가족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호주제가 존재하는 현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히려 우리의 호주제도와 비슷한 제도를 갖고 있다가 이미 폐지한 일본·스위스보다 높다. 호주제로 인하여 확대·재생산되는 가부장적 사고가 부부갈등을 조장하고, 가족해체를 촉진시키고 있다고 볼 때, 호주제가 폐지되면 평등한 부부관계·가족관계가 확립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오히려 이혼율은 줄어들고 건강한 가정이 형성될 가능성이 더 높다. 

5. 호주제는 일제의 잔재가 아니다

▶오해 : △호폐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호주제가 일제강점기(일제시대)에 일본이 들여온 제도라면 전시대에는 호주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융희 3년 3월에 민적법이 실시되고 민적법에는 호주 승계 조항이 있으니 이 주장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진실 : 호주제는 중국의 종법제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잔재일 뿐 우리 고유의 전통은 아니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중기까지 딸과 아들 사이의 상속분에도 차별이 없었다. 제사도 딸과 아들이 돌아가며 지냈으며, 외손이 제사를 모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아들만이 제사를 모실 수 있다든가, 제사의 승계를 통하여 가계를 계승한다든가 하는 관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후기 중국에서 받아들인 종법제가 강화되면서 아들만이 제사를 모실 수 있게 됐고, 제사를 통하여 가계를 계승한다는 관념이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현행 호주제와 같은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 오늘날의 호주 승계와 같은 제도도 없었다. 

일제는 호주제가 조선의 관습이라고 왜곡하면서 실제로는 1898년의 일본 명치 민법에 규정되어 있었던 호주제를 도입했고, 이는 식민통치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됐다. 현행 호주제의 모태는 1898년 일본명치민법의 호주제다. 

6. 근친간 결혼·성관계가 늘 것이다

▶오해 : △ 근친결혼이 공인된 거나 마찬가지라 근친상간은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더욱 무분별한 무차별 섹스시대가 올 것이다.

△ 만약 결혼시 호적등본이나 제적등본에 생부의 성을 기재하고 혼인신고시 이를 제출하는 것을 의무화 한다해도 예전의 동성동본금혼법을 어기고 결혼하는 것처럼 사문화될 것이기 때문에 호주제 폐지에 반대한다. 

▶진실 : 호주제의 존폐와 상관없이 신분증명제도로서의 호적은 필요하다. 그 때문에 호주제를 대신할 가족부제(기본가족별 편제방식)나 1인1적제(개인별신분등록방식) 등이 호주제 이후의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부모가 누구인지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한 개인의 신분을 등록하고 증명하는 제도는 계속 존재하기 때문에 몰라서 근친간의 결혼이 이뤄지는 등의 문제를 우려할 필요는 없다. 또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남매간 성 관계 등을 우려하는 것은 취지와 어긋난 엉뚱한 우려다. 

일본의 근친상간이 호주제 폐지와 관계 있는 듯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단지 일본의 성도덕 때문이며 일본 성산업이 이를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또 일본 역시 근친상간은 아주 희귀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7. 호주제 폐지된다고 여성인권 상승되나

▶오해 : △ 과연 폐지를 하면 여성들의 인권이 상승되는가하는 의문이 생기네요. 호주제와 여성의 인권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저는 의심이 생기네요.

▶진실 : 현행 민법상 호주 승계 순위(민법 제984조, 호주제 폐지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아들-손자-딸-손녀(혼인한 딸과 손녀는 제외)-처-어머니-며느리의 순으로 규정하여 남자를 우선 순위로 하고 남자가 없는 경우에 2차적으로 여자가 승계하도록 하고 있다. 미혼의 딸이 호주가 됐다 하더라도 혼인하게 되면 남편의 가(호적)에 입적해 호주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딸에 의한 가(家의) 승계가 일시적이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대를 잇기 위해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때문에 여아를 낙태하는 등의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이로 인해 심각한 성비 불균형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또 여성을 남성의 예속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부부의 평등권과 여성의 부모로서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호주제는 법으로 ‘혼인과 가족생활에 있어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헌법을 위배한다. 따라서 호주제 폐지는 법적인 여성인권을 남성과 똑같은 수준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8. 폐지에 따른 절차와 비용은 누가 부담하나

▶오해 : △ 폐지하기 위한 비용은 어떻게 하나요? 300억은 폐지를 찬성하는 사람들끼리 아님 이혼녀끼리 모을 건가요? 결국은 혈세겠군요? 

△ 호주제는 우리 법률체계의 아주 기초적인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신분과 가족관계를 공시하기 위해 생겨난 제도입니다. 그래서 모든 법률이 호주제도에 기초하여 법률을 정비하였지요. 그러나 일부 우매한 여성들의 주장은 우리 법률체계를 바꾸자는 얘기나 다름이 아닙니다. 

▶진실 : 현재 호적제도는 전산화되어 있다. 따라서 호적 편제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어 호적 전환이 용이하다. 대법원이 연구 조사해 추산한 바에 따르면, 가족부제(기본가족별 편제방식) 또는 1인1적제(개인별신분등록방식) 중 어떤 형태로 전환되더라도 전환하는 시간과 비용은 동일하다고 한다. 대략적으로 3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고 240억원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성부는 “우리 가족제도와 사회를 민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비용으로 그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히고 있다. 

NEIS를 구축하는 데 1조원이 들었다고 하며 호주제 폐지로 인한 비용은 수십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다. NEIS는 데이터베이스 자체를 새로 만든 것인 반면, 호적제도는 이미 모든 데이터베이스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분류만 새롭게 하면 되는 것이다.

9. 외국에선 아버지 성 쓰기가 일반화돼 있다

▶오해 : △ 부계혈통 사회와 가부장적 사회를 동일하게 보십니까? 아버지 성을 이어받도록 되어 있는 것은 양성평등을 억압하는 것입니까? 남편의 성을 쓰고, 아버지의 성을 사용하는 미국 사회는 뭡니까? 

▶진실 : 미국에는 아버지 성을 따르는 관습이 현재도 있으나, 법적으론 대부분의 주에서 성은 부모의 협의에 의해 자유로 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영국도 마찬가지. 일본도 1991년 바뀐 민법이 부모 성 중에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이 외에 독일은 자녀의 성은 부모가 선택할 수 있되, 자녀의 출생 1개월 이내에 합의가 없으면 후견재판소가 부모의 일방에게 결정권을 주도록 법에서 규정(1993 민법)하고 있다. 중국도 1980년 혼인법에 따라 부모의 성씨 중에서 한 쪽의 선택이 가능하도록 법적으로 보완했으며, 전혀 다른 성을 써도 무방하도록 했다. 이외에도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등 여러 나라가 법적으론 부모의 성씨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에게 있어 호주제 폐지는 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법적인 평등정신을 구현하는 것뿐이다. 어떤 성씨를 쓸 것인가는 부부간의 협의로 이뤄지므로 대개의 부부는 남편 성을 그대로 쓸 것이다. 

답글 참조 : 여성부, 호주제폐지운동본부, 한국가정법률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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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리신 글 20030510 >

예전에 누리까페에 그에 관한 글을 올린 적도 있기는 한데, <빌리 엘리어트>란 영화는 아마 보신 분이 많을 줄로 압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영화이고, 얼마 전에 다시 보게 되었을 때도 눈물이 날 뻔해서 울음을 겨우 참았었지요. 줄거리를 얘기하는건 정말 싫어하는 일이어서, 간략한 상황만 말씀드립니다.


탄광촌 출신의 빌리 엘리어트라는 소년이, 광부인 자기 아버지와 함께 발레를 가르치는 왕립학교(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요)에 입학하기 위한 오디션을 치르러 런던에 도착합니다. 당시는 대처가 집권하여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던 시기였고, 빌리의 아버지 역시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지요. 빌리는 오디션을 치르지만, 자기가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홧김에 자신을 귀찮게 구는 한 남자아이의 얼굴을 갈겨버립니다. 그로 인해 빌리와 빌리의 아버지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훈계를 받는 처지가 되죠. 훈계를 마친 심사위원들이 빌리의 아버지에게, 발레에 관심이 있느냐는 따위의 질문을 던집니다. 평생 석탄만 캐고 살아온 빌리의 아버지야, 발레를 볼 기회도 거의 없었겠죠. 그는 멀뚱거리며 얼빵한 대답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은 빌리에게, 춤을 추면 어떤 기분이 드느냐고 묻습니다. 빌리, 머뭇대다가 '춤을 추면 날아갈 것 같고 .. 어쩌고저쩌고..' ..

대화를 마치고 일어서는 그들의 뒤에다 대고,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말합니다. "엘리어트 씨, 파업이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 심사위원이 누굴 놀리는건가 생각했었습니다.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


그 때, PC 통신 상에서 제가 있던 한 영화모임에 하종강님께서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하종강님은 빌리 엘리어트에 대해 글을 쓰면서, 그 장면에 관해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것은 결코 조롱이 아니라고. 그런 말을 조롱으로밖에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 사회의 시민 의식의 천박한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것은 조롱이 아니라, 한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보여주는 연대의 표시라고 .. 저는 그 말을 듣고,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왕립학교의 입학시험 심사까지 맡을 정도라면, 결코 가난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 식으로 말하자면, 강남에 몇십평짜리 집과 차 두세대는 갖고 있는 부르주아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상상할 수 있습니까? 벤츠를 타고 가던 사람이 옆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는, 차의 창문을 열고 '힘내십시오!'라고 외친다는 것을 말이지요. 고급 와인을 마시면서도 노동문제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요. 저는 그런 행동들을 굳이, 모두 모순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노동자들의 아픔에 연대하기 위해 그들이 꼭 와인 대신 소주를 마시고, 벤츠 대신 티코를 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그들이 자신의 부유함을 누리는 것을 비판하는기 보다는, 자신의 부유함을 위해 남의 생존권을 억압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만 파묻혀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해버리는 것을 비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풍족한 생활에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다는 것 역시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저는 그 모든 행동을 '연대'라고, 진정한 '시민으로서의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우리모두에 이명원님이 올린 글 중에, 김현이 김지하에게 했다는 말 한마디가 생각납니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나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없어. 난 대신 성실한 부르주아로 살다가겠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에, 미약하나마 연대와 지지를 보냅니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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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환 님 글은 20030422 진보누리 게시판 메인글.  내가 생각하는 좌우, 보진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물론 이사람이 더 잘 생각하고 더 잘 썼다.^^
이호곤 님 글은 20030424 진보누리에서 발견 >



[주대환] 한국사회에 왼쪽의 이념은 존재하는가?

무엇이 왼쪽이고 무엇이 오른쪽인가? 그 답변은 항상 사회 상황과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져 마땅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 국가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 전환해가던 90년대의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주도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왼편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국가사회주의를 고수하고자 하던 사람들을 왼편이라고 해야 할지 헛갈렸던 적도 있다. 그것은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타파하든지 고수해야 할 현상(現狀)이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지향하든지 거부하든지 해야 할 그 무엇이었던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군사적 개발독재의 시절, 또는 그로부터 정상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던 시기에는 그런 변화를 주장하는 쪽이 왼쪽이고 그런 변화를 거부하는 쪽이 오른쪽이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이 진보파로 인식되고 극우 파시스트들이 보수파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구분되지 않은 한 덩어리였으며, 따라서 진보와 개혁은 혼동되고,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지 무엇이 진정한 보수인지에 대해서 지식인들이 말하는 것과 대중이 말하는 바가 달랐다.


지금 우리나라는 15년 간의 민주화 과도기를 막 벗어나 정상적인 국민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비로소 그런 개념적 혼란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자본주의라는 세계사의 한 시대에 통용되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개념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듯하다. 조만간에 우리나라에서도 진보는 사회주의자, 보수는 자유주의자를 정확하게 가리키게 될 것이다.


정상적 국민국가가 아니었던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오른쪽도 없었고 진정한 왼쪽도 없었다. 파쇼적인 개발독재를 벗어나고자 하면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구분 없이 모두 개혁이었으며 모두 진보였다. 우리나라 언론이나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진보로 인식되고 분류되는 입장들은 사실상 일반적인 현대 민주주의나 인권의 범주, 아니면 우리나라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찬성하면 진보라고 분류되었으나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해야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할 때 극우적, 시대착오적 사고를 고집하는 자들이 보수를 자처하는 이상한 양상이 나타났고 사회 전반의 흐름보다 뒤쳐진 이러한 정치권의 추세를 사회 전반의 흐름으로 오인하여 추수한 데서 지난 대선 시기 이회창이나 이인제의 실패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보수의 주류를 차지하지 못하고 보수 가운데 가장 오른편, 극우적인 부분, 아니면 반동적인 부분을 자기 색깔로 받아들임으로써 낭패를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대변하고자 했던 부르주아지의 주류가 이미 내버린 색깔로 승부를 보고자 설쳤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친(親)조선로동당이면 왼쪽이요, 반(反)조선로동당이면 오른쪽이라고 생각하는 오랜 습관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5, 60년 전의 상황에서 비롯된 사고 습관인 것이다. 조선로동당이 모든 정치철학적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면, 그리고 조선로동당이 곧 왼쪽이라면 조선로동당이 훌륭하면 왼쪽도 훌륭할 것이고 조선로동당이 아름답지 못하면 왼쪽도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분단된 지 50년, 남북한이 각자의 길을 간지 오래되어 조선로동당이 남한 사회에서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런 사고 습관을 애초부터 가지거나 물러 받은 세대가 5, 60대 이상이니 2, 30대에게 조선로동당이 더 이상 진리의 기준도 아니고 좌우의 기준도 아닌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회창과 이인제의 실패는 그런 사고 습관이 이제 젊은 세대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모든 ‘진보’를 친조선로동당으로 몰아붙여 쉽게 무찌르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사실 김용갑 같은 사람들은 이회창의 표를 많이 깨었다. 이회창이 만약 김원웅을 앞장 세웠다면 노무현이 이회창을 이길 수 있었을까? 부르주아지의 특정한 분파가 아닌 계급 전체의 입장은 이제는 자유주의자를 원하는 것이다. 재벌은 노무현을 거북하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부르주아 계급 전체는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이회창을 거북하게 느끼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반국가단체인 조선로동당을 찬양하는 일체의 언행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행동이니 만약 친조선로동당이 왼쪽이라면 남한에서 왼쪽은 존재하기 힘든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민족주의에 기대어 용케도 친조선로동당도 존재하고, 반조선로동당을 기치로 한 가짜 오른편도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을 일당 독재로 통치하고 비현실적 정책으로 수십만 백성들을 굶겨죽인 조선로동당을 지지하는 어떤 세력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한총련이나 한총련 출신 주사파 운동권은 결코 진보가 아니다. 그들은 극좌파도 아니다. 촌스런 민족주의자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반조선로동당을 깃발로 하는 조갑제 같은 사람들은 조선로동당의 그림자 같은 존재이니 조선로동당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존재들이다. 그들 역시 일관된 극우파도 아니다. 분단국 남한에서는 이렇게 이념 스펙트럼이 이렇게 모두 왜곡되어 있었다. 진정한 극좌파 아나키스트들이나 진정한 극우파 파시스트들도 모두 이제야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진정한 좌파 사회주의자도 우파 자유주의자도 이제야 자기의 정체성을 인식하거나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누군가를 반대하는 것을 자기의 존재의 이유로 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한국은 OECD 회원국이고 스페인 수준의, 부분적으로는 이탈리아 이상의 경제적 발전을 이룬 나라로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갈 예비군으로서 정치적으로도 이제 선진국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럽식으로 진보와 보수의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들이 무지개처럼 나타나는 가운데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양대 정당이 중심을 잡는 그런 정치구도를 형성하게 될 가능성보다는 미국식으로 전반적인 자유주의 우세의 지형 속에서 자유주의의 두 분파가 양대 보수 정당을 형성하고, 사회주의적 진보파는 자유주의 좌파 정당에 포섭되거나 아니면 그를 통해서 주장을 드러내는 정도로 그치고,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극우파들도 자유주의 우파에 포섭되거나 그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낼 가능성이 보다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정치철학의 흐름을 놓고 자유주의의 흐름을 오른편, 사회주의의 흐름을 왼편이라고 부르는 세계사 서술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좌와 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두고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각기 다른 전망을 제시하고 주장을 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점점 더 크게 달라지고 있다.


장하성 교수는 노무현 정권의 경제 정책 책임자들에 대해 “경제팀 개혁 간 데 없고 안정만 남았다.”고 비판한다. 장하성 교수는 진정한 자유주의자로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 장하성 교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좌(左)인가 우(右)인가? 장하성 교수는 우(右)다. 진정한 우(右)인 것이다. 자유주의적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은 이제 ‘보수’라고, 보수 내의 개혁파라고 불러야 한다. 유시민은 스스로 자유주의자를 자처하고 있거니와 새로운 우파, 진정한 우파의 이론가로 자리 매김할 것이다. 문성근과 명계남과 유시민과 강준만, 그들이 진정한 우파인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부유세를 신설하고, 간접세를 줄이고 직접세를 늘이고, 상속세나 재산세율을 높이거나 엄격한 법률적용으로 재산과 소득이 많은 사람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걷고, 더 많이 걷은 세금으로 복지 예산을 크게 들이자는 주장을 한다. 그들은 또 군비를 축소하여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실시하자고 주장한다. 그들은 노동조합에 보다 많은 자유와 권한을 주자고 주장한다. 그들이 왼쪽이고 진보파인 것이다. 그들은 유럽의 진보정당들이 주장하고 실천해왔던 정책들을 우리나라에도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한국의 진보파들에게 지난 대선은 참으로 의의가 크다. 부유세라든지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슬로건이 진보의 내용을 채우고 진보의 정체성을 대중적 차원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이른바 ‘운동권’의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메우고 있던 국가 사회주의적 ‘맑스-레닌주의’의 환상을 벗어나 한국의 사회주의자들, 좌파는 이제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사의 우여곡절 속에 좌파 이념들이 상호 교배와 생식을 거듭하고 진화를 거듭하여 나타난 현대 사회민주주의, 유럽 진보정당들의 이념과 정책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내건 슬로건과 정책들은 유럽 진보정당이 이미 이루어 놓은 것들이다. 유럽의 노동자에게 사회주의는 더 많은 세금과 더 많은 복지 예산을 의미하고, 실업과 산재와 질병과 노후생활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보장을 뜻한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보다 능동적으로 보다 진지하게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철학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에서 ‘진보’도 대중적 정치 세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권영길의 선전(善戰)은 바로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자본주의와 한국 사회의 발전 단계와 그 모순이 바로 사회민주주의적 평등 이념과 정치철학,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정책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과 연대의 정신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통일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더욱 절실하다.


사회민주주의는 현대의 대승불교다. 삼국시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승 불교를 열렬하게 받아들여 세계적 수준의 나라를 만들고 통일을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세계적 수준의 나라를 만들고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하고 순진하다고 나무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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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곤] 어느 노무현 지지자의 물음에 답하며...


민주노동당은 ‘보수개혁주의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가?
-어느 노무현 지지자의 물음에 답하며-



얼마전에 나는 정치학 박사과정의 한 노무현지지자를 만났다. 그는 대통령선거전의 어떤 모임에서 권영길후보를 지지하는 박사과정의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였지만, 권후보의 지지자가 자신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일제식민지체제 시기를 예로 들자면,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무력 통치에서 문화통치나 제한적인 조선인의 자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한편 식민지체제를 합리적으로 바꾸는 것이 조선사람들에게 덜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당시로는 불가능해보이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요.
이처럼 식민지권력 자체를 해체하고 싶어하는 그들에게 식민지권력을 합리적으로 행사하라는 문화통치나 자치를 위한 운동만 벌이라고 하면 조선의 독립은 없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노무현후보에게 당신이 투표한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수구세력이 지배하는 소수독점체제를 조금 더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개혁하면, 많은 사람들이 덜 고통스러워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여전히 아프고 힘들어 할 사람들이 있지요. 모두 다 당신처럼 노무현에게 투표하면 그들을 대변하는, 소수의 지배세력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남한의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당,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는 거지요.”

그는 선거전에 나를 만났다면 투표를 달리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내친김에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최근에 내가 책에서 읽은 것을 약간 바꾸어 비유를 해볼까요. 굽은 절벽 길에 사람들이 급히 차를 몰다 자꾸 떨어졌습니다.
마음씨 착한 사람들은 구급차를 대기시켜놓고 그들을 병원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일부의 사람들은 절벽에 울타리를 치자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다니지 왜 차를 타고 다니느냐고 합니다.
벼랑길에 울타리를 쳐도 급히 차를 몰다가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이 생기니 어떤 사람들은 아예 안전한 새 길을 내자고 주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사회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불행의 원인보다 결과에 대한 처방을 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현실적’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입니다. 문제의 근본원인을 없애기 위한 노력보다 지금 당장 실현가능한 것, 부분적 예방책을 찾는데 주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로 민주당의 개혁파와 개혁적국민정당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들은 사회제도보다는 개인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데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반문명주의자나 소규모 공동체운동에서 많이 보이는 정치적 냉소주의자들입니다. 네 번째 사람들은 문제의 근본원인을 없애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사회제도를 만들자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 같은 민주노동당의 당원들 입니다.
저는 이런 네가지 노력들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다 소중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여기서 말한 다양한 역할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사회사업을 돕기 위한 성금을 내거나 저소득층 방과후학교의 운영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분적 개혁, 개량을 위한 활동을 하고 노무현정부의 개혁을 지지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건강하고 진보적인 삶을 살기위한 노력을 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누군가 사회사업, 부분적 개혁, 개인적 삶의 자세 바꾸기 등만으로 문제해결이 충분하다든지 각자 자신이 하는 일이 문제해결에 가장 중요하니, 나에게 새 길을 내는 노력을 그만두라고 한다면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겠지요.
새길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든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든지, 새길을 내는 노력이 자신들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든지 하면서 새 길을 내기위한 나의 노력을 유보시키거나 그 의미를 왜곡하려 한다면 저는 그것에 반대하여 싸웁니다. 앞의 세 가지 노력만 하다보면 저절로 새 길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새길을 내려는 노력이 앞의 세가지 노력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그러면 노무현의 개혁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고 물었다.

“노무현, 유시민, 강준만 등은 스스로 인정하듯이 보수주의자이면서 개혁주의자입니다. 그들은 개혁을 위해 수구세력과 싸우지만 그들의 싸움과 개혁은 수구세력이 지배하는 권력과 체제 자체의 해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소수특권층의 권력이 합리적으로 행사되기를 바라고 특권층의 반칙과 부패를 개혁하려 하지만 특권층 자체를 없애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정치적 입장과 더불어 권력을 위한 욕망 때문에 그들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입니다.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는 여러 문제들에서 보수의 힘이 센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의 편을, 진보의 힘이 센 사안에서는 진보의 편을 더 많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지기 전과 가지고 난 후의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그것이 보수와 진보의 어느방향으로도 일관되게 나아가지 않는 그들의 정치노선, ‘현실주의적 개혁노선’이 가진 유일한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다수의 국민들이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도 개혁에 대한 전망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노무현의 말과 행동, 실천은 한편으로는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대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열망을 보수적인 틀과 전망속에서 가두어 두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치개혁, 재벌개혁, 교육개혁, 언론개혁, 검찰개혁, 의료개혁 등에서 그의 개혁목표는 정치인, 재벌소유자, 학교장, 언론사 사주, 검사, 의사 등이 가진 권력을 제한하여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권력이 행사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은 우리 사회의 정치와 경제, 교육, 언론, 검찰, 의료 등의 문제로 인해 다수의 국민들의 받고있는 고통을 부분적으로 완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러한 보수적 개혁마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적 상황에 따라 기회주의적으로 처리합니다. 해양수산부장관이 되기 전과 후 새만금에 대한 태도, 대통령 되기 전과 후의 미국에 대한 태도, 교육부 장관이 되기 전과 후의 교육정보화시스템 네이스에 대한 태도 등등 말로 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요.


우리는 국민들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대변하여 수구세력과 싸우는 노무현을 지지하지만 수구세력과 타협하여 국민의 열망을 지금의 체제에 가두려는 그의 언행과 정책에 비판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노무현의 보수적 개혁에 대해 우리의 진보적 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수구세력과 싸움을 하거나 개혁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그들이 수구세력과 진정으로 싸울 의사가 있으면
자신들보다 더욱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이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들의 이러한 행동이 수구세력과의 싸움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들의 더 많은 개혁, 더 근본적 개혁을 위한 요구에 대해 ‘비현실적 또는 관념적’이라며 공격합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수구세력과 같은체제의 수호자 역할, 보수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합니다. 그들은 수구세력과의 권력경쟁을 위해서 또는 그들의 신념과 원칙에 의해서 수구세력과 싸움을 하지만 다른 한편 같은 이유로 그들과 협력하여 체제를 수호하고 진보세력을 억압합니다.
그들과 우리가 수구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에는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남한사회의 미래와 권력을 놓고는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이나 유시민을 지지하는 네티즌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네티즌들 사이의 논쟁을 보면 비판이나 논쟁의 초점이 ‘그들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에 가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나는 노무현이나 유시민과 같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그들 지지자들도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나 목적이 좋으냐 나쁘냐, 그들이 나와 같은 정서를 가졌느냐 아니냐, 개인적으로 친하냐 아니냐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진 정체성, 정치적인 전망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 실제의 말과 행동, 실천을 통해 나타날 때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판의 초점은 인간 노무현이나 유시민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유시민은 좋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가 87년 대통령선거에서 4자필승론을 이야기 한 것은 잘못이지요. 노무현은 좋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가 김대중과 같은 미국식 정치, 경제체제를 향한 개혁을 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파병을 결정한 것, 노동자들에게 불법파업엄단 운운하는 것 등도 물론 잘못이지요.”



그는 왜 이런 이야기를 다른 민주노동당원이나 당의 선전물에서는 제대로 볼수 없는지 물었다.

“사실 우리당도 그런 점에서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당간부들을 포함한 다수의 당원들이 민주노동당이 가져야 할 정치적 입장을 모든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일관되게 적용시킬 만큼
계급적으로, 정치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탓이지요.
당의 신문이나 성명서, 논평, 특보 등이 나 당의 대중정치가들이 그런 것을 제대로 할만큼 우리의 역량이 성숙되지 못한 탓에 세련되게 당의 입장을 표현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 전국민의 관심을 끈 검찰인사와 개혁에 관한 노무현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토론회에 대한 당의 논평이 있었지요. 노무현정부의 물갈이를 지지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개혁방안이 없음을 비판하면서 몇가지 검찰개혁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정한 인사위원회구성, 기소독점주의 폐해시정, 상명하복제 폐지, 검찰총장의 지위와 독립성 강화, 특검제 상설화
등등으로 우리당의 검찰개혁에 관한 입장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당의 전략적 사고가 묻어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은 보이지 않습니다. 진보정당의 논평이 한겨레 신문이나 개혁적국민정당의 논조와 별차이가 없지요.
우리의 검찰개혁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사이의 정치적 중립이나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 뿐만이 아닐겁니다. 자본과 노동, 권력기관과 시민들, 사회적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시장과 자본, 국가를 수호하는 검찰이 아니라 그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인간적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는 검찰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수호하는 일을 주업무로 하는 검사들, 공안사건과 시국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들이 주도하는
특권층화된 검찰의 해체이며 권력의 부폐와 불의를 엄단하는 반부폐검사, 약자들의 짓밟힌 권리를 찾아주는 민생검사들이 주도하는 평민화된 검찰의 건설입니다. 그럴려면 무엇보다 검사의 수를 늘려 ‘격무에 시달리는 검찰’을 격무로부터 해방시키면서 검찰내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검사를 소수전문화하고 검찰의 중심을 민생검사와 반부폐검사들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런 것이 남한사회의 다수 국민을 위하고 피지배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이 요구해야 할 검찰개혁의 내용에 기본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검찰체제 자체를 뛰어넘지 않는 검찰개혁을 주장한다면 목표와 방향은 같은데 노무현과 개혁의 시간표만 다른 것이 되고 말지요. 그래서는 우리당이 ‘노무현은 혁명중’(오마이뉴스)이라는 말로 검찰개혁의 보수적 한계는 숨기고 그 의미는 과대포장하는 보수개혁주의자들의 선전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번 보궐선거뿐만 아니라 내년의 총선을 거쳐 노무현의 집권기간 내내 우리는 노무현의 개혁에 대해 어떤 태도를 표명해야 할 것이다. 그럴때마다 그 문제가 파병결정이든, 철도민영화이든, 선거법개정이든, 교육문제이건 간에
우리당이 그들과 어떻게 다른 사상을 가졌는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즉, 그들이 존중하는 가치와 우리가 존중하는 가치들이 얼마나 다른지를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시장과 효율성, 약육강식의 경쟁, 개발과 성장 보다 인간적 요구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 기본적 인권, 사회적 책임, 연대와 협력, 강자와 약자간의 정의로운 질서, 절제와 생태계와의 조화 등등을 대비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혁사안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다른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진보적 개혁에 대한 상을 제시하고 이를 기준으로 노무현의 보수적 개혁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다수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에 대한 보수적 전망을 넘어설 수 있게 해야 한다. 남한 민중 가운데 노무현의 보수적 개혁만으로 행복할 수 없는 계급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 우리가 이런 차별성을 분명하게 보이지 못하면 우리는 노무현과 같은 정치적 지향을 가졌지만 개혁에 대한 시간표만 다른 집단으로 보일 것이다.

Posted by ta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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